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거듭난 삶 2019. 9. 1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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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 [ 15:1-3] 나는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 15:1-2] 나는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내가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 - 여기 ""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물"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 가리키는 비유이다.

 

( 80:8-15 주께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 주께서 앞서 가꾸셨으므로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12) 주께서 어찌하여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5:1-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못을 만들 있겠느냐

4) 불에 던질 땔감이 뿐이라 불이 끝을 사르고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수풀 가운데에 있는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땔감이 되게 같이 내가 예루살렘 주민도 그같이 할지라

7)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내가 여호와인 너희가 알리라

8) 내가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범법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19:10-14 피의 어머니는 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

11) 가지들은 강하여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만한데 하나의 키가 굵은 가지 가운데에서 높았으며 많은 가지 가운데에서 뛰어나 보이다가

12) 분노 중에 뽑혀서 땅에 던짐을 당하매 열매는 동풍에 마르고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더니

13) 이제는 광야, 메마르고 가물이 땅에 심어진 되고

14) 불이 가지 하나에서부터 나와 열매를 태우니 권세 잡은 자의 규가 만한 강한 가지가 없도다 하라 이것이 애가라 후에도 애가가 되리라).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식물 중에 가장 낮은 (포도나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점령한다."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서만 비로서 진정한 열매를 맺을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있다.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

 

(2 참조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 참조 ( 11:12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뫄타누스(Montanus)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 말씀(그리스도)이요,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신자는, 은혜를 많이 받아 그리스도에게 접근할수록 자기의 죄를 깨달으며, 주님과 자기와의 구분을 더욱 밝히 깨달아 안다.

 

" 아버지는 농부라."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세우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를 영원 전에 세우시고,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를 마침내 세상에 보내셨다.

그가 중보자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는 사랑하는 아듬이요 기뻐하는 자라" 하셨다( 3:17).

 

그리고 변화산에서는 말씀하시기를,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도 하셨다( 17:5).

 

하나님께서 신임하시고 세우신 중보자를 인간이 불신임할 것인가?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 3:4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점에 있어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성경에 기록된 말씀

,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말씀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자격과 효능(效能)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사람의 말은, ... 사람과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 1:16; 고전 1:18, 2:4, 5, 15:2;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 4:12).

(4) 영이며 살리라는 것이라고 (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생명 있는)라고 ( 13:3).

(7) 좌우에 예리한 검이라고 (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살전 2:13).

(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바빙크(Bavinck), 성경 말씀의 능력과 생명의 역사에 대하여 비유하기를,

 

손이 일하지 않을 때에도 일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말은, 성경 말씀에 능력이 마술적으로 붙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말씀과 관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뿐이다.

 

바빙크(Bavinck)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를 무인격한 마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연락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은 무인격한 능력이 아니며,

말씀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활동하게 하시되 같은 모양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으신다.

그는, 헤아릴 없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말씀(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역사하여 혹은 회개시키가며,

혹은 강팍케 하시며,

혹은 일어나게 하시며,

혹은 넘어지게도 하신다.

그가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하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Gereformeerde Dogmatiek , Kampen J.H Kok 1911, p. 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