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근대인의 성서관에 말한다

거듭난 삶 2024. 10. 2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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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회의 건설자

 

로마서 161-16

 

 

근대인의 성서관에 말한다.

 

성서 중에는 특히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말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것 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중에 있다.

 

과연 그러한가?

 

만약, 그러하다면, 성서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구별하고자 하여, 필경 성서를 다른 글()과 구별 없는 글() 되게 하는 것이다.

 

성서는 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가장 건조 무미하다고 생각되는 말씀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중에 깊은 진리를 포함하는 것이다.

 

성서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라는 것의 일례로서 종종 인용되는 것은, 로마서 제16장이다.

 

본장은 이것을 일독하면 단지 인명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에게 문안하라하고, 즉 오늘의 말로서 하면 누구에게 잘 좀 전해주기 바란다는 인사말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일상의 용어 가운데 어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지만 조금 이것을 연구하면, 본장에 나타난 27개의 인명이 많은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첫째로, 바울은 자기 친구의 이름을 말하는 때에, 반드시 그 사람이 그리스도 위해 힘쓴(수고한) 공로를 들고 있는데 주의해야 할 것이다.

 

옳다, 공로이다. 그렇다고 나라 위해, 또는 사회 위해서는 아니다,

물론 자기 위해서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한 공로이다.

 

그들 각자가 자기의 지위에서 그리스도 위해 힘쓴 공로를, 바울은 하나하나 알고 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눈은 퍽 예민했다.

 

그는 먼저 이 서간을 가지고서 고린도에서 로마에 보내려는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에 대하여 말했다,

 

너희가, 성도로서 한 일 같이, 주안에서 그녀를 받고, 그 구하는 바(필요로 하는 것)는 이것을 도우라. 그녀는 전에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또 나도 도왔다.

 

주 안에서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또 바울도 도왔다는 소개의 한 마디를 얻어, 그녀는 장도의 여행 끝에 로마의 형제자매들에게 따뜻하게 영접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갈 수가 있었다.

 

다음에 바울은 말했다.

 

원한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우리와 함께 일하는(동역자)이다. 또 내 생명 위해 자기의 머리를 칼 아래 두었다. 다만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역시 그들에게 감사했다. 또 그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브리스가 및 아굴라의 부처는, 고린도에서 처음으로 바울을 만나 이를 돕고, 후에 또 에베소에서 그와 함께 신앙위해 싸운 염색물 업자이다.

 

그들은 어떤 때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그 생명을 내 댄 일도 있었다.

또 그들은 자기의 집을 개방하여 교회로 사용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 위해 그 생명 및 재산을 모두 제공한 신앙의 용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어디에 있어서도 아주 희유하다. 그들은 실로 교회의 명예이다.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그들의 이름과 함께 써넣은 몇 마디 말은, 교훈의 말로서 하는 것 이상으로 힘찬 교훈이었다.

 

그는 또 에배네도에 대해서도 또 일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시아에 있어서의 처음 맺는 열매이다라고.

 

한 동네 또는 한 마을에서도,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가 얼마나 곤란한 것인지는, 경험 있는 자가 잘 아는 바이다.

 

이제는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의 크리스천의 수는 십만으로서 세기에 이르렀지만, 최초에 신자로 된 사람이야 말로 특별히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 그리스도를 위한 공명은 전쟁에 있어서의 이른바(소위) 선두 적진돌입의 창군의 공명에 비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에배네도는 소아시아에 있어서의 최초의 크리스천의 명예를 취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 위해 많은 수고를 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수고 즉 고투(苦鬪)이다. 짧은 일언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복음위해 세상에서 배척된(싫어한) 사도들에 대해 특별한 동정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부인임을 표시하고 있다.

 

또 나와 함께 갇힌 자로 되었던, 내 친척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 중에 명성 있는 자이다. 나보다 앞서 그리스도 안에 있은 자라.

 

친척이란, 혹은 동인종의 뜻일 것이라고 하나, 이것을 문자대로 해석함의 명백함만 같지 못하다. 바울의 친척이 () 넓었던 것은 사도행전 등에 의해 헤아려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친척중, 이미 그의 앞서 크리스천으로 되어 있은 자 있어서, 사도들 중에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일이야 말로, 다만 그 사람들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또 바울의 생애에 대해 많은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기타, 암블리아, 우르바노 및 스다구등에 대하여 각 일언을 가한 후, 10절에 이르러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단련된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성서에 정통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년 교회에 출입하여 제명사의 소식에 정통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을 쌓은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오랫동안 악마와 싸워, 신앙의 승리를 얻은 사람이다.

 

그리고 귀한 것은 실로 그러한 크리스천이다.

이 경험을 가지는 일없이는, 아무리 신학의 지식에 부하다 해도 사람을 움직일 수는 없다.

 

버년(4250, 292역주),

 

어떤 때 한 목사의 언설을 들은 후, 그 감상을 토로하여 말한 일이 있다.

그는 학자로서는 우수해도, 아직 악마의 싸움에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우리로서 보면,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단련된 사람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 바울 자신이 경복 할 만한 값어치 있는 크리스천이 로마 교회에 적지 않게 존재했던 것이다.

