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거듭난 삶 2017. 7. 2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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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

마태복음 10 16-23 :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때에 너희에게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너희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참조 : (마가복음 13 9-13, 누가복음 21 12-19)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니는 같다.

그러므로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유순하라.

 

실로 특이한 말씀이다.

양과 이리, 뱀과 비둘기, 동물로서 나타낸 가지의 대조이다.

 

천연은 최량의 표호적문자이다.

양이라 하고, 이리라 하여, 깊은 의미가 표시되어 있다.

사람은 이리, 신자 특히 전도사는 ,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뱀처럼,

어떤 다른 경우에는 비둘기처럼 행하라는 교훈이다.

 

사람은 이리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세상에는 소수나마라도, 참된 선인이 있는 아닌가?

불신자 사회를 믿어(한마디로) 이리라고 칭하는 것은 혹평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옳다, 사람은 보통의 경우에는 이리근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자기가 강자이고, 약자에 대하는 때에는 자비양선의 성을 구유한 같이 보인다.

하지만 일조 자기의 이익을 침해 받을 것인가,

특히 죄를 지적 받는 때는, 이리로 화하여,

악마성을 발휘한다.

 

자애 많은 부모도, 자녀가 그리스도를 믿기에 이르는 때에

이것을 궁박하는 상태는, 이리가 양을 괴롭히는 상태나 다름없다.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이에 임하는 때에 판명된다.

 

악을 행하는 자는 빛을 미워하고,

행실을 추궁 받지 않기 위해 빛에 오지 않는다(요한복음 3:20)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이다.

 

사람에게는 나면서부터 누구에게나 이리 근성이 있다.

성이 복음에 접하여 특히 현저히 발휘하는 것이다. 이르기를

 

그리스도교 이외에 박해 없다.

 

정죄되는 까닭은 이것이다.

, 세상에 왔는데 사람, 행위가 악함으로 빛을 사랑치 않고,

도리어 어두움을 사랑했다( 3:19) 있음 같다.

 

자기가 죄로 정해지는 때에, 사람은 노하여,

이리가 양을 괴롭히듯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박해이다.

 

생래의 사람은 이리인데 대하여, 재생의 은혜를 입은 신자는 양이다.

그는 악마성을 제거 받음과 동시에,

방위공격의 무기가 모두 징발(requisition)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강건해지지 위해 자기는 약화된 것이다.

 

동물 중에 양만큼 약한 것이 없듯이, 사람 중에 크리스천만큼 약한 자는 없는 것이다.

그는 매를 맞아도 두들김을 당해도, 저항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기력 하다면 무기력하달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오히려 기쁨으로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린도후서 12:9) 바울이 말한 대로이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기뻐하는 일로서 신자를 괴롭히는 같은 것은 없다.

여기서 성인을 꾸미는 약한 자가 있는 것이다.

그를 어떻게 취급하거나 자유임의 이다.

그가 만약 반항하고 또는 항의하면, 사람의 결핍(부족) 가지고서 도리어 그를 책한다.

 

신자는 불신자에 대하여 모두 책임지는 바가 있고,

불신자는 신자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잔인흑박의 극은, 세인들이 예수의 제자를 취급하는 길이었다.

일은 로마의 옛적에 한하지 않는다.

일본의 오늘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사람의 이리 근성을 충분히 맛보자 하면,

자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참된 종자로 되지 않으면 된다.

 

이것을 일컬어 그리스도에 정해진 환난이라 한다.

 

특수한 환난이다.

사람이 참으로 크리스천이 되는 ,

세상은 그에 대하여 이리로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신앙상의 사실을 잊어서는 된다.

 

그러므로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온순하여야만 한다.

 

사도는 (음흉 냉혹)이라고 하는데,

크리스천도 또한 뱀의 길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

그의 궤계를 모르지 않는다(고후2:11) 했는데,

 

우리에게도 또한 지혜가 없어서는 된다.

크리스천으로서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아주 쓰라린 일이나,

그러나 사탄은 사탄인 것으로서,

그를 천사로 잘못 알아, 그를 이롭게 하고, 나는 그의 멸하는 바로 된다.

 

신자에게 악의가 있어서는 된다.

그것과 동시에 그에게 사탄의 궤계를 간파(see through)하는 지혜가 없어서는 된다.

 

사랑하면서 놀래는 없이, 미혹되는 없는 길을 취하지 않으면 된다.

실로 어려운 길이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 것으로서 영광에 이르는 길이다.

 

비둘기 같이 유순하라구일본어역에는 온순하라 되어 있다.

 

원어는 무해하라는 뜻이다. 문자에 의해 의미를 정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전후의 관계에서 보아, 예수 자신의 생애에서 보아,

 

악에 대항하지 말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리라고 생각한다.

 

비둘기 같이 유순하라.

 

23절에 말한다.

 

도시에서 사람이 너희를 핍박하면, 다른 도시로 피하라 태도이다.

 

예수 자신이 피할 있는데까지 피하고, 마침내 자신을 적의 손에 내주셨다.

세상 사람의 입장에서 , 가장 무기력한 태도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로 () 용자(勇者) 아니고서는 취할 없는 태도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사람은 땅을 상속받을 있기 때문이다라고 있다.

 

너희가(도피하여),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니기 전에 인자가 것이다라고 있다.

 

승리는 하나님에 의해 온다.

신앙의 용기 있어서 우리들은 능히 사탄과 종자에게 이길 수가 있다.

 

신자는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싸우지만,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는다.

 

교회의 그리스도교가 1900년의 역사를 가지면서

지금도 세상에 이기지 못하는 것은,

전도의 방법으로서 예수가 여기에 보여 주신 길에 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촌감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