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국희가 만난 자동차 박사 박광종]
12살 때 차 반토막 사고 목격 그 후로 관심은 오로지 차…자료보고 충격에 잠 못자기도
안전한 자동차 만드는데 일생 걸어…필생의 역작 '에어 범퍼' 개발
충돌 실험 겁나 돼지에 안전벨트
아직 차가 없다는 말에 박광종(朴光鐘·50)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2억원이 넘는 캠핑카부터 신진 자동차의 67년식 '퍼브리카'까지 55대의 차를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그럴 만도 해보였다. 그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얼마 전 수리했다는 포드 7800㏄ F350 트럭이 으르렁대며 튀어나갔다. 미 공군 송탄 비행장에서 전투기를 유도하던 차라고 했다. 그는 "차량 내부 컴퓨터(ECU)가 고장 났는데 워낙 최첨단이라 공군도 이유를 모른 채 내게 맡겼다"고 했다.
그는 12년째 '데이비드 에어범퍼'를 운영하고 있다. 외제차, 방탄차, 방송 중계차 같은 특장차를 전문 수리하는 회사다. 그는 "여기서도 못 고치면 그 차는 99% 폐차된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차(車)의 무덤'은 충남 논산의 한적한 국도변에 있었다. 벤츠 S600부터 연예인이 타는 밴들까지 엔진이 분해된 채 알몸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박씨가 수집한 55대 차량이 100m에 걸쳐 일렬종대로 서있었다. 첫 삼륜차, 가장 오래된 캠핑카 등 올드카의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 ▲ 박씨는“밟으면 가고 떼면 선다”는 직접 만든 전기차를 타고 돌아다닌다. 허술해 보여도 시속 68㎞까지는 거뜬하다. 대당 1200만원으로 말레이시아에 100여대 수출하기도 했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사고
그는 1959년 서울 번동에서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목격한 교통사고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어떤 사고였나요?
"'꽝' 소리에 돌아보니 차가 두 동강 났어요. 버스가 승용차를 받았는데 차가 반토막이 된 건 처음 봤어요.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최소한 차는 충돌해도 사람은 살아야 되는 게 원칙 아닌가 했습니다. 안전한 차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꿈이 그때 처음 생긴 겁니다."
12살 때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과 경찰 아버지의 퇴임으로 소년은 초등학교를 마지막으로 학업의 꿈을 접었다. 중학과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졸업했다. 소년의 관심은 오로지 차였다.
- ▲ 차(車)박사 박광종씨는“대한민국에서 차종으로 분류되는 어떤 것이든 가장 많이 뜯어본 남자는 바로 나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가 직접 개조한 87년식 포니에 올라탔다. 스위치를‘LPG’모드에 맞추고 오토매틱 기어를 넣었다. 부르릉∼ 경쾌한 엔진 배기음이 울려왔다. /신현종 기자
"자동차가 어떻게 부서지고 분해되는 건지 궁금했어요. 신설동에 있던 교통안전공단 자료실을 찾아가 '안전한 자동차를 발명하겠으니 자료를 좀 달라'고 했지요."
―직원이 황당해했겠군요.
"학교나 열심히 다니라고 하더군요. 수사기관 외에는 협조가 힘들다고요. 어차피 학교도 안 다녔을 때라, 박카스 한 병 들고 매번 찾아갔어요. 제자리에 돌려 놓는다는 조건으로 그 자리에서 새벽까지 끔찍한 사고 사진들을 봤습니다. 충격으로 3일간 잠을 못 잤어요."
―도움이 되던가요?
"그때부터 폐차장 생활이 시작됐어요. 직접 보고 자르고 부숴보고 싶었거든요. 고철을 주워서 다시 잘라보고 찌그려보고, 찌그러지면 이게 어떻게 구겨지는지, 미군 철모와 한국군 철모를 망치로 때려 보고 비교 테스트를 하는 등 악취미가 생겼지요."
소년은 폐차장에서 고철뿐만 아니라 평생을 물고 늘어질 아이디어도 얻었다. 폐차의 베어링에서 나온 구슬을 가지고 '다마치기'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다.
