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거듭난 삶 2017. 3. 23.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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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디아 안디옥 전도

 

: [ 13:13-23]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백성을 높여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사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 사백오십 년간)

20)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뜻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예수라.

 

 

[ 13:13]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 - 박수 엘루마의 사건 이후 누가는 여기서부터 바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유는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이 엘루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을 기독교인으로 회심시킴으로써 선교 사역에 있어서 지도자격으로 부상된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 - 구브로 섬을 떠나 바울 일행이 번째로 찾은 밤빌리아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소아시아의 남쯤 해안에 접한 지역이다. 해안의 길이가 120km이며 내륙 쪽으로 폭이 48km 정도의 지역은 동편에는 길리기아, 서쪽에는 루기아, 북쪽에는 비시디아가 인접해 있다.

 

그리고 버가는 밤빌리아의 중심 도시로 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13km정도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이곳을 들르게 된다.

 

(14: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이곳에서의 바울 일행의 선교 행적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마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듯하다.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 예루살렘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를 동행하여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그들을 도우며 따라왔던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마가 요한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누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이 떠난 이유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다음과 같이 추측이 다양하다.

 

(1) 사전에 구브로까지만 동행하기로 .

(2) 사촌 바나바를 따라왔다가 바울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바나바가 소외된 대한 불만(Alexander),

(3) 향수병,

(4) 용기 부족으로 여행을 포기함(Lenski),

(5) 바울이 풍토병에 걸려(고후12:7; 4:13, 14) 겁을 먹었음(Ramsay).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4:13-14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그러나 모두 설득력이 부족하다. 어쨌든 나중에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되는 점으로 보아 바울은 요한의 귀향으로 크게 실망하고 상심한 듯하다.

 

(15:37-39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타고 구브로로 가고).

 

 

 

[ 13:1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 이곳은 안디옥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되는 곳으로

 

(11:27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해발 100m 달하는 고원지대이다.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얄바크(Yalvach) 근처의 폐허 지역을 말하며 당시에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바울은 3 전도여행 때에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

 

(18: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 셀류쿠스 왕조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했으므로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이 있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구브로나 이곳에서도 바울 일행이 회당올 먼저 찾은 것은 이방 땅에서 동족에 대한 친밀감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방 선교 이전에 유대인에 대한 방문이 선행되었음을 있다.

 

 

 

[ 13: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 회당의 예배 순서 부분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율법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키며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를 말한다.

 

1세기경의 회당 예배는 쉐마( 6:4-9) 기도,

 

( 6:4-9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그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율법서와 예언서 낭독, 그리고 설교나 권면의 말씀과 축복의 순서로 진행되었던 같다.

 

성경이 회당에서 낭독되었던 전통은 바벧론 포로기 이후에 시작되었으며 B.C. 163년부터는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율법서 낭독을 금지하여 예언서만 낭독되었으나 마카비 혁명 때에 다시 율법서가 낭독되었다.

 

회당에서 성경은 히브리어로 낭독된 다음 다시 아람어나 코이네 헬라어로 통역되었다(Robertson).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 예배순서상 권면의 말씀을 차례가 되었는데 회당장은 바울에게 사람을 보내어 설교할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당시 예배 중에 설교 또는 권면의 말씀을 담당할 대상을 회당장이 자유롭게 선정할 있었다.

 

따라서 랍비나 방문자에게 설교를 요청할 있었다. 그러나 회당장은 예배 전에 설교자를 선정해야지 예배 도중에는 없었다(Haenchen, Robertson).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로 회당장이 예배 도중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게 되는데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일행이 예배 시작과 더불어 회당에 들어왔기 때문에 미리 설교를 부탁할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있다. 이를 통해서 회당장은 바울 일행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듣고, 그들에 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있다.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 바울에게 설교를 요청하는 본문의 어투는 '만일'(에이)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조건적 제안으로서 상대방에게 공손하게 요청하는 말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최대한 살려 " 분께서 격려할 말씀이 있거든 회중에 말씀 해주셨으며 좋겠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 13: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 회당장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곧바로 일어나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본래 회당 안에서의 설교는 관습적으로 앉아서 하는데

 

( 4:20 책을 덮어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주목하여 보더라)

 

바울은 일어서서 손짓까지 하면서 설교를 한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열정적인 웅변가로 보여지게 된다. 아마 누가는 바울을 헬라적인 연설가로 묘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Haenchen).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설교는 유대 회당의 전통과는 다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 여기서부터 바울의 설교가 시작된다. 서두에서 누가는 설교를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생에 의한 유대인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10:2 '경건한 사람' 같은 의미로서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을 가리킨다.(Haenchen, Bruce, Neil).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스라엘 사람에 포함된다.

