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거듭난 삶 2019. 8. 1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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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 11:17-26]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이미 나흘이라 -

 

"나흘"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얼마나 권능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여기 지적한 것이다.

 

 

 

[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리쯤 되매 -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많이 오게 원인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그들은 위문차로 많이 왔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Calvin).

 

 

 

[ 11: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활동적이며 사업적이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실을 있다.

 

그가 집에 앉아 있었음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니다.

 

 

 

[ 11:21-22]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구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 있었다.

그녀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도가 일어도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깊이 믿음을 가지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있다.

 

그는,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어름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는 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건너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있다.

 

 

 

[ 11: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날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고,

방금 행하시려는 이적에 따라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가리켰다.

 

(43-44 말씀을 하시고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러나 마르다는 말씀을 세상 날에 있을 부활 관계의 것으로 알았다.

 

유대인들은 세상 날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12:2 근거한 사상일 것이다.

 

(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마르다가 저렇게 유대인들의 믿는 교리는 기억하였다.

그러나 부활이 주인공이신 메시야께서 때에 현림하셨으니 만큼,

현재에도 사람의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그가 교리는 알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충분히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바로 "부활"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이란 것이 전연 없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독자적인 부활은 없다.

 

세상 날의 부활도 예수님 때문에 성립될 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다.

 

 

 

[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 이것은 "나는 "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 구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11:25 말씀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

 

( 12: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

 

(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없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 참조 : (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약속을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계약(神人契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죽어도" 말의 헬라 원어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

 

(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 말에 있어서

 

"살아서"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B. Weiss) 아니고, 영적 생명 ,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유로서는,

 

(1) 요한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

 

* 참조 (5:19 이하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특별히 11:25-26 말씀이 그러하다는 .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 "살아서" 말과 "믿는 "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거듭하는 뿐이다.

 

25 절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것뿐이다.

 

,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