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사사 입다의 이야기 2

거듭난 삶 2020. 9. 15.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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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입다의 이야기 2

(내촌감삼의 주석에서)

 

사사기 111-40

 

 

우리들은 입다의 경솔을 책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그의 지위에 놓고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때는 그의 사사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나라 위해, 하나님 위해,

더구나 자기는 하나의 무명 무속의 무사(용사 a masterless warrior),

창기의 아들이라 해서 크게 천시되던 자,

그가 어찌 이 대임(大任)을 감당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가 만약 일보라도 그르치는 때면,

국가는 멸망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그는 어떠한 희생을 지불해서라도,

이 전쟁에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이때에 있어서의 저() 입다의 심정을 미루어 헤아리면서,

동정의 눈물을 금치 못합니다.

 

위에서의 능력은, 그의 몸에 더해졌습니다.

서원은 여호와 앞에 세워졌습니다.

 

이제 입다의 용기는 평일보다 백배하여,

그는 맹렬히 암몬 사람의 진을 쳐 들어갔습니다.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32-33)’고 있습니다.

 

살벌한 기사를 좋아하지 않는 성서 기자는,

이 경우에 있어서도, 이것 이상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기사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잘랐다든가, 찔렀다든가, 아우성쳤다든가, 부르짖었다든가 등의

피비린내 나는 것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사기처럼, 전쟁에 대하여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는 글에서까지도,

성서는 전쟁 그것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침묵을 지키며,

필요이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서가 성서된 연유(reason)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대승리로써 끝났습니다.

강적은 정복되었습니다.

백성의 자유는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용사는 개선의 영광을 안고 그 집으로 귀환했습니다.

 

월왕 구천, 오를 깨치고 귀환하니 의사, 환가하여 모두 금의

이 세상의 영예 중에, 개선의 영예보다 나은 것 없습니다.

 

입다는 이제 암몬인의 왕을 깨치고서 금의를 입고

미스바에 있는 그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그런데 보시라.

이 무슨 일이랴!

 

먼저 첫째로 그의 집을 나서서 그를 영접한 자는,

그의 한 딸이었습니다.

 

딸은 소고(, 장구 a drum)를 가지고, 춤을 추면서,

그 개선의 아버지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입다의 무남독녀였습니다.

 

아아 운명!

이를 본 입다의 마음은 순식간에 환희의 하늘에서,

비애의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그의 옷을 찢었습니다.

 

내 딸아하고 그는 외쳤습니다.

 

너는 실로 나를 망하게 했구나. 너는 내 화근이 되었구나-일역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중의 하나로다-한글역)하고,

 

그는 계속하여 말했습니다.

 

아아, 어찌합니까!

서원의 말을 이미 해 놓아, 이제는 철회할 길 없고,

그는 그의 무남독녀를 번제로 여호와 앞에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아, 고가의 승리, 적을 깨치고 나라를 구하고서,

그 대가로서 무남독녀를 바치지 않으면 안 되나니라고요.

 

이때의 입다의 마음은 산란해져 실오라기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로(과연) 이스라엘 국사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아버지에게서 이 서원한 이야기를 듣고,

조금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아버지 놀라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서원을 세웠사오면, 그와 같이 내게 하여주셔요. 하나님은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의 적인 암몬사람을 이기게 하였습니다(36-)일역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한글역).

씩씩한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의 적에 승리한 것과 그녀의 나라의 구원을 듣고,

그녀의 몸에 임한 큰 재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기쁘게 아버지와 나라의 희생(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제단 위에 드린바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죽음의 준비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무튼 이일을 내게 용서해 주셔요. 제발 2개월 동안 내게 여가(시간;기간)를 주셔요. 나는 그 동안에 내 동무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내가 처녀로서 종신함을 슬퍼하려 합니다(37-)-일역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한글역).

 

그리고 아버지의 허가를 얻어 산으로 가서,

두 달 된 후에, 그녀의 집으로 돌아오니,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했다)(39-)’는 것입니다.