 

 

 

[ 13:17]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백성을 높여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 여기서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요약으로 신앙 고백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7장에서 소개된 스데반의 설교와 형식이 비슷하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스데반보다는 간략하다.

 

바울이 이스라엘을 구원시킨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방인 청중을 의식하여 언급한 듯하다(Lenski).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출애굽의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있다.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백성을 높여 - 본절에서 '조상들' ' 백성'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시문학에서는 병행 대구법(parallelism) 사용해서 구절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명확하게 하곤 했다. 만일 절이 그러한 형식을 취했다면 용어는 같은 의미가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용어가 다른 의미로 쓰여 역사적인 흐름을 차례로 설명하고 있다면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을 칭하는 의미이며

'족장들' 번역되어야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 내용과 절의 바울 설교를 비교해 '족장들' 해석하는 편이 무난하다.

 

권능으로 - 에굽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현인 ' 권능' 70인역(LXX)역에서 영향받은 어투로(Robertson)

 

6:1, 6; 5:15; 136:12 내용을 연상시킨다.

 

(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땅에서 쫓아 내리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팔과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136: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18] 광야에서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저희 소행을 참으시고 - 구절은 광야 40년간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참으시고' 번역된 혤라어 본문은 사본에 따라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 동안 하나님께 많은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참으신 사실을 부각시켜 준다.

 

(2) 이는 '돌보다' 의미로 1:31 70인역(LXX) 따른 것이다.

 

(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몇몇 학자들이 해석을 지지하지만 (Holtzmann, Zahn, Bruce)

 

어떤 학자들은 가지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Haenchen, Marshall, 아사노 중이찌).

 

사본상으로 '참으시고' 많은 지지를 얻고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돌보시고' 어울리기에 어느 하나를 강조하지 않는 같다.

그러나 1:31 히브리어 본문은 70인역의 '돌보시다' 의미보다 '참으시다' 의미에 가깝다.

 

 

 

[ 13:19]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사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 사백오십 년간)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사 -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정착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약한 본문은 7:1 연관이 있다.

 

( 7:1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앞에서 여러 민족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7:1에서 일곱 족속이 ,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언급되어 있다.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 '기업으로 주다' '몫을 따라 분배하다' 의미로 유산 상속과도 관계가 있다. 절에서 동사는 지파가 받을 분깃에 따라 가나안 땅을 분배받은 것에 대해 적용되었다.

 

사백 오십 년간 - 여기서 450년이라는 기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계산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모호하다. 특히 사본에 따라 구절의 위치가 다르다.

 

(1) 개역성경처럼 20절에 언급되는 ' ' 표현 앞에 본구절을 둔다(*,A,B,C). 경우 450년은 사사 시대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2) 20절의 ' ' 다음에 450년을 애굽에서 탈출한 광야생활부터 사사 시대까지 포함하여 450년이 된다.

 

첫번째 견해를 취할 경우 애굽에서 400, 광야에서 40, 가나안 정복 기간 10년을 합친 450년을 뜻한다.

(Bauernfeind, Lenski, Bruce, Knowling, Weiss, 아사노 중이찌).

 

그러나 실제로 광야 40년과 사사 시대는 사무엘 이전까지 370 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사로 앉으면서 활동한 기간이 다윗왕까지 이어지는 70 년간으로 계산할 경우 450여년이 된다.

 

그런데 본문에서 450 년은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정착하여 왕을 세우기까지의 기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므로 (2) 따르는 편이 무난하다.

 

 

 

[ 13:20]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후에 - 앞절이 가나안 정복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므로 ' ' 가나안 정복 이후 사사 시대를 뜻한다.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후 이스라엘을 이끌어 갔던 지도자들을 요약하여 언급하고 있다. 가나안 정복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기간은 가나안 정복 전쟁(B.C. 1405)에서부터 사무엘이 그의 사역을 마치기까지(B.C. 1017) 400 년이다.

