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거듭난 삶 2019. 8. 1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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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5 1-9 :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날은 안식일이니

 

 

갈릴리 가나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이후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반경 32킬로내에 살고 있는 유대인 성인 남자는

반드시 일년에 최소한 번은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위해 올라가야 했습니다.

유월절과 칠칠절,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이지요.

 

오늘 본문은 정확하게 어느 명절인지는 알려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가나보다는 남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고도가 가나보다 높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의 중요성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는 올라간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의 양문 - 제물인 양을 들여보내는 -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습니다.

본문 2절과 3 말씀은 못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함께 보실까요?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베데스다 못은 길이가 105미터, 넓이가 40미터,

깊이가 23미터 정도가 되는 꽤나 못입니다.

그리고 행각 다섯이 있는 못이라 했습니다.

 

행각이라는 것은 건물에서 달아내린 지붕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멋진 쉼을 위해 덮개를 기둥을 사이사이에 두고 연결시켜 만든 것입니다.

못이 내려다보이는 이런 행각이 다섯이나 있다는 얘기는

주변이 매우 아름답게 치장되어 부유함과 번성함을 자랑하는 것이라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멋지게 자리잡은 베데스다 바로 주위에는

전혀 그런 것에 걸맞지 않은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안식과 쉼을 누리고 있어야 어울리는 곳에

오히려 많은 병자들과 소경과 다리를 저는 사람,

신체의 어떤 부분이 마비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너무도 정확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멋진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곳곳에 있고,

얼마만큼의 돈을 주기만 하면 아름다운 요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포만감을 누리며 먹을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곁에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는지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달라스에 있을 Homeless People 위해 해마다 추수감사절기가 되면

음식을 준비해 도심지 곳을 찾아갑니다.

시간이 되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나는지 남루한 옷차림을 사람들이

며칠간 씻지 못한 그리 달갑지 않은 냄새를 풍기며

한끼의 음식을 먹기 위해 곳으로 모여드는 것입니다.

 

때때로 말이 어눌한 사람, 마약에 중독되어 계속해서 떨고만 있는 사람,

아직도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곳으로 몰려오는 것입니다.

 

바로 도심지 중간에, 멋지게 장식된 높은 건물 바로 옆에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이 밑바닥을 헤메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풍족한 추수를 감사하며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끽하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움직일 없을 만큼의 거대한 아픔을 가지고

물이 동하는 기적만 기다려야만 하는 상태로 고통 중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도 너무 많은 것입니다.

 

바로 현장에 예수님께서 찾아 가셨습니다.

바로 고통과 아픔의 현장에,

어쩌면 이상의 희망조차 기대할 없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곳에서 가장 절망적인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38년동안이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을 만나신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일 없는 사람 그에게 다가 가셨습니다.

 

당시 못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왔습니다.

간간히 못의 물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제일 먼저 들어가는 병자는

병이 어떤 것이든지 고침을 받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가눌 없었던 사람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희망적인 이야기가 아닐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부탁했을 것입니다. 못까지만 옮겨달라고 말입니다.

아니 제일 먼저 동하는 물에 그를 넣어달라고 말입니다.

 

많은 병자들이 행각 아래에서

차가운 비를 피하며 어쩌면 뜨거운 태양빛을 피하며

언제일지 모르는 물의 동함만을 기다리며 못을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를 데려온 사람들이 - 가족일런지 친구일는지 - 그와 함께 못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이 하루에 번씩 아니 하루에 번씩이라도 동해주었으면 좋겠지만

물의 동함은 기약할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를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 물은 쉽게 동하지 않습니다.

마비된 병자와 함께 있을 없던 가족과 친지, 친구들은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3 중병에 효자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니 설혹 물이 동했다 해도 꼼짝 못하는 그를,

물이 동하자마자 제일 먼저 물속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끙끙대면서 그를 물가로 데리고 무렵이면

어느새 가벼운 상처를 입은 자들이 남의 도움이 없이도

충분히 먼저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루가 지나가고 달이 지나가고 어쩌면 수년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병이 오래 줄을 이미 아시는 주님이,

드디어 그를 만나신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니 이런 엉뚱한 질문이 어디 있습니까?

38 동안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

38년의 지긋지긋한 지병으로 움직일 없는 그에게

"낫고자 원하느냐" 질문은 너무 이상한 질문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교훈의 핵심이 있습니다.

사실 38 병자는 물이 동하는 순간 제일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낫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세월을 지나면서 어쩌면 이제는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주변에만 그냥 머물러 있었던 것은 혹시 아니겠습니까?

 

낫는 기적을 바로 옆에 두고도 이상 희망을 가질 없는 상황에 다다른 그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상 어찌할 없기 때문에 아예 모든 기대와 희망을 내던져버린

상태일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희망을 회복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번의 실패로, 또는 거듭된 실패로,

해의 계속되는 질병 때문에,

해가 아니라 몇해동안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뀌지 않는 상황과 환경 때문에

이제는 아예 해결의 가능성을 조금도 기대하지조차 않은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녀 때문에, 남편 때문에,

하루가 아니라, 달이 아니라, 아니 년동안

눈물로 매달렸는데도 해결의 실마리조차 끄집어내지 못하자

아예 이제는 잊어버리자고, 어차피 우리 인생 이러다 마치고 마는 아니냐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희망을 가지겠느냐고

의심하면서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우간다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의 편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전세계 모든 국가 에이즈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우간다입니다.

하루는 심방을 달라는 요청을 받고 가정을 찾아갔습니다.