 

아마도 서원한대로 입다는 그의 딸을 바쳤으리라는 것입니다.

 

잔혹하다면, 잔혹입니다.

옛날 아브라함은, 그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여,

하나님께 드리려는 그 찰나에,

하나님께서는 한 마리의 양을 주시어,

이로 하여금 이삭을 대시케 하신 일이 있습니다(창세기21).

 

하나님은 어찌하여 같은 수단으로써 여기서 입다의 딸을 구원하지 않았을까요?

 

인신헌제(a human sacrifice), 성서가 엄금하는 바입니다.

입다가 만약 여기서 이 일을 했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서 주해자는 말합니다.

입다는 여기서 문자대로 그의 딸을 번제로써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옛날 아브라함의 예에 따라, 어린양이든가, 송아지로써 딸을 대신케 하여,

딸의 생명은 보존하고, 딸로 하여금 종생 동정녀로서,

하나님의 성전에 쓰이게끔 하였다고요.

혹은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39절을 그대로 해석할 때,

이것을 문자이외에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입다는 그의 서원대로,

그의 딸의 몸을 처분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서원 그것이 이미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그 성취는 조금도 이상히 여길 것이 못됩니다.

우리들은 입다의 미신을 동정하기로 하십시다.

그의 얕은 생각(imprudence)을 책하십시다.

 

그렇지만,

그의 성실을 귀히 여기고,

그의 뜻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제의 사실은 어떻다 해도,

희생(a sacrifice)의 사실은,

이를 가릴 수(은폐할 수)는 없습니다.

 

입다는 여기서 개선의 귀로에 있어서,

그의 한 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뽐내던 마음은 낮추어지고,

자랑하려던 마음은, 낮추어지고,

자랑하려던 마음은 겸손해졌을 것입니다.

 

입다는 이때, 참된 영예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 흐려지는 일 없는 기쁨,

부족함이 없는 성공,

눈물 없는 명예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입다는 유랑의 몸에서 일약 일국의 수령이 된 때에,

보상하려 해도 보상할 수 없는 손해에 조우한 것입니다.

 

(12:7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그러나 6년의 영화는 그에게 있어서 결코 비애 없는 영화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종생, 개선당일의 비극을 잊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암몬 사람의 왕을 노려보던 용사의 눈은,

종종 슬픈 희생의 사실을 생각해 내어,

뜨거운 눈물에 젖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때때로, 길르앗의 수령이 되기보다,

돕 땅에서 그의 무남독녀와 함께 은신하여,

행복한 날을 종생하기들 원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인생 최대의 수확물은 아닙니다.

의무는 행복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의무 때문에, 우리들은 때때로 행복을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무 때문에 입는 손실은, 결코 손실이 아닌 것입니다.

 

입다는 그의 행복을 희생하여, 그의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입다의 딸은, 그녀의 생명을 희생하여,

그녀의 아버지의 마음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희생에 희생,

인생은 희생입니다.

희생 없이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희생이야말로 인생의 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입다의 고통이 필요했고,

그리고 입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딸의 죽음이 필요했다면(그리고 나는 필요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성호)을 찬양할 것입니다.

 

입다는 무익하게 고생하지 않고,

그의 딸은 무익하게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 사람과 나라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38-40)’고 있습니다.

 

단순히 액고의 표창으로 볼 때, 이 규정은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감정만의 애곡은 아니었습니다.

귀한 주의가 포함되어 있는 애곡입니다.

 

입다의 딸은 나라 위해,

또 나라 위해 싸운 그녀의 아버지 위해,

그 처녀의 몸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해마다 그녀의 죽음을 기억하여

이스라엘의 딸들은 귀한 희생의 정신을 기른 것입니다.

 

성서에 실린(기재된)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 중에,

입다의 그의 무남독녀의 이야기는,

무량의 감개를 우리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 내촌감삼의 (19126성서지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