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거듭난 삶 2019. 4. 2.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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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있는 믿음

 

: [ 14:22-23]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구절은 일반적인 것으로 강한 자와 연약한 모두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Robertson, Cranfield)

십중팔구 주로 강한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Murray, Harrison, Calvin).

 

왜냐하면 자기의 확신에 따라 은밀히 행동할 것을 경고받은 자는

다름아닌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20-21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여기서 '네게 있는 믿음을'( 피스틴 에케이스)이란 구절은

단순한 질술 이상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로서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

질문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Godet, Meyer, Calvin)

 

또는 '피스틴'('믿음') 뒤에 있는 관계대명사 ''(which) 살려서

'너는 네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로 있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이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된 ''('', '당신', 여기서는 강한 자를 말함) 가진 믿음으로서

구체적으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Calvin, Murray, Cranfield).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카타 세아우톤 에케 에노피온) 말은

네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간직하고 있으라' 말로서

'에코'('가지다', '붙잡다', '소유하다') 현재 명령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의 확신과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외적으로 함부로 표현해서는 된다는 말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隱密) 일로서 자신의

내적 삶에서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자유권이 공공연하게 행사된다면

이는 연약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이러한 자유권의 행사는

가능한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Harrison).

 

믿음의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믿음의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구절은 자신이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복되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경우 양심이 무딘 그리스도인들도 복되다는 진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Cranfield).

 

선언은 내용과 계속되는 것으로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선언이다(Murray).

 

, 강한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계속 언급한 진리에 주의를 기울여,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20-21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내적 자유의 외적 표현을 삼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며(17)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는 행위가(19) 참으로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이 있도다'(마카리오스) 미래의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특히 평화로운 양심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Calvin, Murray, Godet).

 

왜냐하면 그는 전혀 의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분열이 없으며,

더욱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을 ()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 조건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여야 한다.

 

여기서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가리키는 헬라어는 '도키마제이'

자신을 '시험하다', '검토하다', '분석하다'(도키마조) 현재 능동형이다.

 

그리고 '책하다'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크리논' 역시

'정죄하다', '심판하다'(크리노) 현재 능동형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행위를 스스로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의 신앙 양심에 가책(呵責) 없다면,

자기가 확신하여 행동한 바에 대하여 전혀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다(Calvin, Godet).

 

 

 

[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구절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으로서

앞절(22) 묘사된 강한 그리스도인과 대조를 이룬다(Murray).

 

강한 형제가 가진 특별한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따라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심정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정죄(定罪)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심하고'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 '주저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아크리노' 복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진리의 말씀에 의한 확신이 없어 갈팡질팡하면서 갈등하는 상태를 말한다(Calvin).

 

그리고 '정죄 되었나니'(카타케크리타이)라는 말은

'심판하다', '정죄하다' 뜻을 가진 '카타크리노' 완료 수동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되었다' 말은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하나님의 미래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자로서 이미 정죄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Harrison).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 구절은 앞의 내용이 그런가를 명확히 제시한다.

 

의심하고 먹는 자가 정죄된 이유는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목에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있다.

 

( 2:11-1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그는 확실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항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한 것이

필연적으로 정죄받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 의미는 본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와 같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이는 본장의 결론적인 선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있다.

 

(1)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한다(Godet).

(2) 선한 양심같은 무엇을 뜻한다(Sanday and Headlam).

(3)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이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도록 그와 관련된 내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확신, 말씀의 원리에서 깨달은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Cavlin, Murray).

 

위의 견해 번째가 가장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믿음(1, 2, 22, 23) 어울리는 유일한 해석이 (3)이기 때문이다.

 

(1-2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22-23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아울러 (3) 견해는 실제적으로 부분적인 면에서

(1) (2)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Robertson).

 

그리고 '죄니라'(하마르티아 에스틴) 말에서 '' 가리키는 '하마르티아'

통상적인 용법과 다른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마르티아' 본래적 의미로서 일반적,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을 뜻했다기보다는

개개의 죄악된 행위들을 염두에 말로서

믿음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내적 확신을 따라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떤 일일지라도 죄가 됨을 의미한다(Cranfield).

 

이렇게 하여 바울은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의 차원을 넘어

성도의 모든 생활의 근본 원리를 선언함으로써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한 본장의 권면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