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그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거듭난 삶 2019. 5. 8.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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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심을 받은 사람

 

요한복음 1 5-8 :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자라

 

 

 

 

죄악과 어둠의 도시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롯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종과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 갈라지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롯이 선택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소알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에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고 비옥한 , 물과 목초가 풍성한 ,

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모자람이 없는 , 아니 에덴동산 같은 곳을 롯은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3장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죄인이었더라.".

 

죄악의 그림자가 소돔을 덮어 어두움에 가득 찼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소돔 땅을 멸하리라.".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 땅의 멸망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 엎드립니다.

 

"하나님, 소돔 땅이 죄악으로 멸망 받아야 하겠지만 만일 소돔 성에서 의로운 50인을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의인조차 멸망시키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어찌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의로운 50인을 발견한다면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용기를 얻은 아브라함이 다시 묻습니다.

 

"만일 5인이 부족한 45인만 발견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은혜의 음성이 들립니다.

 

"45인만 찾아도 멸망치 않겠다",

"만일 5인이 모자란다면... 만일 30명만 있다면... 계속 숫자는 줄어듭니다.

만일 20인이라면... 만일 10 있다면",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 10인이 없어 멸망당하는 소돔의 이야기.

남의 얘기 같지만은 않습니다.

 

우리의 사회는 혹시 어둡지는 않습니까?

얼마 신문 기사는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어두움으로 뒤덮여 있는 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보험금을 위해서 자신을 낳은, 자신을 이제껏 길러준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것도 37차례나 난자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보험금 80 불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죽이는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나는 사회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단면입니다.

 

그러니 형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의 이웃은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얼마나 어두웠으면,

얼마나 캄캄했으면 빛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깨달을 없었단 말입니까?

 

어두움에 사로잡히면 부모조차 필요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5 말씀의 '깨닫지 못한다' 동사는

"소유할 없다, 판별해낼 없다"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두움은 결코 빛을 소유할 없습니다.

 

어두움에 빠지면 분별력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부모도, 스승도, 도덕과 윤리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6 14절은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귈" 있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동행할 없습니다.

어두움이 물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적당한 가지고는 어두움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윤리적, 우리의 선한 도덕적인 삶의 빛으로는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낼 수가 없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결, 거룩함의 아버지라 불림을 받습니다.

그는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자신의 인생의 목표는 "성결한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감동시킨 것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 히브리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을 중심으로 "Holy Club"-거룩한 모임- 만들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들의 하루 일과는 너무도 엄격해서 감히 흉내도 내기 어려울 정도의 규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보다 경건한 삶을 위해 당시에는 사막과도 같았던 미국의 죠지아 주로 와서 고대 사막의 수도사처럼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웨슬리는 뜻하지 않은 스캔들에 휩싸였고 급기야는 도망치듯이 영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어느 올더즈게잇이라는 곳에서 열린 모라비안 집회에 참여해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 오직 믿음으로만 거룩하게 있음을 듣게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모든 죄에서 해방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웨슬리의 회심입니다.

 

믿음으로만 되는 거룩함.

오직 믿음이라는 빛으로만 물러가는 속의 어두움.

깨달음이 성결교와 감리교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 믿음의 빛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삶의 어두움이 물러갈 있습니다.

내가 어두움에서 해방될 있습니다.

 

고치고 싶지만, 곳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만

또다시 빠져들고 마는 유혹의 어두움에는

믿음의 빛이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여기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침례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 뒤에 오십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분의 신발 끈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

 

어디서 왔는지 어떤 배경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나 외치는 것입니다.

전통을 자랑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의아해합니다. 그리고는 멸시합니다.

 

'출신도 없는 시원찮은 사람이 나타나 엉뚱한 말을 하고 있구먼'.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청빙위원들이 저에게 여러 가지 서류를 요구했습니다.

서류 중에 '이력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의 배경을 알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도대체 어디 출신이며, 어디서 어떻게 공부했고, 사역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출처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력서가 명쾌해야 하겠지요. 보기 좋아야 맛이 좋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타난 사람의 배경설명은 무척 단순할 아니라 독특합니다.

 

요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의 출처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아니 최소한 이북인지 서울인지 전라도인지 경상도인지 밝혀야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의 출처는 지역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학교 출신' 묻는 학맥으로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 누가 나를 추천했느냐도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이것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당신의 주인은 그리스도 그분입니까?

이것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연으로 얽히고, 학연으로 연결되고, 인맥으로 사람이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 이것이 진짜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마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바울은 ...' 갈라디아서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지연이 없어서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 바로 사도 바울 아니었습니까?

자신의 학력이 미천해서 소개해놓지 않았습니까?

그는 당시의 가장 유명한 스승 가말리엘의 문하생 아니었습니까?

무엇이 모자라서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습니까?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

그리고 분을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사실이

훨씬 소중합니다.

 

요한 기자는 사람을 여기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

사람의 이름은 침례 요한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사실을 먼저 물어본다면 좋겠습니다.

