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대통령의 길 네 가지
[김대중 칼럼]
김대중 고문
조선일보
입력 : 2016.11.08 03:17
측근 정치 관련자 예외 없이 자르고 야당 지도부와 소통하며 국민 상한 마음에 다가가길
그다음 선택은 국민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
현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갈 수 있는 길은 네 가지다. 하나는 책임총리 또는 거국 중립내각이라는 것을 세우고 내치(內治)에서 손 떼는 사실상 분권(分權) 형태로, 자신은 식물 대통령으로나마 살아남는 길이다. 그의 담화 내용으로 보건대 박 대통령이 바라는 바인 것 같다.
다른 하나는 탄핵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는 박 대통령이 결백을 주장하고 심판에 대항할 때 성립된다. 탄핵의 요건이 명확하지는 않아 싸울 여지가 있지만 탄핵이 가결되면 그는 '죄인'으로 쫓겨나는 셈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믿음을 바탕으로 나라의 중요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역사에 책임지는 자세를 취할 때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자리다. 박 대통령이 스스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됐는가?"라고 깊이 자괴하고 괴로워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 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은 본인에게는 오히려 편한 도피구일 수 있다. 국민으로서도 더 이상 이런 혼란 속에서 헤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치 현장은 그가 물러나는 것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네 번째 선택은 자신의 이제까지의 통치 관행을 완전히 바꾸는 환골탈태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이는 것이다. 초췌한 모습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네거티브 자세가 아니라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하되 강하고 의지 있는 자세로 남은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하는 것이다.정치에는 흐름이란 것이 있다. 세(勢)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논리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일종의 세 싸움이다. 바둑처럼 세에서 밀리면 한두 수 잘 둔다고 이길 수 없고, 한두 수 물린다고 패색(敗色)을 벗을 수 없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과 그 후원 세력, 넓게 봐서 보수·우파 세력은 세를 잃고 있다.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고,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날 줄 몰랐던 박 대통령과 그 세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증세를 보였다. 4·13 총선이 그 결과의 시작이었다. 세에서 밀리면 계속 악수를 두게 되고, 그것이 누적되면 민심은 떠나는 법이다.
산불이 났을 때 불의 확산을 막으려면 바람의 방향을 살펴 멀리 저 앞에 방화선을 긋고 그 선(線)을 정리하면서 눈앞의 불과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고 눈앞의 불하고만 싸우려고 하면 불을 잡을 수 없다. 그것은 기본이고 상식이다. 박 대통령의 대처 방식을 보면 후자에 급급한 듯하다. 그래서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고 제3, 제4의 사과를 해도 끝내는 그가 거기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을 곳까지 밀려서 실지(失地)하게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오늘날 여기까지 오게 된 근본 문제는 그가 주변의 조언자(助言者)들을 멀리하고 몇몇 비선·측근과만 내통해왔던 그간의 불통(不通) 고집에 있다. 지난 4년여 많은 사람이 수십, 수백 차례에 걸쳐 그의 불통을 지적하면서 그가 야당, 언론, 반대자들과도 소통할 것을 애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그야말로 오불관언이었고 독야청청해왔다. 그는 이번 사태 처리 과정에서도 여전히 불통의 실수를 범하고 있다. 사과의 방식과 내용, 신임 총리의 지명 등에서 박 대통령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 국민의 상한 마음에 다가가야 한다. 측근 정치와 관련된 모든 주변 공직자들을 전원 예외 없이 잘라야 한다. 대통령의 일상을 투명하게 보여야 한다. 야당 지도부와 직접 소통하고 국회에 가서 그들과 만났으면 한다. 야당 지도부와 회합을 정례화해야 한다. 원로들과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언론과 솔직하게 대담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헌정의 불상사인 현직 대통령 하야를 막고 국정을 이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에게는 죽어서 사는 길이다.
그다음의 선택은 국민에게 맡기는 것이다. 야당에 맡기라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이제 정국의 초점은 야권으로 넘어가게 돼 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권의 기회가 도래한 만큼 야권은 그 자리를 놓고 자기들끼리 속된말로 피 터지게 싸울 것이다. '최순실 정국'에서 보여준 야당의 꽃놀이패는 박 대통령 못지않게 실망스러웠다. 나라 꼴이 어찌 됐건 아랑곳없이 얼굴에 웃음을 애써 감추면서 박 대통령과 집권당을 향해 쏟아낸 막말들은 많은 국민에게 '박 대통령에게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저들에게 정권 맡겨도 괜찮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박 대통령 퇴진 요구가 역풍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 '제3지대'라는 새로운 정치 영역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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