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요한복음 1장 9절-14절 :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보통 우리에게 알려진 은하계의 외각지역을 공전하고 있는 중간 크기의 혹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의 지구가 포함되어 있는 은하계는 우리의 과학으로 관찰할 수 있는 수십 억개의 은하계중의 하나일 뿐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은하계의 혹성들의 공전 주기에
약간의 오차가 생기기만 해도 우리 우주세계는 엄청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우주 생성이론으로 각광을 받은 것은 "Big Bang Theory"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우주가 거대한 폭파로 인한 팽창과 수축의 결과로 혹성들이 생겨났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그럴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Chet Raymo라는 우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주의 대폭발 일초후에 팽창률이 10의 15승의 1정도(100조분의 1)로 오차가 생기기만 했어도 우주는 급속도로 폭파해버리거나, 풍선처럼 불어나버려 혹성이나 은하계가 지금의 형태처럼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연히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정확한 우주 아닙니까?
이 정도로 정확한 우주가 거대한 폭발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세기의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시간을 넘어서있는 하나님은 존재해야만 한다"(Any God must exist outside time)고 말입니다.
이 오묘한 질서를 보면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는 인간이 아닌 어떤 분이 존재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편 33:6절과 9절 말씀입니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아야 지속될 수 있는 세상, 이 우주를 그리스도, 여호와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를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믿을 수 있으시다면 거대한 은혜를 여러분들은 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진화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잘 것 없는 단세포가 진화하고 진화해서 오늘날의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론이 더 믿을 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대폭발 이론-폭발되어서 이 우주가 생겨났다고 하는 말이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안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2천년 전에 태어난 한 유대인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에 뒤늦게 태어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이 되어 창조하고,
우주의 질서를 움직여 갈 수 있단 말입니까?
말이 되지 않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믿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11절 말씀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창조한 땅, 자신이 다스리는 땅이며,
자신이 직접 만드신 그 백성들이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가지 영적인 법칙을 들어보셨습니까?
약 20억의 인구가 들었다고 통계가 나온 CCC 총재인 Bill Bright의
전도 소책자 사영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저에게 배달된 Christianity Today 라는 잡지에는 빌 브라이트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의 저자는 16세가 되던 1972년 CCC 집회에서 사영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그네에 앉아있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사영리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너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너무도 단순한 진리를 들은 그의 동생은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는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여동생에게 삶의 거대한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그녀의 첫 번 딸이 어떤 사고를 당한 뒤 입은 뇌의 상처로 생명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딸은 자신의 두 번째 생일을 이틀 앞 둔 날이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로부터 생일 축하카드는 이미 발송되어 버린 뒤였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까?
두 살도 채 못된 자신의 여동생의 딸이,
이미 생일카드는 발송되어버린 생일을 이틀 앞둔 날에
그 아이의 몸이 묻혀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란 말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해 안 될 일이 너무도 많아서 그 아픔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런 그리스도라면 누가 믿겠습니까?
얼마나 애원했겠습니까?
얼마나 매달려서 기도하였겠습니까?
두 살도 채 못된 아이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울부짖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극히 평범한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난,
나하고 같은 무렵에 태어난 예수를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을 겁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줄이어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를 주님으로 만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위대한 특권을 주시겠다고
오늘 말씀 12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그 분을 받아들이면 나의 존재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내가 원래 누구누구의 자녀였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양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릴 우찌무라 간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진리는 너무도 단순하다. 그러나 그 진리는 심오한 것이다."
마치 이렇습니다.
대학시험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 학교는 면접만으로 뽑습니다.
학생이 왔습니다. 이런 독특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우리 학교에 합격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만일 학생이 'yes'라고 말하면 합격이고, 'no'라고 말하면 불합격입니다.
이런 시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너무나 엉뚱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구원의 길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명은 복잡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대로, 우리의 논리대로,
우리 이성에 꼭 맞게 되는 구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것을 강조해서
"혈통도 아니고 육정으로도 되지않고 사람의 뜻으로 되지도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혈통이 아니면 모두 이방인들로 취급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혈통, 피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태 3:9).