"구슬을 딱 치면 얻어맞은 것만 앞으로 튀어나가는 거예요. 이거다 싶었죠. 충격을 받아도 그 에너지를 한쪽으로 내보낸다? 자동차 충돌에서도 이 원리를 적용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청년이 된 후에는 남산 국립과학원을 학교처럼 드나들었다. 장학사는 그에게 '에너지 보존법칙'을 설명해줬다. 실에 매달려 수평으로 맞추어진 7개의 구슬 중 맨 오른쪽 구슬을 들었다 놓으면 맨 왼쪽 구슬만 옆으로 튀어올랐다.
장학사는 "이걸 어디에 응용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안전한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답했다. 1978년 군입대를 할 때까지만 해도 불과 10년 뒤 자신이 수십억원 가치의 원천기술을 발명하게 될지 청년은 몰랐다.
- ▲ 박정희 전 대통령이 8대 취임식 때 사용한 68년식 캐딜락 플리트우드. 대학생들의 스프레이 낙서를 지우고 그 자리에 태극기를 덮어 놓았다. 박씨는 “역사적인 유물이기에 철저한 고증이 끝나기 전까지는 함부로 수리할 수도 없다”고 했다. /박국희 기자
◆시행착오
―총 몇 개의 특허를 가지고 있습니까?
"51개국에 7개 특허 기술이 있습니다. 충격완화장치, 방향전환장치, 접촉보호장치…. 그동안 특허 기술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데 들어간 후원금, 사비를 계산해보니 대략 50억 정도 되더군요."
―처음 발명한 건 뭡니까?
"1984년에 '에어 핸들'을 만들어 특허를 받았습니다. 운전대에 공기를 주입시켜 놓은 거예요. 피로를 덜 느끼고 충돌을 해도 복부와 머리를 덜 다치도록요."
―상용화는 안 됐나요?
"기아자동차에서 관심을 보였습니다. 개인이 발명한 걸 가지고 섣불리 상용화했다가 국제적으로 어떤 망신을 당할지 모른다며, 당시 김선홍 회장이 너무 앞서가지 말라고 했다더군요."
군 제대 후 박광종은 본격적인 '재야(在野)고수'로서의 입지를 다져갔다. 19살 때 이미 기아차 사보 '수레바퀴'에 '기대되는 발명가'로 소개됐던 그다. '방향전환장치'의 원리를 담은 초안을 펜으로 그리기만 했을 때였다.
"제자리에서 차의 방향을 바꾸는 장칩니다. 차 밑바닥에 장착한 튜브를 머플러의 배기가스로 부풀려 차를 들어올립니다. 그 상태에서 와이퍼 모터로 차의 방향을 바꾸는 원리예요. 400만원의 단가 때문에 상용화되지는 못했지요."
그는 본격적으로 안전한 자동차를 만드는 데 생(生)을 쏟아부었다. 폐차장에서 배운 '에너지 보존 법칙' 원리를 적용해 필생의 역작 '에어 범퍼'를 구상해낸 것이다.
그는 합성 플라스틱으로 특수 범퍼를 만들어 그 안에 공기를 넣었다. 차 둘레를 이 에어 범퍼로 모두 감싸면 앞부분에서 충격을 받았다 하더라도 차체 전체로 그 에너지를 나눠 흡수한다는 원리였다.
"신문 배달 등으로 100만원을 모아서 고철 상태에 가까운 기아차 '브리사'를 샀을 때였어요. 그 앞에 쌀자루 같이 에어 범퍼를 매달고 직접 충돌 실험을 해서 데이터를 얻어야 했죠."
―생체 실험을 했나요?
"고속 충돌을 해보긴 해봐야 하는데 너무 겁이 나는 겁니다. 더미(충격 실험용 모형 인형)는 4000만원 정도 할 때라 메이커 회사에서도 쉽게 실험을 못 하던 시절이었어요. 대신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도 태워보고 돼지도 한 마리 사서 안전벨트를 매줬습니다."
