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함받지 못한 자
성 경: [롬 11:7-10]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롬 11: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 그런즉 어떠하뇨 -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의 핵심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린게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가 있다는 데에 있다.
이제는 그 남은 자들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된 소수, 즉 '남은 자'에 관하여 말한 후,
(1-6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제 대상을 바꾸어 이스라엘의 완악한 다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행위가 수단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로는 구원이 불가능했다.
▶ 구(求)하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제테이'는 현재 시제로 기본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상태나 동작을 의미하므로 이스라엘의 구하고자 하는 태도가 반복적으로 꾸준하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독특한 용법이 사용되었다. 같은 문장 속에 나오는 또 다른 동사들('얻었다'와 '완악하여졌다')이 시점상 나중임에도 불구하고 과거형으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구하는'의 헬라어 '에피제테이'는 역사적 현재(Historical Present) 용법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생생하게 구사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결국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일반적으로 '행위를 통한 칭의'를 매우 열정적이고 반복적으로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 그 남은 자들은 완악(玩惡)하여졌느니라 - 본문의 '완악하여 졌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로데산'은 '포로오'('두꺼운 가죽으로 가리다')의 단순과거 수동태로 어감이 강하다.
이에는 인간 본래의 감성(感性)이나 도덕성의 근원을 상실했다는 뜻이 포함된다.
결국 그들은 오성(悟性)이나,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간하는 양심의 기능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노력해왔어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본절을 통해 바울은 보여주고 있다.
택하심을 받지 못한 '남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인데 그 결과로 그들은 완악하게 되었다.
[롬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
바울은 모세와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강퍅했던 것과 같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에도 그 백성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기록된 바'에 해당하는 구약성경은 신 29:4과 사 29:10에 해당하며,
(신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사 29:10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
좀 더 정확하게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인용한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Calvin).
(행 28:26-27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또한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사용되었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막 4: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눅 8: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요 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나타내는 본 구절의 특성으로 봐서 유대인의 상태는 도무지 구원 섭리와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대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13절 이하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 오늘날까지 - 이 말은 '이날까지'라는 의미인데, 바울은 '이날'(헤메라 타우테스)을 '오늘날'로 변형시켜 인용하였다.
이처럼 바울이 표현을 변형시킨 이유는 말하고자 하는 것의 주안점이 과거 구약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 당시에 있기 때문이다.
▶ 혼미한 심령 - '혼미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뉴세오스'는 '찌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카타뉴소'에서 나오는 말이다.
(행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러므로 이 말은 너무 많은 자극으로 말미암아 감각이 무디어진 마비 상태를 말하고(Robertson),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처럼 어리둥절해진 것을 의미한다(Lenski).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즉 이 말의 참 의미는 그 말씀으로 많이 자극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는 것이다.
▶ 보지 못할 눈 - '눈'이란 육체적인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분별력을 의미한다.
(사 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눈은 우리 몸의 감각 기관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외부 세계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인지(認知)한다.
그러므로 눈이 멀었다는 말은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능력이 결정적으로 상실됐다는 말이다.
▶ 듣지 못할 귀 - 바울은 믿음이란 들음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들음이란 믿음에 이르는 통로이며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수단이다.
▶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 호 데오스'는 유대인들의 심령이 혼미해지고 눈과 귀가 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는 것이다.
(1:21-3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 또 다윗이 가로되 - 본절은 시 69:22의 인용이다.
(시 69:22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사도 바울은 어순이나 표현에는 약간의 변형을 취했으나 그 의미는 변질시키지 않았다.
먼저 본 절의 앞 구절을 70인역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 절 게네데토 헤 트라페자 아우톤 에이스 파기다 카이 에이스 데란 그들의 식탁이 올무와 덫이 되게 하시고, LXX 시 8:23 (개역 게네테토 헤 트라페자 아우톤 에노피온 아우톤 에이스 파기다 69:22)
그들의 식탁이 그들 앞에서 올무가 되게 하시고, 바울은 '그들의 목전에'(에토피온 아우톤)라는 구절은 빼고 '덫으로'(카이 에이스 데란)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을 '올무'라는 말 뒤에 놓음으로써 '올무'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시키고 있다.
▶ 밥상 - 밥(음식)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밥상' 위에 있는 음식을 먹음으로 연명(延命)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밥상'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밥상'은 단순한 '밥상'이 아니라 '그들의 밥상'이다.
즉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진 '밥상'이다.
따라서 이 '밥상'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생명의 밥상', 곧 구원을 상징한다.
(창 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 6:3-4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밥상'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으로서 유대인의 땅 나사렛에 오셨기 때문이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이 '밥상'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인 '밥상',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거치는 것'이 되었다.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 올무와 덫과 - '올무'는 새나 짐승을 잡는 올가미를 나타내는 고대 단어이다.
'덫'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데란'은 야생 짐승의 사냥을 나타내는 고대 단어였으나 후에는 덫을 뜻하게 되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비슷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열거함으로써 그 누구도 그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 '거치는 것'은 덫 혹은 올무의 의미를 갖는다.
본 구절 역시 70인역과 비교해 보면 아래의 도표와 같이 도치되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동의어에 해당하는 말을 재차 언급해줌으로써 더욱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단어는 앞 구절의 두 단어와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를 설명하는 말로서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모든 유혹과 멸망의 방법을 의미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의 파멸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다.
한편 '보응'은 70인역에는 없는 말이지만 중요한 맥락은 놓치지 않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셨다는 뜻과 유대인들의 어리석고 강퍅해진 그대로 하나님께서 버려두셨으므로 버려둔 그 자체가 보응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되게 하옵소서'(게네데토)는 헬라어 문법에 있어서 명령형이지만, 하나님께 간구하는 투이다.
이 간구는 '보응' 뿐만 아니라 앞에 서술된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에도 연결된다.
바울이 이 글을 인용한 것은 8절의 내용, 즉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한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는 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롬 11: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 '저희 눈은'이란 말은 8절의 '보지 못할 눈'을 연상케 하는데,
8절에서와는 달리 귀와 심령이 빠지고 '눈'만이 언급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시 69:23(LXX 68:24)을 그대로 인용했다.
(시 69:23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8절에서 '눈'과 '귀'를 열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눈'만을 이야기한 것은 눈이 몸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며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눈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마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흐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티스데 토산'은 '스코티조'('어둡게 하다')의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법으로 심각하게 저주하는 표현이다(Robertson).
여기에서의 눈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시편 기자의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현재적 심판에 적용했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오히려 자연양심(natural good sense)을 가진 이방인 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더 이해하지 못했다(Godet).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깨달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은 곧 최대의 불행이었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 등이 굽는 것은 노예들이 상전 앞에서 두려움을 갖게 될 때 취하게 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이 완악해져서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排斥)하는 한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의 종들이었으며 율법 선생 곧 랍비들에게 얽매어 있는 노예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이 없이 두려움에 거하는 존재들이었다.
이와 같은 징벌은 그들이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에 받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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