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거듭난 삶 2017. 5. 1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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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회심에 대한 간증

[유대인에게 변증하는 바울]

 

: [ 22:6-21]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11) 나는 빛의 광채를 인하여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13) 내게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4) 그가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의인을 보게 하시고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6) 이제는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회당에서 때리고

20)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저희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묘사된다. 9:3 거의 비슷한 묘사가 전개되고 있는데,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때의 시각이 오정쯤 되었다는 것과 홀연히 바울을 둘러 비추인 하늘의 빛이 매우 강렬했다는 사실은 여기에만 나타나는 상세한 묘사이다.

 

빛은 정오의 태양 광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렬했기 때문에 바울은 사흘 동안 눈이 상태로 지내야 했다.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그런데 빛은 바울에게만 집중적으로 비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함께 있던 사람들은 이상이 없었으나 바울만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11 나는 빛의 광채를 인하여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땅에 엎드러져 - 본절은 9:4 거의 동일한 표현이다. 공동 번역에서는 '땅에 거꾸러져' 옮겨졌는데, 이것은 바울에게 비추인 하늘의 빛이 단순히 밝기만 것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어 그를 무력화시켰음을 시사한다.

 

사울아 사울아 -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사울의 헬라식 이름이다.

 

 

 

[ 22: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 - 본문 역시 9:5 동일한 표현이다. 다만 여기서는 예수라는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첨가되어 있다.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바로 나사렛 출신의 예수임을 말한다.

 

여기서는 사울이 핍박했던 그리스도인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동일시(同一視)되고 있다. 이는 주님께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일찍이 주님께서 성도들과 항상 함께 있었다고 약속하셨던 바의 성취이다.

 

(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22: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 9:17에서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술 사이에는 표현상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사실 일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는 경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주위 사람들은 빛을 보기는 하였으되 그것을 영광스러운 예수의 계시로 보지 못했으며, 또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구체적인 의미는 알아들을 없었던 것이다. 오직 바울만이 순간에 있었던 사건의 경험자이자 완전한 참여자였다.

 

바울은 순간 하늘에서 들려오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고 그리하여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고 앞으로도 하려고 했던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했다.

 

결국 바울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22: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 9:6에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만이 주어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바울의 질문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회심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질문에는 바울이 자신의 행한 일들과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오순절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마음에 가책을 받은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뉘우친 사실과 유사하다(2:37).

 

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데 이는 진정한 회개 또는 회심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 이는 바울의 회심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삶을 감찰(鑑察)하고 있었으며 이제 결정적인 때가 되자 그를 부르신 것이다. 바울에게는 해야 할일이 정해져 있었고 일을 그에게 이를 자도 마련되어 있었다.

 

 

 

[ 22:11] 나는 빛의 광채를 인하여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빛의 광채를 인하여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 바울에게 집중적으로 내려쪼인 강렬한 빛은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 이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쬐인 팔레스틴의 강한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한 햇빛을 쳐다보았다 해도 또는 안에 정상 시력을 회복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그마치 사흘 동안이나 장님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그것도 아나니아의 안수 때문에 있게 것이다.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바울의 회심 체험은 아무런 근거 없는 단순한 환상이나 심리적 착각이 아니었다. 본문에서 실제로 그가 눈이 멀게 사실이 여러 증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한편 " 없게 되었으므로" 바울의 눈먼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시사한다.

 

 

 

[ 22:12]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

 

9:10 의하면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 소개되고 환상 중에 바울을 찾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는 것으로 되어있다.

 

(9:10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경건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의 정통신앙을 지키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어서 아나니아가 진정으로 경건한 자였음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유대인이 그를 칭찬했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바울이 이처럼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아도 흠없고 온전한 신앙을 지닌 아나니아와 자신의 회심의 과정을 강조하여 관련시키는 것은 자신의 회심이 경건한 유대인조차 인정하였던 것이니 만큼 결코 유대인들에게 이해될 없는 것이 아님을 변증하려는 의도에 기인한다.

 

 

 

[ 22:13] 내게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

 

바울이 다시 눈을 보게 과정이 9:17, 18 비해 매우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본문의 상황은 시간과 분위기가 매우 촉박하였으므로 중요한 부분만 자세히 설명할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보라' 명령은 '다시 시력을 회복하라'이다.