 

 

 

[ 13:21]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 사사 시대가 끌나고 왕정 국가 시대가 언급되고 있다. 왕정 국가의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서 사무엘이 너무 늙었다는 이유와 함께 다른 열방들의 왕권 통치에 대한 부러움에서 시작되었다.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사실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거부하는 것이며 신정 시대(神政時代) 폐지시키는 것이라고 있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은 들어주셨으나 13:11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분노하여 왕권을 허락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 13: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왕권에 대한 요구는 부당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사울의 통치는 40년간(B.C. 1050-1010) 계속 되었는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함과 동시에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음으로써 그의 통치는 끝나게 된다.

 

(삼상 31:1-6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 사울이 패전하매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4) 그가 병기 자에게 이르되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위에 엎드러지매

5) 병기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아들과 병기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날에 함께 죽었더라).

 

구절에서 언급되는 사울의 통치 기간 40년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되지 않으므로 다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추측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Lenski).

 

 

 

[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뜻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 바울은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등극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울왕을 '폐하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표현( 13:11)임을 보여준다.

 

( 13:11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는 왕정국가가 성립되었어도 하나님 개입이 계속 되었음을 말해 준다. 아마도 바울은 18절의 표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참고 보살피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려는 듯하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 삼상 13:14 89:20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정(王政) 인정한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삼상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89:20 내가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왕가(王家) 정통성을 신적인 권위로 세우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있다.

 

특히 '마음에 합한'이라는 표현은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구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인물임을 부각시킨다.

 

뜻을 이루게 하리라 - 다윗에게 거는 하나님의 기대는 23절에서 언급되는 메시야 탄생의 씨앗이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결국 다윗 선택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 속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구속사를 이스라엘 백성이 대망하던 메시야에게로 초점을 맞추어 진행시키고 있다.

 

 

 

[ 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예수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은 삼하 7:12에서 있다.

 

(삼하 7:12 수한이 차서 조상들과 함께 때에 내가 몸에서 자식을 뒤에 세워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약속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언약을 맺는 형식을( 15:1-21) 취하지 않고

 

( 15:1-21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몸에서 자가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있나 보라 그에게 이르시되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 아브람이 모든 것을 취하여 중간을 쪼개고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동안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후에 자손이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주어졌다.

 

그렇지만 언약 맺음에 있어서 수반되는 축복과 저주, 충성과 복종의 조항이 언급되므로 삼하 7장을 '다윗 언약의 '이라 부른다. 아무튼 바울은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사를 설명하면서 다윗 언약을 상기시켜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통을 이어받았음을 증명하였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예수라 - 말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런데 구절은 약간의 오해가 발생될 있다. 절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예수를 이해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소명자로서의 바울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고 있다.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는 다윗 왕국을 강건하게 복원시키는 정치적 인물임을 믿었다.

 

(삼하 7:12-16 수한이 차서 조상들과 함께 때에 내가 몸에서 자식을 뒤에 세워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아비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은총을 빼앗은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집과 나라가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에 대해 다양한 예언이 있다.

 

수난의 ''

 

( 42:1-7 내가 붙드는 나의 ,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교훈을 앙망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소산을 베푸시며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49:1-7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2) 입을 날카로운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전통에 감추시고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7)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 관원들에게 종이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신실한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50:4-9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7)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누구뇨 그들은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52:13-1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이왕에는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15)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또는 '인자'

 

( 7:13 내가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앞에 인도되매),

 

''으로서의 메시야와 '대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 4:11-14) 등이 나타난다.

 

( 4:11-14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기름을 흘려내는 금관 옆에 있는 감람나무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둘이니 세상의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이처럼 구약성경은 메시야에게 다양한 () 복합적으로 존재함을 말해주고 있으나 유대인들은 굳이 일부분만을 취하여 메시야를 정치적인 이스라엘에 국한된 메시야로 한정시켜 생각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말한 것은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메시야 사상을 말하기보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예언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약속된 구주임을 권위있게 증언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절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구주로 국한시키는 말로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