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거듭난 삶 2019. 3. 3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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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 14:15-16] 만일 식물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가르'('왜냐하면')

바로 앞절(14) 연결된 접속사가 아니라 13 하반절과의 연결 접속사이다.

14절은 삽입절이다(Meyer, Liddon, Hendriksen).

 

'연약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것을 결심하라(13)

왜냐하면(가르) 만일 그것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15).'

이렇게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강한 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수락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동시에 그러한 태도에는 잊지 말아야 중용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근심하게 되면' 헬라어 '뤼페이타이'

'뤼페오'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수동형으로서

'어떤 일의 영향을 받아서 양심의 괴로움을 겪는 ' 말한다.

 

또는 '어떤 일로 인하여 신앙의 압박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고민에 쌓인 ' 뜻한다.

 

요컨대 상처받은 양심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Meyer, Godet, Hendriksen).

 

( 14: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17:23 죽임을 당하고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10:22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믿음이 약한 자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 때문에

아직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떤 일을 행하게 된다면

믿음이 약한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의 신앙의 순결성과 성장에 손상을 입을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문제가 제기된다.

 

바울은 자유의 구가(謳歌) 보다 중요한 형제 사랑에 의해

절제되어야 것을 호소하면서 성도의 생활과 행동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 의식적인 율법과 관련한 자신의 내적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강요함으로써 아직 깨달음과 행위가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형제를 근심케하고 영적으로 파멸(破滅)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짓밟는 행위임을 말한다.

 

루터(Luther)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어떤 것이 정당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형제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당신은 잔인한 살인자와 같다.

뿐만 아니라 형제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온갖 종류의 잔인성을 능가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한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도 죽었기 때문이다

 

(고전 8:11 그러면 지식으로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염두에 것이다.

 

(1) 형제의 소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한 형제임을 생각할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 하더라도 사랑으로 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도 남는 것을 교훈한다.

 

(2)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자유의 구가보다도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희생(犧牲)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내와 희생이 거절되어 자기의 판단대로만 행하므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근심케 되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책임을

면할 없는 죄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 짓밟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모울(Moule) 상황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주께서는 너의 상처받는 형제를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너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의 행동은 너의 강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상처받은 형제에게

파멸을 가져오게 것으로 간주되어 책임을 면할 없을 것이다.

너의 우둔하고 편협하며 이기적인 자유로 인하여 네가 경시한 상처받은 영혼을

주님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너무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망케 하다'( 아폴뤼에) 말은 대체적으로 가지로 해석된다.

 

(1) 영혼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Tholuck).

(2)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실족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Murray).

(3) 철저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Meyer).

(4) 인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Kasemann).

 

여기서 우리는 (1), (2) 견해를 취함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바울이 연약한 앞에 '부딪힐 '이나 '거칠 '으로 형제 앞에 두지 것을 촉구한 (13)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연약한 자가 계속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자리에 있다면

결국 멸망에 빠지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3) 견해도 타당하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형제를 넘어뜨리는 일의 위험성과 이로 인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강한 자들에게 하는 있다.

 

자유에 대한 자기 본위의 주장은 연약한 자들을 무너뜨리는

예측할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냉엄하게 책망한 것이다.

 

 

 

[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구절은 적어도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1) 구절은 강한 자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강한 자와 약한 모두에게 주어진 것인가?

 

(2) '휘몬 아가돈'('너희의 선한 ')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3) 사도가 언급한 비방을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가지 견해가 있다.

 

'너희의'(휘몬)

() 강한 자들만을 가리킨다(Murray).

() 강한 자와 약한 모두를 가리킨다(Dunn, Sanday and Headlam).

 

() 견해가 더욱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도는 바로 앞절에서 강한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을 근심시키거나 망케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절 역시 앞절의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어울린다고 있다.

 

(2)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 '너희의 선한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언약적인 모든 축복을 총괄하는 선이다.

의와 구원까지 포함한다(Dunn, Michel, Nababan, Cranfield, Schlier).

 

() 강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 특별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말한다(Murray, Calvin, Harrison, Kasemann, Godet, Sanday and Headlam).

 

() 하나님의 왕국(Meyer).

() 믿음(Do Wette).

() 복음(Philip).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 전부와 복음(Lenski).

 

위의 견해들 ()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번째 문제에서 구절이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지지했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 역시 강한 자들이 행사하는 '신앙의 자유'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나 () 지지하는 자들은

구절이 훨씬 심각한 가지 위험에 대해 강한 자들이 자유 행사를

이기적으로 고집함으로써 자유보다 훨씬 존귀한

'아가돈'('') 대해 () 초래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가돈'

강한 자들의 '아가돈'임과 동시에 약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아가돈'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가돈' 복음 자체,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과거에 행하셨고

지금도 행사하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견해는 강한 자들을 향해서 경고되고 있는

현재의 문맥을 뛰어넘는 해석이다.

 

한편 (3) 문제에 대해서도 가지의 견해가 있다.

 

() 바울이 비방자들로서 염두에 사람들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다(Sanday and Headlam, Liddon).

 

() 교회 내의 약한 신자들, 채소만 먹는 약한 자들을 의미한다. (Godet, Meyer, Hendriksen).

 

여기서 () 입장을 취함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구절이 강한 자와 약한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선한 ' 복음, 혹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당연히 ()번의 견해를 취하겠지만 구절이

강한 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한 '아가돈' '강한 자들의 자유' 의미한다면

()번의 견해를 취함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본절은 강한 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약한 자들에게 여러 손상(13, 15) 끼칠 수도 있고 또한 교회내에 불협 화음을 일으킬 있기에 특별히 그러한 비방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생길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도 배제할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