 

'즉시'라는 말은 아나니아의 명령과 바울의 시력 회복 사이의 동시성(同時性) 강조해 준다.

 

" 쳐다보았노라" 말은 '나는 시력을 회복하여 그를 쳐다보았다'(I received my sight and saw him, RSV) 의미이다.

 

바울이 다시 눈을 것은 그의 거듭남을 의미하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됨을 뜻한다.

 

 

 

[ 22:14] 그가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의인을 보게 하시고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 바울은 자신의 회심과 소명을 청중들에게 설명함에 있어서 가능하면 그들을 흥분시키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용어 선정을 매우 세심하고 신중하게 하고 있다.

 

처음 그는 의도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2 저희가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21: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자신이 온전한 유대인이자 율법을 아는 자임을 말했으며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아나니아를 설명할 때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 역시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지금 바울 앞에 유대인들이 열심을 다해 섬기노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의인을 보게 하시고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 '택하여'에는 '미리 손으로 잡다' 뜻으로 바울의 소명이 전적인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바울을 택하여 그에게 가지를 행하셨다.

 

첫째는 '당신 '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신앙을 갖게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였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해를 수정해야 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받들어야 했다.

 

둘째는 '의인' 부활하신 예수를 보게 하셨다.

 

' 의인' 메시야에 대한 별칭으로 유대인들이 죄인으로 여겨 십자가에 박아 죽인 예수가 사실은 의인이고 메시야 이셨음을 말해준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인으로서의 확실한 신앙을 갖게 만든 체험인 동시에 그의 사도직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고전 9:1;15:8)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셋째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하셨다.

 

(7-8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가지는 사도 바울에게뿐만 아니라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필히 기억되어야 사항이다.

 

 

 

[ 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고 그의 음성을 듣게 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지니는 증거의 포괄성과 이방인에 대한 그의 선교사명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Lenski), 9: 15 26:17 비추어 견해는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바울이 증거해야 했던 내용은 '보고 들은 '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상이나 개인의 신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바를 충실히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알고 있었고 충실히 이행했다.

 

(4: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없다 하니).

 

[ 22:16] 이제는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주저하느뇨 - 말씀은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 망설이는 바울을 책망하는 뜻이라기보다는 어서 속히 은혜에 참여하라는 초대의 말씀으로 이해됨이 적절하다.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 2:38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주의 이름과 침례와 씻음이 연결되어 언급된다.

 

이것은 침례 의식이 씻음과 밀접히 연관되어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침례 자체가 씻음이라는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행해질 비로소 씻음의 효력이 있는 것이다.

 

 

 

[ 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 때를 바울이 회심한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3년간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다음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를 의미한다.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17-19 나보다 먼저 사도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 여기서는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장소가 성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므로 그곳에서 바울이 계시를 받았다면 어느 누구도 계시의 진정성(眞正性) 대해 함부로 시비를 없기 때문이다.

 

 

 

[ 22: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 바울에게 내려진 계시는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9:29 의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과의 견해 차이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음을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증거를 듣지 않은 극단적인 예일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나가는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 땅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22: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회당에서 때리고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회당에서 때리고 - 회심을 체험한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일이 하나님을 훼방한 자들을 징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일들(8:3) 숨기려 하지 않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에서 그의 진정한 거듭남을 있다.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 22:20]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저희도 아나이다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 바울이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7:57-60 저희가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예수여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말을 하고 자니라).

 

바울은 자신이 직접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지는 않았지만 그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였고 그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자들의 옷을 지켰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이 직접 죽이는 이상의 책임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바울은 스데반을 재평가(再評價)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 '주의 증인'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증인' 2:13;17:6에서 처럼 '순교자'(martyr) 의미를 갖는다.

 

( 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이름을 굳게 잡아서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7:6 내가 보매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한편 바울이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과거에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일을 다시 회상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어떤 학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아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Bruce, Lenski).

 

그러나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할 감히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과분한 일임을 고백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 22:21] 나더러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 바울의 이야기가 어떤 의도에서 나온 것이든

 

(19-20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회당에서 때리고

20)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저희도 아나이다),

 

주님은 재차 그에게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이 이방인에 대한 전도의 사역을 맡기기 위한 것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는 명령이,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가 그의 소명임을 확인받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