―효과가 있었나요?
"65㎞ 정도로 벽에 부딪혔는데도 차나 돼지나 모두 무사하더군요."
보다 과학적으로 기술을 정립해야 했다. 산업대학교를 무작정 찾아가 교수에게 한번만 봐달라며 사정했다. 자동차 동아리와 함께 실험차에 에어 범퍼를 장착하고 충돌 실험을 하며 완충 효과에 대한 자료를 얻었다.
1987년 박광종은 고 정주영 회장을 찾아갔다. 우리나라 최고의 자동차 기업인 현대차에서 필생의 역작을 구현하겠다는 꿈을 품고서였다.
―결과가 좋았다면 지금 에어 범퍼를 단 현대차를 볼 수 있었겠지요?
"정 회장이 연구소장 얼굴에 에어 범퍼 도면을 집어던지시더라고요. 그 순간 '한국에서는 모든 걸 접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뭐가 문제였나요?
"그때 현대차에서는 쏘나타와 엘란트라 등에 쓰인 제노이 범퍼 개발을 막 마쳤을 땝니다. 회사 입장에서도 다시 새 범퍼를 개발한다는 게 부담이었겠지요."
―그래서요?
"기술 담당자들이 그러더라고요. '이건 언젠가는 가능한 기술이다. 하지만 모방하기에도 힘든 지금 국내 여건에서는 힘들다. 갈 수 있으면 외국으로 가라'고요."
―아예 자동차 회사에 들어가지 그랬습니까?
"현대, 기아, 쌍용차에서 그런 제의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차만 있으면 부숴 보고 뜯어 보고 하는 제 괴벽이 받아들여질 여건이 아니었어요. 뜯으라면 뜯어야 하고 맞추라면 맞춰야 하는 나사가 되긴 싫었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건가요?
"젊은 나이에 기술을 개발하다 보니 너무 건방진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요. 나중에 현대차에서는 연구용으로 쓰라고 쏘나타 한 대를 기증해줬습니다."
◆아메리칸 드림
박광종은 그 길로 미국 대사관을 찾았다. 우리 최고의 기업인 현대차에서도 못한다면 어디서도 안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특허 기술로 비자를 받아 한국을 떠날 때 그의 손엔 에어 범퍼 도면을 담은 서류 가방이 전부였다.
40달러를 들고 무작정 찾아간 미국에서 박광종은 뜻밖의 환대를 받았다. 방향전환장치와 에어 범퍼 개발 등으로 보도됐던 KBS 9시 뉴스가 월드 뉴스로 미국 네트워크의 전파를 탔던 것이다.
그가 비행기 안에 있을 때 미국 한인회에서는 이미 그가 한국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인회장이 LA공항에 배웅을 나왔다. 그는 한인회장을 통해 평생의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미국에 가서 느낀 게 뭡니까?
"기술 하나만 있으면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 주는 나라였습니다. 당시 NBC 뉴스에 보도가 된 적이 있어요. 미 전역에서 '폐차하기 전에 내 차를 당신 실험용으로 쓰라'며 생전 보지도 못한 동양인에게 140대가 넘는 차를 보내오더군요."
―자동차의 나라답군요.
"한인회장을 통해 한국계 미국인을 소개받았습니다. 당시 전미 100대 기업인에 속할 정도의 탄탄한 사업가였지요. 이건 신기술이라며 당신 꿈을 마음껏 펼쳐보라고 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과 다리를 놔줘 에어 범퍼에 대한 실험 데이터를 얻는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조건이었나요?
"특허권의 51%를 넘기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기술의 주권을 가져가겠다는 거지요. 이미 에어 범퍼는 미국 기술이 됐습니다. 87년 당시 돈으로 8억원 정도를 받았습니다."
―미국에 기술을 파는 데 망설임은 없었습니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에어 범퍼가 상용화되면 가장 먼저 국산차에 우선권을 준다. 국산차가 쓸 경우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는다'고요."
―'데이비드 에어범퍼'라는 상호는 뭡니까?
