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거듭난 삶 2024. 9. 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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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구원 2

 

성 경: [11:17-24]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 돌감람나무는 야생 감람나무로서

 

(1) 원래부터 돌감람나무 종류가 있고,

(2) 원래는 좋은 감람나무였으나 주인의 손질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있다.

 

통상적으로 감람나무를 접붙이는 방법은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이를 거꾸로 비유한다.

 

이처럼 참감람나무의 가지 일부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였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이 원가지가 아님을 명백히 한다.

 

아마도 바울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뿌리에 연결되어 좋은 진액을 받아 품질이 낫게 변화되는 것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Murray).

 

이러한 접붙임으로 원가지와는 전혀 무관하던 돌감람나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 이방 그리스도인도 이스라엘 족장이 누렸던 구속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주요한 것은 진액이라기 보다는 그 뿌리이다.

 

즉 이스라엘과 무관했던 이방인이 참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12족장과 맺은 구원의 언약과 연관된다(Hendriksen, Lenski).

 

'참감람나무'16절의 '처음 익은 곡식'과 통하는 것으로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모든 혜택의 근원(根源)을 상징한다.

 

이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 유대인들의 일부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들을 향해 우월감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다고 충고한다.

 

여기서의 '가지'는 꺾여진 가지로 원가지에서 벗어난 유대인을 말한다(Murray, 19, 20, 22, 24).

 

(19-20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방 그리스도인은 이들에 대해 자긍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긍(카타카우코)이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높이며 자랑한다는 뜻이다.

 

당시 로마 교회의 구성원 중 일부가 영적 자만심을 가지고 동료 유대인 신자들을 업신여기는 일이 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원가지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자만심에 빠져 유대인이 원가지에서 꺾여졌다고 주장해도 자신들이 뿌리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가지들을 지탱시켜 주고 가지들에게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뿌리와도 같기 때문이다(Calvin).

 

여기서 강조된 ''()가 단수형으로 쓰여 마치 개인을 대상으로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울은 교회에서의 이방적 요소를 하나의 단위로 다루고 있는 것뿐이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복음 거부로 인해 이방인 교회가 탁월한 위치에 있게 됨을 가리킨다(Harrison).

 

그러나 바울은 이것으로 인해 교만과 자만심을 갖게 하지 않도록 이방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구원의 기원을 생각하도록 한다.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는 '꺾이운 가지''접붙임을 받은 나'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Murray, Dunn).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예증은 이방인들을 교만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려는 것이다(Calvin).

 

 

[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옳도다 - 이에 해당하는 '칼로스''바로 그렇다', '맞다'의 뜻으로 앞절의 내용을 시인하는 것이다.

 

구속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보장되었던 것이, 이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유동적으로 적용됨으로 인한 구원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긴장을 보충 설명하려는 것이다(Dunn).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 유대인이 버림을 받은 것은 불신 때문이고, 이방인이 접붙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지 아니하므로''믿으므로'가 모두 여격으로 쓰여져 이유, 수단, 원인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인해 두 가지 상반되는 현상이 나타났을 뿐임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은 불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

 

(9:30-3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나 이방인은 서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으므로'가 강조된 것은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믿음인 것을 보여준다.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 헬라어 본문에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있는데,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자긍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를 제시한다.

 

'원 가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신 클라돈'은 본래 자연적으로 생성된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이어야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고, 원뿌리에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 흠정역(KJV)에는 '너도 남기지 아니하실까 유의하라'로 되어 있다.

 

'유의하라'(take heed)는 표현은 공인 본문(TR)에 의거해서 번역했다.

 

공인본문에 의하면 이 구절 앞에 '메 포스'('하지 않을까')가 있다.

흠정역(KJV)은 이를 따라 20절의 '두려워 하라'와 연결시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것은 원 가지도 믿음을 떠났을 때 꺾어 버렸는데, 접붙여진 가지가 믿음을 버렸을 때 남겨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 이는 하나님의 품성 안에 오묘하게 조화(調和)를 이루는 것이다.

 

실패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엄위를 경험하고 있지만,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얻은 이방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누리고 있다(Harrison).

 

'인자'의 헬라어 '크레스토테스'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한다.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한편 이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엄위가 제시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한 것이다(Murray).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 '넘어지는'의 의미는 완전히 넘어져 믿음에서 타락했음을 의미한다.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심판을 행할 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약속의 백성마저도 제하여 버리는 엄위의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 앞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엄위를 말하나 이제는 인자에 거할 것을 권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불신앙으로 인해 계속되며,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반응으로 인해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 본절에서 24절까지 이스라엘이 회복될 가능성에 대하여 말한다.

 

전에 그들이 원 나무에서 잘리운 이유는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회복은 오직 믿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이 접붙임 입는 조건이다.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이방 그리스도인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는 그 대상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변덕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응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Harrison).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 본 구절에서는 일반적인 원예 상식을 벗어난 특수한 경우를 언급하는데, 바로 꺾여진 가지를 다시 접붙인다는 것이다.

 

일단 꺾여진 가지는 재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불가능한 예화를 사용하여 유대인의 회복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문자 구조상으로도 잘 나타나는데, '능력'에 해당하는 '뒤나토스'가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구약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깁보르'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세운 언약에 신실하다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9:32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열조와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열왕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당한바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32:18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이방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

 

이방인이 구원얻게 된 사실을 감람나무 비유를 통해 요약 정리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가능한 일임을 논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재접목은 이스라엘 대신 이방인만을 은혜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유대인도 이방인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 유대인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일종의 예정된 조화(pre - established harmony)라고 하는 본질적인 유사성(類似性)이 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유대인들의 회복이 성취될 터인데 이는 이방인의 동참보다 쉬워질 것이다(Godet).

 

'얼마나 더'의 헬라어 '포소말론'은 문맥상 '얼마나 더 쉽겠는가'(How much more easily)라는 의미임이 확실하다.

 

하나님은 유대 민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상관없이 당신의 뜻대로 믿고 행하는 자를 자녀로 삼아주신다.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