 

나아가서 버시(부인)의 이름을 말하는데 이르러, 그는 특히 내 사랑하는이라는 말을 피하여, ‘사랑받는이라고 했다. 이는 작은 일이라고 해도 결코 무익한 예의는 아니다.

 

위인 바울의 세심한 신사적주의는 그러한 곳에 보이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존경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자의 태도이다.

그리고 이는 또 우리들이 성서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진리의 하나이다.

 

다음으로 주께 택함 받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하고, 그는 다시 부언하여 말하기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실로 깊은 정애 담긴 한 마디이다. 모자 모두(함께) 주께 택함받고, 특히 어머니는 늙은 어진 신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아들을 사랑함과 함께 또 바울도 자식같이 사랑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 한 노부의 친절을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로마서 중, 인류 및 만물의 구원에 관한 최대문제를 논하여 온 후, 그 친구에게 인사하려 하는데 있어서, 곧 그러한 델리케이트한 말을 발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우주적 문제로서 가득 차 있다해도, 또한 한 그릇(한잔) 물의 친절도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을 우리나라(일본) 오늘의 정치가들에 비교할 때 그 차이는 실로 얼마랴?

 

당당한 신사로서 부인을 모멸하고 노은을 무시함의 죄야말로 실로 중대하다.

그들은 바울 같은 하-트의 흔적조차 갖지 않는 것이다.

 

바울의 위대한 생애는 이 한마디 있음으로서, 전혀 별개의 방면에서 이것을 관찰할 수가 있다.

 

사람의 이름을 말함에 있어서 반드시 그 흠점을 세는 것은 불신자의 특징이다.

바울이 그 형제의 이름을 드는데 있어서, 이에 따른 것은 반드시 그 사람의 미점(美點)이었다.

 

만약 로마서 제16장이 다른 아무것도 가르쳐 주는 바 없다 해도, 이 한 가지는 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 에머스트 대학 전 총리 실리(10395역주)선생 같은 분은 또한 이 정신을 가진 이었다.

 

어떤 일본인이 선생을 통해 영어교사를 고용하고자 한 때, 선생은 자기의 학생의 미점을 열기한 명부를 퍼서 하나하나 이것을 소개했다고 한다.

 

내가 한 사서한 선사가 인정받는 것은, 내게 대한 깊은 사랑의 표창으로서 감격을 자아내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 친구에 대하여 그러한 사랑을 가진 분이었다.

 

둘째로 본장에서 배울 것은, 어떠한 사람들이 로마교회의 건설자였는가 하는 일이다.

 

본장에 열기된 27의 인명 중, 하나도 지명 교사의 이름을 볼 수 없다.

이는 모두 오늘의 이른 바 평신도이다.

그리고 한 통의 서간이 잘 그들 사이에 회독된 것을 생각하면, 즉 그들이 하나의 단체를 이루고 있었던 일 명백하다.

 

로마 교회의 건설자는 실로 평신도였다.

당시에 있어서의 세계의 중심지에 복음을 전한 자는, 염색업자(천막제조자)인 브리스가 및 아굴라 부부였다.

 

사도 바울이 그 땅에 건너가기 전, 이미 그들 평신도 있어서, 교회의 지반을 만들었던 것이다.

 

27개의 인명 중, 9내지 10을 차지하는 것은 부인의 이름이다.

 

이는 또 특별(현저)한 사실이다. 당시, 부인은 무력한 자 같이 생각되어 중시되지 않고, 사업은 모두 남자가 이에 대처하던 때, 다만 복음의 선전에 있어서 많은 명예는 부인에 돌아갔던 것이다.

 

브리스가라든가, 마리아라든가, 또 드루배나 및 두루보사 자매, 버시, 루포와 그 어머니, 이는 모든 부인이었다.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하여, 아내의 이름을 앞세운 것으로서, 전도상에 있어서의 그녀의 공로가, 남편보다 나은 것임을 알 것이다.

 

그리고 복음의 선전(전도)에 관하여, 종종 가장 중요한 지위에 서서, 없지 못할 활동을 한 자가 부인임은, 많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평신도로서 더구나 다수의 부인을 곱은 로마 교회의 건설자 중에는 또 적지 않은 노예가 있었다.

 

당시, 노예인 남녀 사이에 좋은 크리스천 있었던 것은, 빌레몬서에 비추어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라틴어 학자의 의하면, 본장에 기록된 암블리아, 우르바노, 루포, 허메, 빌로로고, 율리아 등은 가장 보통의 노예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즉 바울이 그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라고 한 노부인도 또한 노예의 어머니로서,

이른바 뒷거리 빈민가 거주의 몸으로서 위인 바울의 시중을 했던 것이다.

 

그렇듯 시중한 부인, 그녀를 자기 어머니로 부른 바울은, 양자 모두 탄칭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있어서도, 사회의 하층에 위치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잘 하나님을 아는 자 있음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면 초대의 크리스천은 지위 낮은 자 뿐이었는가 하건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이들 인명 중에 또 귀족의 이름이 있다.