속으로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래도 얼마나 오래 교회 다닌 줄 알아? 그것가지고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셔야 합니다.
통일교의 피가름이 왜 성서적이지 않은 줄 아십니까?
혈통가지고는, 피를 이어받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의 길을 갈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not of blood).
여러분이 크리스쳔 가정에 태어났다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했다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배경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대 째 예수를 믿었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구원입니까?
그 다음은 무엇으로 안됩니까?
"육정으로"도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정이란 '하나님에 반대되는 인간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 없어도 돼' 사람이 너무 좋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인간성이 좋다고 구원받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깊숙한 내면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 버틸 수 있는 인간성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말과 행동의 결과뿐만 아니라
그 밑에 숨어있는 동기까지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다 말입니까?
우리의 좋은 성품이 구원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우리 속사람은 결코 구원받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희한한 전도지 하나 소개할까요?
"당신이 지옥에 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대답은 이러합니다.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자동적으로 가게된다.".
우리의 내적 성품은 성경말씀 그대로 '회칠한 무덤'같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근사하지만 속은 더러움으로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영락없습니다.
옛적에 군자들도 "愼獨"이라 했어요.
혼자 있을 때 조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으면 더러운 일을 스스럼없이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적인 열정가지고 구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더 있습니다.
"사람의 뜻으로"도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획하는대로, 우리가 마음먹으면 되고, 마음 먹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아니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해야 하는 것을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우리 마음을 조절하실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우리 감정을 조절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4-5).
사도 바울의 절규에서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삶과 마음을 엿보지 않습니까?
청록파 시인, 박두진 님의 시를 보시겠습니까?
"우리들의 잘못을 기억하지 말으소서
너무 아픈 채찍을 거둬주소서
이대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너무 많은 죄의 덫을 두들겨 부숴주소서
저어도 아득하게 손 닿지 않고
몸을 던져 솟구쳐봐도 너무 거센 풍랑
우리들의 이 시대
우리들의 오늘을 굽어 살피소서"
우리는 정말이지 이대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연약함 투성이 아닙니까?
너무 많은 죄의 덫으로 꼼짝 달싹할 수 없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내 안에 너무도 거세게 이는 죄의 풍랑,
어찌 주님의 굽어 살피심 아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이대로 우리가 구원 받을 만 하겠습니까?
구원은 유일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누가 생각나십니까?
침례요한!
맞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진짜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4절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되어져야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혹시라도 아직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죄의 문제로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 분을 주님으로,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십시오.
그 분 앞에 나와야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너무도 방황했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해 주신 주님. 주님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주시옵소서.".
이 구원의 소식,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신의 공의로움 때문에, 진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셔야만 했던 그런 은혜인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분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바로 그 영광이 자녀가 되는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십니까?
14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안에 무엇이 가득합니까?
무엇으로 충만하다구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유념해서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는, 우리 하나님 되신 그리스도께는 두 가지가 명백하게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공의, 다시 오늘 본문의 말로 옮기면 "은혜와 진리"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먼저입니까?
진리입니까? 공의입니까?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먼저라면 오늘 교회에 나오신 성도님들 어떤 분이라도
여기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공의가 우선이 아닙니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은혜가 앞서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은혜가 먼저라는 사실이 저를 얼마나 안심시켜 주었는지요.
부모님들에게 만일 제일 중요한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이런 답을 듣지 않을까요?
자녀교육이라고 말입니다.
자녀교육 때문에 이민 오셨다는 분도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를 가르칠 때 어떤 원칙을 지키면 좋을까요?
여러분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을 것입니다.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라는 책을 쓰신 초등학교 교사가 있습니다.
