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거듭난 삶 2019. 5. 4.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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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 1-4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것이 없느니라

4)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번 주부터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요한복음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따르는 자들이 앞서 가는 자의 의도도 모르고 뒤따른다는 것은 어딘가 모자라는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따라가는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위대한 정치가도 아닙니다. 영향력 있는, 재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건대 여기 있는 목사를 따라가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어느 집사님이 신앙생활 하시다가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전도해서 그리스도인이 분을 만났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집사님에게 탕수육이 배달되어 와서 그것을 매우 맛있게 드시는거예요. 속으로 내가 전도한 분이 탕수육을 드시니까 내게는 최소한 저것보다는 좋은 음식이 배달되어 오겠지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옆으로 오시더니 집사님을 보고

 

" 사람 짜장면하나 시켜주시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상해서

 

"아니 예수님, 믿고 분에게 탕수육 주셨으면 저에게는 최소한 팔보채정도는 되야하지 않습니까?"하며 불평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서 되물었더니 예수님 말씀이

 

"잔소리 마라. 장로는 저기 짜장면 배달 중이다."

 

이번에는 주변을 둘러보니 목사님이 보이지 않는거예요.

 

"예수님, 그럼 목사님은 어디 계세요?"

 

"목사는 하도 말도 많고 불평이 많아서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중이다."

 

우리가 따라가는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말씀을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확실하게 정하는데 유익이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최후의 만찬 저녁에 예수님의 품에 기댈 만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요한입니다.

또한 요한 1, 2, 3서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저자이기도 합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50년정도가 지난 이후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에 남은 것들은 기억에 분명한 것들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들,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없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40 아니 50년이 지났다고 해서 자신의 결혼식 때의 모습을 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의 생명을 태어남을 시간의 흐름으로 희미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 보셔야하는 것이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으로 땅에 오셨지만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기적들에 대한 기록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도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루시는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함께 요한복음서를 함께 묵상해가시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번째로는 오늘 설교의 주제인 말씀,

"말씀"으로 살아 하나님 되시는 주님을 보셔야합니다.

 

제일 기적인 포도주사건에서도 보시면

"말씀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합니다.

 

번째 기적의 사건도 왕의 신하를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가라 아들이 살았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것을 받을 있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체험할 없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의 사건으로 되돌아 가보실까요?

아람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게 되었습니다.

아람 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게 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수많은 군사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종이 엘리사를 깨웁니다.

 

"아아 주여 어찌하리이까?" 엘리사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자가 저와 함께 자보다 많으니라"

이렇게 말하지만 사환은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왕하 6:17)

눈이 열렸습니다. 눈이 열리자 사환의 눈에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이 들어왔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되신 그리스도를 만날 있습니다.

눈만 있다고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이 열리면 우리 주위에 허다한 주님의 증인이 있음을 보게됩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하나님의 기적을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것이 없느니라"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역사적인 인물에 불과합니까?

만일 인간이라면 우리처럼 처음과 끝이 분명할 것입니다.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예수는 우리처럼 유한한 존재, 정해진 시간속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이냐 아니면 우리가 믿고 따를 신앙의 영원한 하나님이냐?

 

질문에 정확하게 답할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뿌리가 깊지 않은,

그래서 금방 뽑혀버리고 수밖에 없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선언은 신앙의 기초를 점검하는 중요한 선언문입니다.

 

말을 기억하십니까?

 

"오등은 자에 조선의 자주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독립 선언문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선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감격 때문에 잔인한 일본의 창칼이

우리에게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부를 있었던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이 있었습니다.

땅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주가 형성되기 전에 이미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의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어떤 무엇을 가지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말씀만으로 모든 것을 창조한 것입니다.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말씀 하시매", 빛이 생겨난 것입니다.

 

천지 창조 계셨던 말씀, 우주가 생성되던 말씀,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사도 요한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몸을 가지고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14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으로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모두가 만들어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안에 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그래야 여러분과 안에 말씀의 생명이 살아있을 있는 것입니다.

말씀하나만 가지고도 전진할 있어야 합니다.

말씀하나만으로도 만족할 있어야 합니다.

말씀, 그리스도 분으로 우리는 만족한다고 고백할 있어야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십니까?

말씀을 여러분 안에 두고 사십니까?

만일 아니라면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아기를 가지면 가장 쉽게 일어나는 증세가 빈혈증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적혈구가 모자라는 증세지요. 빈혈이 생기면 힘이 없고, 어지럽고, 두통이 생기며, 쉽게 피로가 찾아오면서 사소한 일에 화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빈혈증세가 자주 찾아오는 같습니다.

영적 빈혈, 적혈구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헤모글로빈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능력이 되는 말씀이 사라지면

곧바로 영적 빈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안에 있으면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이겨낼 있는 힘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박해를 당하던 그때에 86세의 나이로 화형을 받게된 폴리갑 감독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요한의 제자였지요.

처형을 집행하는 총독이 머리의 폴리갑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를 회유시키려고 했습니다.

