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2
성 경: [눅 4:20-25]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눅 4: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
읽기를 마치신 예수는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다.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의 이 '맡은 자'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된다.
한편 낭독자가 성경 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된다.
랍비적 전통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好意)로 시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 나고 만다.
[눅 4: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 오늘 - '오늘'을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은 다분히 긴박감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 있는 그 날로 볼 수 있으며,
(사 61:1-2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둘째,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오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이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인 것이다.
[눅 4: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 '증언하고'는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수가 말씀을 증거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
(20: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즉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를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눅 4: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 본래 이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께서 메시야 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청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 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다.
(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는다.
[눅 4: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 말은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 된 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었다.(12:37;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 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다.
(왕상 1:36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
(민 5:22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를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를 마르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에서의 환호로서 적극적 응답을 의미하며,
(계 5: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2) 기도와 송영에서 아멘은,
(갈 1: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엡 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딤전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 처럼 예수가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 이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는 오히려 냉대 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자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다는 것이다.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구약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준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Le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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