그 분의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가 일학년 담임이었을 때 쉬는 시간마다 이렇게 묻는 어린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나 나쁜 아이지요?",
"아냐, 복이는 오늘 청소도 잘 하던 걸.",
또 와서
"선생님 나 나쁜 아이지요?",
"아니, 좋은 아이지. 하나님이 귀하다고 하신 아이지.",
"선생님, 나 나쁜 아이지요?",
"아니,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야.",
"치, 우리 엄마가 나는 말도 안 듣는 나쁜 아이라던데... 선생님 나는 공부도 못하지요?",
"아니, 너는 요즘 공부도 잘하고 있는 걸, 앞으로는 더 잘할거고.",
"우리 엄마는 날 보고 바보라고 하던데...",
"선생님, 나는 나쁜 아이지요?",
"아니..." 그 아이는 전날 어머니에게 나쁜 아이라는 소리를 들은 만큼 그 선생님에게 좋은 아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했다.".
이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 같습니까?
그 글의 마지막 한 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달쯤 이 일이 반복된 후 그 어린이는 앞장서서 좋은 일을 하려고 애를 썼다." .
진리없이 어찌 사회가 제대로 서겠습니까?
공의로움없이 아이들이 올바름을 어떻게 배우겠습니까?
저도 아이들에게 굉장히 엄한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먼저 보여주시고 공의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사랑의 입맞춤이 없는 엄격한 진리는 살벌하고 굳어버린 인격을 만들어냅니다.
사랑없는 진리,
은혜가 사라진 진리의 외침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적개심과 분노와 증오심를 자아냅니까?
공의부터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공의보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은혜가 충만하신, 그리고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부터 먼저 요구하셨다면 여러분과 저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 이스라엘의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어머니 나 태양이 떨어진 걸 보러 갔다 올께요".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꾸해 주시겠습니까?
"씰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해".
그 이스라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렴, 그러나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말아라".
사랑담긴 얘기는 공의보다 더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은혜없이는 아무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은혜없이는 아무도 이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스승의 은혜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여기에 버젓이 서서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의 은혜 아니었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모두 은혜 받은 사람들만 모여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여기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때문에 여기에 모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큰 소리 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만일 은혜가 먼저 오지 않고 진리부터 오면 교회는 혼란해집니다.
(목사님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두 청년이 싸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계신 한 어르신이 점잖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보게 젊은이들, 여기가 교회인 줄 아는가?")
교회에는 은혜가 넘쳐나야 합니다.
신경 날카로운 진리파들이 많은 교회보다
은혜가 훈훈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더 좋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들을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문제를 보고도 고치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좌정하시는 교회와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자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진리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도 곧 넘어질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잡기를 원하시면 온유하게 대하십시오.
가정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에도 사랑보다 공의가 먼저 오면 가정이 살벌해집니다.
냉기가 돌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앞세우십시오. 아내와 자녀를 온유하게 만나십시오.
은혜를 먼저 끼쳐보십시오. 자연스럽게 진리가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에게는 먼저 은혜와 다음 진리가 충만합니다.
이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풍선 장수가 풍선을 팝니다.
아이들에게 빨간 색, 파란 색, 노란 색 여러 가지 색깔의 풍선에
헬륨가스를 넣어 팔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흑인 아이가 다가 왔습니다.
"아저씨, 까만 풍선도 하늘을 날 수 있나요?".
피부가 검은 것 때문에 언제나 소외받고 천대당한 것이 마음에 한이 된
그 아이를 보면서 풍선 장수는 이렇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럼 물론이지, 검은 색 풍선도 하늘을 날 수 있고 말고.
풍선이 하늘을 나는 것은 풍선 색깔 때문이 아니란다.
어떤 풍선이든지 공기만 들어가면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거야.".
이 얘기를 들은 그 아이는 마음이 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검은 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가면 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그 아이가 자라서 지금 민권 운동가인 Jessie Jackson목사가 되었습니다.
검은 색이라도 은혜의 바람이 들어가면 하늘을 높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아이에게 그 풍선 아저씨가 이렇게 말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 힘을 길러야돼. 그래야 흑인들을 억압하는 모든 백인들을 무찌를 수가 있단다.".
그 어린 마음에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 때문에
분노와 증오심을 심어주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리는 은혜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은혜없는 진리는 분명히 파괴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진리를 바로 세우시기 위해서, 은혜로 우리를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가득하신 주님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십시다.
이 시간 요한 기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하나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그리스도 하나님이 거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에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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