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거듭난 삶 2024. 8. 2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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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얻는 구원 3

 

성 경: [10:13-16]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

 

(2:16-21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와'(Jehova)''(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구원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Bruce).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Harrison).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Calvin).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세 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을 중요시하고 있다(Bruce).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 NIV)를 의미한다(Lenski).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서 전령은 왕이 명령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는 역할만 하였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지에서 사용하였다.

 

(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은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Hendriksen).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Bruce).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2)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 면에서 예언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 진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도자로서 전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Godet).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벨론 포로 생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 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 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10: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고전 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바울은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 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친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그리고 역사는 그 예언을 확증해 왔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혹자(Calvin)는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을 우리 안에 조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 계시에 의하여, 구원은 내적으로 소명 받은 자, 즉 선택받은 자에게 국한되는 것을 보여준다(Cal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