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의 혈통과 천부(賤婦)의 영예 4
(내촌의 주석의 4회 중 마지막 째)
말하지 마시라.
동양적인 고구의 암제는 우리가 인종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서 사도 베드로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전서 2:18-25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리스도교가 가족제도를 개량함은,
그 노예제도를 폐지함과 동일한 방법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먼저 웃어른(장자)으로 소자에 대한 의무를 깨닫게 하여,
마침내 위에 선 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아래 선자의 속박을 풀게 하는 데 있다.
말이 있다.
즉,
‘그리스도는 노예 소유주를 교화하여, 노예를 방면케 하셨다’고.
가장 온당한 개혁은 위에서 실행하는데 있다.
아래서 강요하여,
이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는 것은 실로 비상한 수단인 것으로,
그 해(害)란, 상하 격절(隔絶)하여
다시 이전(근본)대로 될 수 없게끔 하는데 이른다.
이는 구주제국(Europe)에 있어서의 사회개혁이라 일컫는 것이,
크게 사회를 유익케 함과 동시에,
또 해(害)를 천재(천세, 천년 장상)에 남긴 이유이다.
그러면 어른이 교화하기까지는,
소자는, 언제까지라도 참아야만 할 것인가라고 하는 자 있으리라.
오인(I, we)은 반드시 그렇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기억할 바 있다.
즉, 정의위에 입각한 가족제도를 가지고서
권리위에 선(입각한) 국가제도의 개량과 동시 할 것 아니다.
국가개량은, 인내(내인)와 순종(종순)을 요하는 일 많다.
하물며 가족의 개량에 있어서랴!
가령 그리스도교가 현금의 우리나라(일본) 가족제도를 가지고서,
인정에 위배(위반)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해도
(그런데 오인은 아직 그런 연유, 즉 사유를 아지 못한다),
곧 종래의 습관과 감정을 거슬러가며,
여권자권을 주장하여, 구미의 제도를 따르게 하려는 것 같은 일은,
가장 비 그리스도교적 소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네게 고하여 말할 것인가?
(즉) ‘성서는 명백하게 고구와 별거하는 것을 가르쳤으니,
너는 네 남편에게 청구하여, 너를 위해 새 살림처를 작만(마련)하게 하라고.
그리고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여다가 말하리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그렇지만 나는 네게 고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 한절은 그러한 교훈을 우리에게 전하려 한 것이 아니다’라고.
‘이룰지로다’라는 것은,
‘하라’의 명령은 아닌 것이다.
한학(漢學)선생에게 가서 물어보시라.
가라는 글자는 명령사가 아님을 네게 말해 주리라.
양학자(洋學者)에게 가서 물어 보시라.
그는 네게 말해 주리라.
‘영어의 Shall leave의 Shall은,
성서가 영어로 역된 때는,
명령적 조동사로서 쓰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그는 웹스터 대학전을 펴서 네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2권 277주 참조)의 독일어역에는,
Wird verlassen으로 역하여,
조금도 명령의 뜻을 두고 있지 않는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역(에베소서 5:31-)은,
‘떠나(떠날지라)’를 Kataleipsei로 역했다.
(에베소서 5: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는 그리스문법에서 윤리적 미래동사(Ethical future)라 칭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사실을 의미하고,
훈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떠나 한 몸을 이룰지로다’가, 너를 넘어지게 하거든,
너는 이것을 ‘떠나서라도 한 몸을 이룰지라’로 읽을 것이다.
그리하면 이 한절은,
네게 있어서 아주 위로 많은 1절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되리라.
즉, 네 사랑하는 네 남편은,
그 심정에 있어서는, 부모를 떠나서라도
너와 함께 하고자 생각하리만큼
너를 사랑하는 가장 친밀, 가장 친애하는 자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그 부모에 대한 의무와 정의가 있다.
그는 네가 그를 도와 그의 노부모를 옹호(보양)할 것을 구하는 것이다.
네 가장 사랑하는 남편을 보육(nurture)한 부모,
이는 실로 네 자신의 부모가 아니랴!
네 남편의 사랑 때문에 너는 기꺼이 이 책무에 임할 것이다.
아아, 룻의 숙덕을,
네 귀감(a paragon)이 되게 하라.
그녀는 유대인의 이상적 부인이면서,
또 우리 일본국의 이상이다.
그녀처럼 진실하게, 그녀처럼 순순(종순 obedient)히,
그녀처럼 근면하게, 그녀처럼 겸손하게,
네 생애를 갖게끔 하라.
그녀 같은 자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손녀이다.
그녀 같은 이가 진정한 그리스도교 부인이다.
그녀는 사도 베드로의 귀부인에 대한 정의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베드로)는 이르기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 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베드로전서 3:3-4)’
그렇다.
보아스는 모압의 부인 룻을 취하여,
모세의 율을 범치 않았다.
아니,
엘리멜렉의 친척 아무는,
그녀를 피하여, 도리어 모세의 율을 범했다.
이교신도와 혼인 않도록 하라는 정신은,
물론 마음의 이교신도를 말하는 것임은,
나의 변명(vindication)을 기다리지 않아도 분명한 것이다.
우리들은 바울의 말씀 따라,
불의와는 짝하지 말 것이다.
(가령 그 불의한 자는 정식의 침례를 받은 자라해도).
불신자란 마음에 하례를 받지 않은 자를 말하고,
신자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성지)에 따르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판결을 항상 윤리적이 되게끔 하라.
그리하면 우리들은 잘못을 범치 않으리라.
* 내촌감삼의 (1893년 12월, 초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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