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거듭난 삶 2017. 7. 2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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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0 24-33 : 제자가 선생보다, 또는 종이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마리가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두려워하는 것은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다.

공포는 의지 건전의 증거이다.

광인에게 공포는 없다.

공포는 악에 대한 천연의 경고이다.

죽음의 공포 있어서 죽음을 피하려 하고,

악의 공포에 있어서 악을 피하려 한다.

참된 용자에게 커다란 공포가 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1 117역주) 싸움터에 있어서의 전율은 유명하다.

 

예수의 겟세마네의 동산에 있어서의 공포는 우리들이 아는 바이다.

 

마음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만약 있으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라고.

 

사람은 말한다. 예수는 죽음을 두려워한 겁쟁이었다고.

아니다. 겁쟁이가 아니다.

참된 사람이다.

공포 있고, 이에 이길 있어서 참된 용자인 것이 나타난 것이다.

 

크롬웰(5 59역주), 워싱턴(3 293), 모두가 그러했다.

죽음을 유희처럼 생각한 자의 속에 참된 용자가 있을 리는 없다.

 

두려워할 이유 없음을 알아 두려워하지 않기에 이르러,

용자의 용자임이 판명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에 많은 공포가 따른다.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단지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함의 공포 뿐만은 아니다.

나는 뜻을 거슬리는 것이 아닌가의 위구(危懼)에서 일어나는 공포이다.

세상은 옳고 혼자 잘못하는 것이 아닌가의 걱정이다.

하나님은 나를 노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다.

이것은 모두 공포의 원인(근본)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공포를 가지게 되려는 경우에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교훈을 주신 것이다.

 

사람은 크리스천이 됨으로서 양심이 일층 예민해지고,

결과로 무슨 일에도 두려워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듣기가 쉽다.

혹은 재해가 몸에 임하는 때에, 이것을 하나님의 형벌로서 잘못 이해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위구불안을 떨어버리기 위해,

예수는 여기서 가지의 두려워 말라 분부를 하셨던 것이다.

 

1 사람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타이르시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정의와 인애를 추구하는 자이매,

사람에게 칭양됨이 당연할 것으로 생각되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세상이 싫어하는 것으로서 실은 크리스천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인생 실은 이에 지나는 불가사이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을 바알세블 악마의 두목으로 부른 것이다.

 

단지 광인이라든가, 위험인물이라든가, 평화의 교란자라든가, 칭한 것은 아니다.

악인, 더구나 악마, 악마의 두목이라 부른 것이다.

예수 자신이 일에는 놀라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다.

빛을 불러 어두움이라 한다.

그것이 지인의 죄인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비방(중상) 된다고 하여 크리스천은 두려워해서는 된다.

일에 대해서는 사람의 소리는 결코 하나님의 소리(음성) 아니다.

실로 반대가 진리이다.

사람의 소리는 악마의 소리이다.

 

가령 사회의 세론이라 해도, 국민의 소리라 해도,

그리스도와 제자를 국적(國賊) 또는 불효의 자식이라고 부르는 소리는

악마의 소리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수는 타이르신 이다.

 

그렇게 헐뜯긴 신자는 주께서 헐뜯기신 대로 헐뜯긴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못된다.

도리어 감사해야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특히 주의해야 것은,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는 없고, 숨겨져 알려지지 않는 없다 속담에 보이는 진리이다.

 

세상은 오명을 붙여 씌워 빛을 덮어버리려 해도,

빛은 마침내 빛으로서 나타나지 않을 없다.

세상에 있어서 대개 그러하다.

내세에 있어서는 확연히 그러한 것이다.

 

야소(예수에 대한 비방) 국가의 적이다. 부모 불효이다라는 비방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마저, 이미 거의 소멸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마저, 아주 많은 비방을 받았다.

그런데 이제 관에 들어가기 전에, 대부분은 이미 소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와 제자에 관한 세상의 비평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교회,

그것이 세상의 눈을 가지고서

신자 서로를 보며, 커다란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분부이시다.

 

몸을 죽여도 영혼을 죽일 없는 자는 두려워할 못된다.

두려워할 것은 영혼과 몸을 지옥에 멸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시라 하고,

어떤 다른 사람은 악마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 해도 두려워할 것은 이것이다.

몸과 함께 영혼을 멸하는 것이다.

 

불의, 이욕, 겁나(timidness), 이는 모두 영혼을 멸하는 것이다.

아사(餓死) 두려워할 못된다.

두려워할 것은 아사를 두려워하여,

말할 것을 못하고, 일을 하지 않는 일이다.

 

금회의 대미문제 같은 것도, 정신으로서 당면하지 않으면 된다.

 

박사 알렉산더?브루-(8 428브루-스역주),

 

이것은 안일을 바라는 악마이다라는 해석을 내리고 있는데,

 

이때 특히 주의를 요하는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3, 불시의 재난에 조우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분부이시다.

재난은 누구에게도 있다.

하지만 재난 그것은 천벌은 아니다.

악인에게 임하면 천벌이다.

선인에게 임하면 은혜이다.

 

특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신자에게 있어서,

무의미하게 재해가 임할 이유는 없다.

 

마리의 참새는 일전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의 아버지의 허락 없이,

마리라도 땅에 떨어지는 없다.

너희의 머리털도 모두 세신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나으니라.

 

실로 깊은 아름다운 (우아한) 분부이시다.

 

*내촌감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