 

"폴리갑, 지금이라도 좋으니 예수를 모른다고 번만 부인하시오. 그러면 당신을 살려주겠소.".

 

그러나 폴리갑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86년을 사는 동안 번도 나를 외면하거나 배반하신적이 없는데 어찌 내가 지금 어렵다고 주님을 배반할 있겠습니까? 총독님 당신의 계획대로 행하십시오".

 

말을 마치고 그는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면서

 

" 예수여, 영원히 영광을 받으소서".

 

찬송으로 그의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능력이신 말씀이 속에 살아 있기만 하면 뜨거운 장작더미도 사람을 사를 없는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 포악상을 폭로하는 "Hiding Place"에는 코리 붐의 이야기가 적혀있습니다. 금요일 감옥에 갇힌 자들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완전히 벌거벗고 줄을 지어 검사관 앞에 서야만 했습니다.

 

여자들의 벌거벗은 행렬 속에서 아내를 발견한 코리는 울먹이면서 소리쳤습니다.

 

"베시, 예수님께서도 벌거벗기우시고 십자가를 지셨소".

 

아내도 남편을 보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래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벌거벗은 행렬 속에서 모욕과 부끄러움과 절망의 고통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부부의 대화를 듣고 새로운 용기를 얻었습니다.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하게 하십시오.

주변의 사람들에게 힘을 있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하여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나이다.... 마음을 주의 말씀으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힘이 생겨 우리의 영혼이 소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만 거하면 수치도 당하지 않게 것입니다.

 

"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라".(시편 119:50)

 

그렇습니다. 말씀은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만이 우리를 살게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안에 함께 섰느니라". (15-17)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여주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말씀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그가 없이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지어졌습니다.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를 지어셨으니 여러분을 바꾸고 저도 바꿀 있는 능력이 속에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모난 성품이 말씀이신 주님을 통해 바뀌어질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자녀들의 마음도 녹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주를 만드신 말씀, 바로 하나님이신 말씀이 태초부터 우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고 마지막 말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 20:32)

 

은혜를 주시는 말씀에게 그들을 부탁했습니다.

 

말씀이 도대체 어떻게 있기 때문입니까?

말씀만이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세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 가정을 든든히 세울 없습니다.

우리 지식만으로 안됩니다.

우리들의 교회가 저의 지혜와 여러분의 협조만 있으면 세워질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은혜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능히 서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말씀이 되시는 주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무언가 뛰어난 것이 있으면 압니다.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기만 하면 문제들이 척척 풀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에는 은혜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일이 돌아갈 때는 훌륭한 교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단 폭풍이 불기 시작하면 믿지 않는 자들의 공동체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니다.

마음에 여유는커녕 각박해지고 당황합니다.

책임도 던져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회오리 바람에도 든든하게 세워져 있으려면 말씀이 우리 안에 튼튼히 자리 잡아야 합니다.

 

대서양에서 거대한 여객선 런던호가 조난을 당했습니다.

3백명을 태운 배는 폭풍에 밀리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암초에 부딪쳐

선창이 부서지고 물이 배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을 요청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배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울고불고 싸움이 벌어지고 고함을 지르면서 서로 구명조끼를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쪽 선실 구석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마귀 못대고 환난 풍파 없도다...".

 

노래의 주인공은 앳되 보이지만 평화스러운 얼굴을 소녀였습니다.

찬송을 들으며 사람, 사람씩 정신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그녀와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공포가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회복했습니다.

그리고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최후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날 살아남은 사람은 십명밖에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여객들이

찬송소리와 함께 파도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살아있는 자는 죽음도 이겨내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입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죽어가던 영혼이 살아납니다.

말씀이 들어가는 순간 살아있는 자들은 행동이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막힌 인격의 문을 두드려 인격이 새로워집니다.

오늘 본문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 죽어 꼼짝할 없는 곳에 생명을 던져넣는 것이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있어야 우리 삶에 빛이 있을 있습니다.

밝은 삶을 살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두움에 거닐 않게 됩니다. 기쁨을 누리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이상합니다. 말씀을 받기가 싫습니다.

어두움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좋아합니다.

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이 불편합니다.

심지어 말씀의 빛이 비춰지지만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려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믿음과 불신앙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받으십시오. 말씀이 없으면 불신과 의심이 물결칠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움에 사로잡히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날마다 거하게 하십시오.

그래야 우주를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능력으로 살게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주님이 운행하는 교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이런 글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놀라게 한다. 그의 영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그가 가진 의지는 나를 너무도 당황스럽게 만든다. 세상의 어떤 사람과도 비견할 없다. 어떠한 역사도, 어떤 인간도, 어떤 시대도, 어떠한 성품도 그와 비교될 없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특별하다".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이렇게 고백하시겠습니까?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날 무렵에 이런 고백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하기를 원하십니까?

 

비교할 없는 능력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날마다 고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1997 6 29

사랑으로 형택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