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거듭난 삶 2024. 10. 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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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의 짐을 져 주라

 

성 경: [15:1-6]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강한 자가 - '강한 자'의 헬라어 '호이 뒤나토이'는 보통 '능력있는 자', '을 할 수 있는 자', '힘 있는 자'를 뜻하나 여기서는 '영적으로 강한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논쟁에서 자신을 강한 자의 편에 넣어 말하고 있다.

 

마땅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페일로멘''하여야 할 것이다'(should)라는 권고의 의미보다는 '해야만 한다'(must), '의무가 있다'(ought)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즉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권고나 권면으로써 수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 '약점'(타 아스데네마타)'연약함'의 의미로 쓰이며, '담당'(바스타제인)은 갈 6:2에 나오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다(bear)'와 같이 '짐 따위를 지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이와 같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여러가지 약점들을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때 사랑 안에서 행해야만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열쇠이다(E. F. Harrison).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에 대해서 그들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연약한 자는 시험에 빠져 낙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강한 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힘쓰며 약한 자 앞에서 그들의 강함을 뽑낸다면 약한 자는 믿음에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모든 성도들의 기쁨을 위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은 것처럼,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강한 자도 연약한 자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 이 말씀은 단순히 남의 기분을 맞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남이 원하는 바를 맹목적으로 좇는 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Hodge).

 

이는 타인의 영적 각성에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의미이다.

 

성도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유익을 구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울의 삶이기도 하였다.

 

(고전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 타인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이루어야 할 목표는 ''()을 이루고 ''()을 세우는 일이다.

 

'선을 이루고'의 헬라어 '에이스 토 아가돈'은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서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행위'를 말한다(Murray).

 

즉 성도들이 약한 형제들의 약점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면서 살아야 할 원칙을 말씀한 것이다.

 

또한 '덕을 세우도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오이코도멘''집을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지혜와 사랑, 은혜와 거룩에 이르도록 믿음의 성장을 촉진케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전자가 내적 목적이나 가치를 지향하는 반면 후자는 외적 목적을 지향한다(Bengel).

 

결국 이것은 사람들의 인기나 기분을 맞추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라는 의미이다(Robertson).

 

 

[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왜냐하면'(가르)을 사용하여 앞절의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성도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경험하셨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며 모든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는 비록 많은 사람의 반대를 불러 일으켜 자신에게 죽음이 초래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셨다.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시 69:9의 인용이다.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69편은 고난의 시로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들을 보응할 것에 대한 예언이다(F.F. Bruce).

 

이 인용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의 결과로, 비난과 모욕을 받아 죽음을 당하시리라는 것이다.

 

이렇듯 바울은 시 69:9을 인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품고 그것을 실행하다 보면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에 부딪혀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지만 이 때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시 69:9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현상 자체는 당시의 교회가 구약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뚜렷이 반영해 준다(E.F. Harrison).

 

바울이 앞절에서 시편에 나타난 기록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여기서 다시 성도들에게 적용시킨 것은 시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경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모든 성도들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성경을 상징하는 진정한 목적은 영생에 대한 위대한 소망을 갖는데 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본문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위해서 '인내''성경의 안위(安慰)'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소망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은, 인내가 영광스런 영생으로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라면, 성경의 안위는 그러한 소망을 얻을 수 있도록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E.F. Harrison).

 

소망을 견지하는 방법으로서 전자(前者)가 주관적이면 후자(後者)는 객관적이다(Lenski).

 

'인내'의 헬라어 '휘포모네'는 고난당하는 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용맹스런 군인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Findlay).

 

이러한 자세는 약한 자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는 자들에게 필요하다(Lenski).

 

약한 자들은 한 두 번, 도움을 받는 것으로 바로 서지 못하므로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안위'의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보통 '권고', '위로'를 뜻한다.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에 당신을 믿는 성도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고 확신케 해주심을 의미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안위가 성경을 통하여 온다는 사실과 이 안위는 우리가 믿음으로 소유한 영생을 소망하는데 힘을 주고 확신을 갖게 해줌을 강조하고 있다.

 

 

[15: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 인내와 안위는 성경을 통하여 오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다(E.F. Harrison).

 

이 같은 인내와 안위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하고, 또한 현재에는 형제간에 사랑과 협조를 갖게 한다.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크리스톤 예순'은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특성과 모범을 본받아'라는 뜻이다(Robertson).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으로,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표준이며 모본이 되신다.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 본절은 희구법으로 미래의 소원을 나타내는 관용어적 표현이다(Robertson).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함으로써, 서로 일치된 정신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같이 모든 일에 같은 확신과 생각을 갖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한 마음과 한 입으로 - '한 마음'의 헬라어 '호모뒤마돈''같은 심정을 가진', '만장일치로' 등의 의미이며, 바울은 본절에서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 입으로'(엔 헤니 스토마티)'하나의 일치된 고백'을 뜻한다(E.F. Harrison).

 

이것은 일치된 신앙에 대한 생생한 표현으로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항상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호칭한 것은 하나님(호 데오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당시 초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한 표현이었다.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당시 사도들과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구원론적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 전부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독립적으로 혼자서 구원을 이루신 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구원의 예정 가운데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분임을 의미한다.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1:26-27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론적 칭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중심이 되며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다(Lenski).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영광'의 헬라어 '돝사제테'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너희가 계속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는 뜻이다(Robertson).

 

성도들 개개인의 삶의 목적이나 교회 일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연합의 중요성과, 또한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J. Calvin).

 

실로 성도들이 서로 마음과 뜻이 일치되지 못하고 불화와 갈등 속에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일치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참된 영광을 돌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