인생과 말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거듭난 삶 2016. 10. 4.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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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권위

 

: [ 5:19-2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그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27)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

 

여기 이른 "본다" 말은 현재사로서 부자일체(父子一體)에서 보는 것을 말함이니, 불현계(不現界)에서 되는 일이다.

 

그것은 시간적 선후(先後) 가져오는 모방적 행위를 말함이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시는 아들의 종속적의지행위(從屬的意志行爲) 말함이다.

 

행사는 부자(父子) 중복(重複) 행위를 말함이 아니고,

부자의 일체적(一體的) 행위를 가리킨다.

 

,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일이 실행됨을 말함이다.

 

 

 

[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보다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

 

여기 "랑하사"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 관계에 나타난 사랑을 가리킨다.

 

"보이시고" 말은 계시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미래사로 것은 보이는 행위가 현재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계속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역(中保役) 통하여 계시하시며 행하신다.

 

(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1:27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보다 " 이란 말을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 일들보다 "이란 뜻이니, 38 병자를 고치신 일보다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일을 가리킨다.

 

 

 

[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

 

헬라 원문에는 귀절 초두에 " 그런고 하면"이란 말이 있다.

그러므로 귀절은 앞절의 " "이란 말을 설명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일으키심"이란 말은 영적, 또는 육체적 부활을 겸하여 가리킨다.

 

"같이" 말의 헬라 원어가 여기서는 일체 동행(一體同行) 뜻을 가졌고, 시간을 서로 달리하는 중복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가리킨다.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살릴 자를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심판 권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인데,

 

다음 귀절들(22,23) 사실을 자세히 해설한다.

 

즈안(Zahn), 귀절 말씀이 단지 대종말에 나타날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죽은 " ,

"일으켜" ,

"살리심"이란 말들이 현재 영적 관계로 사용될 수도 있다.

 

아니라, 여기 "일으켜 동사(動詞), "살리심" 이란 동사가 모두 현재사니 만큼, 귀절 말씀을 대종말에 나타날 부활에 국한하여 생각할 없다.

 

스밀데(E.Smilde) 말하기를, "21절의 말씀은 살리는 운동의 일반적 관설이고,

24-25절은, 현재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내적으로 소유할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고,

26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는 신학적 진술이고,

29절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신자들이 받을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 하였다.

(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7).

 

 

 

[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귀절은 헬라 원어에서 "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것은 귀절이 귀절의 설명 문구인 사실을 보여 준다.

 

"심판"이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살리시고 어떤 사람은 본래 정죄된 대로 두시는 그의 행위를 가리킨다.

 

 

 

[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은 아들을 공경하는 데서 실현된다는 뜻이다.

 

뜻은 하반절에 밝히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신 처지를 가리킨다.

 

24-29. 구절들은,

 

(1) 그리스도께서 현세에 복음에 의하여 사람들을 영적(靈的)으로 중생하게 하심과

(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원리와

 

(26-27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27)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3) 내세(來世) 신자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주실 것을 가리킨다.

 

(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 어귀는, 말씀이 생명력(生命力)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 "듣는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 범신론 사상(汎神論思想) 가르친 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들음은, " 보내신 "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

 

( 17:21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것이 되었도다;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스밀데(E.Smilde), 점에 있어서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稱義論)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44).

 

 

 

[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것을 가리킨다.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 때라" 하신 말씀(25 하반) 현재 신약 시대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역사적 인물이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12 후에 예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4:6 거기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육시쯤 되었더라,

 

5:27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7:1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속에 있게 하셨고 -

 

여기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말은 아들에게는 없던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 "주어" 것은 시간적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영원한 시간을 말함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중보자로 세워 택한 백성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役事) 하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하신 "생명" 그들만이 독점하신 절대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생명 운동의 근원이다.

 

( 1:4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5:27]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

 

말씀에 대한 해석은 가지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인자(, 사람) 형상을 입도록 낮아지셨으니 만큼,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장으로 높이셨다는 ( 2:7-10).

 

(2) 칼빈(Calvin) 말씀을 윗절에 연락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인자(, 인성)되신 방면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시어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라고 한다.

 

(3) 구속 사업 전체를 인성(人性) 소유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것인 만큼, 구속의 일부분되는 심판도 그가 하신다는 . (Meyer).

 

(4) 심판은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는 의미의 행위인 것인 만큼, 사람들 측에서 일이며 그것을 실행할 이는 이상적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해야 된다는 . (Godet).

 

(5)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니 만큼 누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구주를 배척하므로 자정죄(自定罪)하는 뿐이다.

 

그들이 인간성으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넘어진다.

, 그들은, 성자 예수님께서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사실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그의 사랑을 구체화 것이었다.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실상 그것에게서 심판을 받음과 같다.

 

, 그것은 그들의 자정죄이다.

(Beyschlag, Neutest, Theol. 1,P.290).

 

(6) 헨드릭센(Hendriksen)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 귀절의 '인자' 말이 관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다만 인간 성품을 의미하고 메시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나, 우리는, 점에 있어서 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지나치게 일정한 구분을 필요는 없다. 어떤 때에는 직명(職名) 관사를 가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인자' 말이 보통으로는 메시야의 직명인데, 하필 여기 와서 인간 성품만을 의미하였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므로 귀절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심판의 권세를 받으셨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 크로솨이데(Grosheide)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여기'인자' 말은 인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부분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세우시고(26),

다시 그의 인간성을 내세우신다(27).

 

이렇게 그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어 심판의 권세를 받을 자격을 가지셨다.

그가 인간성을 가지신 자격으로써도 심판하실 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성에게 그런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더욱 윗절(26) 벌써 말한 것과 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심판하실 있다"라고 하였다.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P.375-376).

 

(8) 슐라텔(Schlatter)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 부분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생명의 창조자이시고(25), 인자(, 인간성)이신 그는 심판자이시다.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해설된다. 인자는, 속죄자(, 인간성으로 흘려 죽으신 )이시니 만큼, 죄악을 심판하실 권리도 받으심이 당연하다. 이유는, 죄는, 이와 같이 속죄하여 주신 그를 믿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은 주로 사단에게 대한 것이다(12:31, 16:11).

 

심판은 예수님이 인간성으로 죽으심에 의하여 성립시키셨다고 하였다.

 

(Das Hauptstuck des Gerichts ist das Gericht am Satan, 12:31, 16:11, und dieses bewirkt Jesus durch seinen Tod.- Der Evangelist Johannes, P.151).

 

위의 여덟가지 해석 우리는 첫째 해석을 택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섯째 해석을 취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이것은 별세하였던 신자들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

 

(3:19-21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 상습적으로 행한 ,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귀절이 말한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것이다.

 

이런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

 

( 24:15 저희의 기다리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20:12-13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있고 다른 책이 펴졌으니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과 음부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고 하며,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아니라, 슐라델(Schlatter) 다음과 같이 말한다.

 

,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로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 권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

(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우리는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 영생(또는 심판) 현재적 실시와 세상 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복음 저자의 사고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水平線的) 종말관(終末觀)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거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 "나의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현재에도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