지역이 다르면 벌써 긴장하고, 학맥으로 연결되면 마음이 놓이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셨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저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초대교회의 박해는 상상할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교도의 세력이 너무도 강한 로마에서는 새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은

밝은 태양아래 살수가 없어 지하 동굴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들과 헤어져야 했고, 종들은 주인에게서 쫓겨나야 했었고,

그들은 이웃들의 눈길을 피해 신앙을 비밀스럽게 간직했어야 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표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은 물고기 표시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표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슴" 표시였습니다.

 

시편 42편의 노래입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을 갈급해하는 마음,

마치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새끼를 가진 암사슴의 갈급함,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리스도에게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이것이 새로운 그리스도의 공동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슴 표를 보면서 그들은 함께 고통을 이겨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분을 목말라하십시오.

여러 가지 따질 만한 것들을 이제는 잊어버리십시오.

출신을 묻고 싶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였는지 아닌지만 물어보십시오.

그런 교회가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한국에 이런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이상 되는 교회 목회자 모임!

그래서 그룹에 목회자들이

5천명 이상 만명 미만 목회자 모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상상이나 되십니까?

이것이 그들만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있을 수도 있고,

시카고에 만연해 있는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여러분은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안심하십시오.

이상 안절부절못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안에서 하나, 주님으로부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람, 사람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자비하시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요한이 땅에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본문 7절을 다시 봅니다.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람 요한의 목표는

 

번째로 '증거하는 '이었습니다.

 

전하는 것입니다.

증거한다는 것은 증인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증인은 무엇을 사람입니다.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면 무엇인가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전하십시오.

생명을 전해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말해주십시오.

용서를 체험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용서하십시오.

평화를 맛본 적이 있으십니까? 말할 없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를

증거해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습니다.

 

, 세상을 완전히 비추는 , 어떠한 어둠도 물리칠 있는 ,

우리의 가장 깊숙한 어두움조차 몰아낼 있는 그런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것입니다.

 

빛이 누구입니까?

 

세상을 비추는 ,

 

빛이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8 1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빛을 따르면 이상 어두움에 다니지 않습니다.

이상 원망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이상 비난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이상 증오심에 가득찬 채로 살지 않습니다.

 

생명을 얻게 하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침례요한은 땅에 왔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서 모든 사람들로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입니다.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시설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사귈 있는 친교를 멋지게 해내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시면 사업의 연줄도 이어지게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증거하는 것의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의 , 생명을 얻게 하는 빛을 전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어두움에 이상 다니지 않도록,

죽음의 길을 이상 걷지 않도록 생명의 빛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침례요한의 목표였고, 지금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것입니다.

 

번째 목표는 7절의 뒷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빛을 믿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빛을 전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모든 사람이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진리는

 

"자기를 인하여 모든 사람이 믿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

그것이 요한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까?

나의 사는 , 나의 증거하는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저는 이러한 얘기를 너무 자주 들었습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예수 믿겠다고 하는 그런 류의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요.

 

침례 요한은 자기를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주님,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나의 평생에 사람만이라도 생기게 주옵소서.'

 

시대의 성녀라 불리는 인도의 마더 테레사가 어느 모임에서 호소했던 음성이 기억납니다.

 

"우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때때로 굶어 죽어야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보살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제가 나누어주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조각의 빵을 나누어주고, 벌의 옷을 제공해야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으로서 사랑의 도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의식합니까? 그것을 있는 눈이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도 자주 그런 일을 만나지만 절실하게 관찰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저에게 얼마나 고통인지요!".

 

그녀는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가 증거됩니까?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이 베푸는 사랑의 손길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침례 요한의 목표가 여러분과 저의 삶의 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묵상할 것이 있습니다.

 

8.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자라.".

 

마지막 묵상은 침례 요한의 겸손함입니다.

침례 요한의 투명한 설교는, 그리고 폐부를 찌르는,

양심을 벌떡 일어나게 하는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물었습니다.

 

"선지자여 어찌하면 내가 구원을 얻을 있겠소?".

 

수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앞에 엎드려 '선생님이여' 하고 외칩니다.

 

그러했지만 자리에서 그는 결코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길을 예비하러 자신의 삶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영광의 자리가 영원히 자신의 것인 착각합니다.

그리고는 어느새 명령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충고는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침례요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빛이 결코 아닙니다. 뒤에 오시는 분이 진짜입니다. 분이 생명의 빛입니다. 나에게서는 여러분이 침례를 받으시지만, 뒤에 오시는 그분에게서는 영원히 사는 성령의 침례를 받게 것입니다. 나는 분의 신들메도 메지 못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분은 흥하셔야하겠고 저는 쇠하여야 합니다.".

 

 

영광의 자리에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빛이 아니다'라고 말할 있었던 사람,

'나는 뒤에 오시는 분을 예비할 뿐이다' 말할 있었던 사람,

' 분은 날마다 흥해야겠고, 나의 존재는 온전히 사라져야만 한다' 말하였던 사람,

 

그가 바로 침례 요한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열심히 섬기고도

 

'나는 분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분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침례 요한의 삶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복된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중에 침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모두가 음성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 주간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