번째 가정은 TV 훔치기 위해 들어온 강도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이 죽은 가정이었고,

나머지 가정은 카냐냐 교회의 교인으로 에이즈로 고생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놀란 것은 에이즈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무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그들을 위해 우는 사람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를 무척 놀라게 것입니다.

그저 운명이려니 체념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는 것입니다.

 

카냐냐의 교회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우간다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여 연구하는 마케레레 대학에서

지난 학기 3개월 동안 에이즈로 죽은 사람이 31명이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있었고,

대학병원 내과 병동의 70% 에이즈 환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안타까움은 물론이고 죽음에 대한 슬픔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는

체념의 그림자가 매우 충격적이었다는 보고를 전해주었습니다.

 

기대감을 상실한 사람, 희망을 저버린 사람,

소망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팽개쳐버린 사람

그들이 바로 38 병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전혀 엉뚱해 보이는 질문을 그에게 던지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여러분도 정말 낫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가정도, 자녀도, 자신이 정말 회복될 있을 것이라고

아직도 소망을 버리지 않고 계십니까?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셔야 합니다.

물음을 들으실 희망을 다시 찾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대답에 따라 주님이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나라를 잃은 서러움, 포로 생활의 고달픔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해가 지나갑니다.

새로운 해를 거듭 맞이해 보아도 변화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포로에서 풀려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점점 포로 생활에 익숙해집니다.

포로된 땅에서 자녀도 낳고 기르고 먹고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는 언제인가는 포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은

포기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망각하며,

자신을 스스로 비하하면서 포로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영위해 가게 것입니다.

 

그래! 이렇게 살면 어떠랴,

인생 한번 살다 가는 , 여기서 그런대로 안락하게 살다가면 되는 아니랴?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포로생활에서 벗어날 있는 희망을 들려 주었지만,

세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자 그들은 서서히 예언자들을 통해 들려왔던

포로 귀환의 희망의 멧세지를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게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

마치 38년된 병자가 빠져 있었던 깊은 절망의 수렁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골짜기로 데려 가셨습니다.

붙어있던 살까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앙상하게 남은 뼈만 가득한 골짜기에 데려가신 것입니다.

모든 희망과 소망과 기대감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현장에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사면에는 뼈가 심히 많았고 아주 말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인자야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인자야 마른 뼈들이 능히 살아날 것이라고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 여러분과 저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인자야 모든 소망이 사라진 절망의 현장에도 생명이 솟아날 것을 믿느냐?

소망을 저버리지 않고 회복되기를 원하느냐?',

 

땅에 가장 무서운 질병이 무엇입니까?

죽음에 이를 만큼의 무서운 병이 무엇입니까?

바로 희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자면 '절망하는 '입니다.

이상 가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 해봐야 없다고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38 질병에서라도 나을 있음을 믿고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38년된 병자가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네가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묻는 음성이 무언가 새롭게 그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처절한 대답을 합니다.

 

"주님 나는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가에 머물러 있은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를 만큼 아픔의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아무리 들어가려고 발버둥 쳐도 이미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를 넣어 사람이 주위에는 전혀 없습니다. 나의 절친한 친구도, 나의 친척도, 아니 심지어 나의 형제와 가족조차도 모두 곁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낫고 싶습니다.",

 

그의 영혼 깊은 속에 거대하게 자리 잡은 외침이 주님 앞에 들려진 것입니다.

 

"주님, 나는 낫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를 속에 넣어 사람이 없습니다.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주님! 나는 걷고 싶습니다. 나는 움직이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르짖는 음성을,

영혼의 외침을 들어주셨습니까?

절망에서 회복되어 소망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38 병자의 외침을 들어 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들어주셨습니다.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일어나라! 걸어가라",

 

우리는 일어날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을 제치고 걸어갈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닙니까?

우리 영혼의 깊은 외침을 듣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아닙니까?

 

겨우 기다리다 되지 않은 때문에

우리의 소망을 팽개쳐 버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38년이 되었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주님께 대답하기만 하면, 외치기만 하면, 믿음이 있기만 하면

우리는 일어날 있을 것입니다.

회복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38년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던

절망의 거적 떼기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른 뼈의 절망과 좌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

이에 내가 그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군대더라.",

 

하나님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꼼짝할 없는 절망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분의 음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8 병자는 그를 들어서 물속에 넣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은 해결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주님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분만 계시면 우리는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어갈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들은 우리의 의지할 바가 아닙니다.

기다릴 대상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기다리십시오.

 

38 병자의 얘기를 다시 들어보십시오.

나를 도와 연못에 넣어 사람이 없다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들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바로 물이 동하는 순간에 도와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고백 아닙니까?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기만 하면 그토록 가까이 있던 사람이라도

자신이 먼저 동하는 물속에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군가 도와 사람만 있으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참된 도움을 있는 분은 주님 뿐입니다.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우리 곁에 계실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유명한 네델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빈센트 고호

한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일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회자로 사역했고,

그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모든 좋은 것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1878 그의 나이 24세가 되던 해에 브뤼셀에 있는 복음전도 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후에 동안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유가 알려지지 않지만 고호는 그의 소명을 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1889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2년이란 기간에 200여점의 명화를 그려냈습니다.

그러나 37세가 되던 해에 그는 정신분열증과 병으로 시달리다

급기야 총을 빌려 자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 뛰어나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까?

유명해지는 것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분만이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 주실 있습니다.

다른 것에 매달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분을 발견하십시오. (e-1,2018-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