 

아리스도블로는 유다의 왕족의 이름이다.

만약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아리스도블로(아리스도불로스)라면, 로마 제실에 쓰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낭당(가신, followers) 사이에 크리스천 있었음은 명백하다.

 

또 만약 이것이 헤롯의 손자인 아리스도블로가 아니라해도, 한가지로 명문의 집이었음에 틀림없고, 그리고 그 집 가운데 이미 신앙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나깃수는 로마의 유명한 고관의 이름이다.

그는 글라우디우스 황제(11198역주) 총신으로서 아그립파(11201역주)에게 투기되어 살해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집에 또 이미 크리스천 된 자가 있었던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세계의 중심에 있어서의 최초의 교회였다.

그리고 이것을 건설한 자는 평신도로서, 그 중에도 다수의 부인 있었고, 또 노예 있었도, 또 명문의 집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 다만 주 안에서 하나의 영적 단체를 만들고, 그리고 사도들이 이르기 전에 자기들이 복음의 증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지니어스(genius, 자질)가 나변(那邊)(where)에 있는지를 살필 수가 있다.

 

이렇듯, 성서 중 가장 무의의한 듯이 보이는 한 장에도 사실로서 하는 깊은 교훈이 있다.

 

하나님은 다만 말씀만으로서 진리를 전하지 않으신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복비으로서 하는 사실적 교훈은 또한 성서가 전하는 대진리이다.

 

로마서 16장은 이 의미에 있어서 또한 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중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상에 글()은 아주 많이 있다.

칼라일의 글 있고, 톨스토이의 글 있다, 바낑의 글 있고, 이는 모두 사람의 쓴 글이다.

 

하지만 여기에 유일한, 그들과 전연 그 성질을 달리하는 글이 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쓴 글 이것이다.

우리들은 이 글을 수중에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닌가?

 

성서가 그 일언일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 우리들은 비로소 대담해질 수 있는 것이다.

가령 근소한 기자의 오류 또는 번역의 착오는 있다 해도, 성서 그것은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부언(附言)

 

이때 로마에 로마교회는 없었다. 그러나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회당은 아니다. 제도는 아니다. 신앙개조는 아니다.

23,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교회는 있는 것이다.

 

초대의 교회는 신자의 집에 있었다. 특히 평신도 집에 있었다.

아굴라부처는 이르는 곳마다 그 지을 교회의 소용으로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고린도에 있던 때도, 로마에 있던 때도 한가지로, 그 집을 교회로 했다(고린도전서 16:19).

 

기타, 라오디게아에 있는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있었다(골로새서 4:15).

또 빌레몬에게도 그의 집안에 교회가 있었다(빌레몬서 2)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가 교회를 건설하기 전에, 평신도인 아굴라 부처의 집에 최초의 로마 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은 전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이름 있는 신자를 열기하는데 있어서 베드로의 이름을 들지 않았다.

이는 베드로가 로마교회의 건설자가 아닌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교주(敎主) 정치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성서는 그 로마서 제16장에 있어서……주의 하라,

특히 로마서에 있어서……로마 교회의 건설자 중에 베드로의 이름을 들지 않고서, 법왕정치의 근저를 전복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 있어서는 그 불어무언까지가 큰 진리를 전하는 것이다.

로마서에 베드로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음으로서, 그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은 근본부터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있는 그 루포는, 예수의 십자가를 질머진 구레네의 시몬이라는 것은, 예부터의 전설이다(마가복음 15:21참조).

 

마가복음은 성 마가에 의해 로마 사람 위해 로마에서 기록된 복음서라는 것이매, 그는 로마에 있는 형제 루포에 대하여 특별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특히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의 시몬이라고 하는 자’(15:21참조). 라고 상세하게 쓴 것이리라.

 

그렇다고 하면, 아버지가 주 예수 위해 진 치욕이 아들을 감동하고, 그 또한 주의 선한 종으로 된 것이리라.

 

그리고 루포의 어머니라고 한 이는 구레네의 시몬의 아내인 것으로서, 이 관계에서, 그녀가 바울을 아들같이 사랑한 그 이유를 살펴 알 수가 있다.

 

성서가 기록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그 간단한 기사 내에 많은 역사가 담겨져 있다.

 

천하 어디에서라도,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부인이 행한 일도 전해질 것이다’(14:9참조). 라고 주께서 막달라의 마리아에 대하여 한 말씀 같이, 구레네의 시몬의 이름도 또한, 그 아들 루포의 이름과 함께 예기치도 않았으나 성서에 의해 길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바울은 명가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친척 관계는 넓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를 위험에 건져낸 자는 바울의 누님의 아들’(사도행전 23:16)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친척 중, 그보다 앞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된 자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바울)같은 이는 쉽게 신종교를 믿을 이는 아니다.

그리고 친척 중 나사렛인의 무리로 된 자 있음을 볼 때, 그는 얼마나 분개했으랴!

하지만,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기 위한 한 수단이었다.

 

하나님은 안에서 밖에서, 다소의 사울을 그 성자(聖子)에게 끌어다가 붙이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