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거듭난 삶 2019. 10. 19. 00:12
728x90

비어있는 무덤

 

: [ 20:1-2] 안식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 20:1] 안식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안식후 첫날 - 이는 일주일의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올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올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안식 첫날', 하루의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른다면 토요일 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첫날'(미아) '하나'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프로토스)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이것이 셈어(Sem )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히브리어나 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근거있는 주장이라고 있다.

 

아직 어두을 - 마태의 '미명' 마가의 ' 돋을 '라는 표현에 비해 다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떠날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 본다(Lenski). 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를 탄압한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올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 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각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주일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이 완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올 받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비사하였던 여제자격의 인물인데,

 

( 16:9 예수께서 안식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수종 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독자들 중예는 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혼동할 수도 있으나 양자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11).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의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무덤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사람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명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였다.

 

( 28:1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3: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여자들이 뒤를 따라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24:1 안식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이런 차이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모른데서 것이라고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물들이 무덤을 방문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마 요한은 방문자들 가운데 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올 맞추어 서술하였을 것이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향유를 바르는 것은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유대인들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는 고인(故人) 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사흘 동안 시신을 돌보았던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왔을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을 합해야 겨우 옮길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 홈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몇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문올 여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언급을

 

(12-13 입은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비교적 간략히 다룬다.

 

( 28:2-7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위에 앉았는데

3) 형상이 번개 같고 옷은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16:5-7 무덤에 들어가서 옷을 입은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24:4-7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본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는지 아니면 무덤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시신의 도난을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확신했고 그것올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려갔다.

 

요한은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무덤의 사실을 전해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관련시켜 모든 제자들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 요한은 직접 무덤을 확인한 중심적인 제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 나갔을 것이다.

 

*참조 : (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는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자들 대표격으로 언급된다.

18:27 이후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18:27 이에 베드로가 부인하니 닭이 울더라)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요한의 특징적인 표현으로

 

(13:2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하나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19:26 예수께서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1:20 24절을 연관시켜 인물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요한 자신임을 있다.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4 일들을 증언하고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아노라)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표현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있다.


사람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 본문의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1 안식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에게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져갔다' 해당하는 혤라어 '에란' 비인칭 동사로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으리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가리키지는 않는 표현이다.

 

아마 무덤 도굴꾼이거나 예수의 적대자들이 마리아에게는 혐의(嫌疑)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 내용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그녀가 무덤을 찾아간 것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을 예고한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 1025 광화문 이승만광장의 행사를 지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