"후원자가 제게 붙여준 이름이 '데이비드'입니다. 박광종이라는 이름이 알려질 때까지는 우선 미국 이름을 쓰라고요."
1989년 그는 방향전환장치와 에어 범퍼로 뉴욕 국제 발명전에서 금메달을 딴다. 그제야 '뭐든 해줄 테니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는 이듬해 한국 상공부 초청으로 25회 발명의 날 표창을 받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기계공학과와 협력이 이루어졌다. 에어 범퍼가 교내 자동차기술연구소의 연구과제로 채택되기도 했다.
김영삼 정권에서는 청와대 경호팀으로부터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큰 잘못을 저지른 줄 알고 조심스럽게 청와대에 들어간 그에게 경호팀은 "에어 범퍼를 대통령 경호차에 적용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청와대에서는 뭐라던가요?
"명색이 VIP 차량에 들어갈 기술인데 안전성이 좀 더 확인돼야겠다고 하더군요. 디자인에 대해서도 너무 멋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맨주먹
1991년 무렵, 박광종의 후원자는 롤스로이스의 디자이너를 소개해준다. 영국 본사에서 온 디자이너는 자기가 그린 스케치를 보여주며 "이대로 에어 범퍼의 제작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어왔다. 롤스로이스가 추구하는 안전성의 경영 이념과 에어 범퍼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박광종은 쌍용차와 거래하던 하도급업체에 제작을 맡겼다. 9시 뉴스를 보고 그를 찾아왔다는 하도급업체는 신용도 있어 보이고 기술도 있어 보였다. 금형 틀을 만들고 제작을 하는 데 전 재산을 쏟아 부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에어 범퍼의 상용화를 의심하지 않았다.
―부도가 났습니까?
"에어 범퍼를 이용해서 돈만 대출해 받고 회사를 고의 부도 냈다고 봅니다. 그때 제 모든 걸 다 잃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미국에서 가지고 온 캐딜락 한 대와 불러온 아내의 배밖에 없더라고요."
―그때 논산에 정착하게 된 겁니까?
"서울 번동에서는 동네 민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가지고 온 실험용 차들과 온갖 부품들 때문에 골목마다 차를 쌓아둬야 할 판이었거든요. 넓은 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요?
"아내가 울면서 그러더라고요. '당신도 이제 정착을 하고 직장을 잡든지 안정되게 살아라. 자동차에만 매달리면 가정의 평화가 깨진다'고요. 이민용 가방에 자동차 서적 150권을 싸서 창고에 처박아뒀습니다. 3년 동안 꺼내보지 않았어요."
―맨주먹으로 생계는 어떻게 꾸렸습니까?
"자동차를 떠날 수는 없더군요. 논산 인근 주민들이 어떻게들 알았는지 '내 차에 달아달라'며 화물차나 자가용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망치로 두드려가며 에어 범퍼를 달아줬어요. 한 달에 1개 팔아 생계를 꾸렸어요. 그때 가격이 400만원 정도 했습니다. 지금은 120만원 정도입니다."
―반응이 좋았나요?
"1992년부터 그렇게 달아준 게 100여대 될 겁니다. 아직도 30여대는 돌아다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실험 차원이라 순대처럼 공기만 들어가 있어 볼품도 없었고, 그때만 해도 불법 개조로 단속이 되던 상황이었거든요."
―자동차 수리도 그렇게 시작한 겁니까?
"일단은 먹고살아야 했어요. 1997년에 '데이비드 에어범퍼'를 차렸습니다."
―만드는 것뿐 아니라 고치는 것도 잘했나요?
"국내에서 저만큼 차를 많이 부숴보고 뜯어본 사람도 없을 거라고 봐요."
◆차(車)박사
2004년 충남 공주 부근의 정안 톨게이트에서 미 군용 트럭이 멎었다. 포탄과 발사 장비들을 가득 실은 차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미군은 박광종을 찾아왔다. 그는 3일 동안 국내에 없는 부속을 깎아 만들며 차를 수리했다.
그 인연으로 2005년부터 송탄 비행장과 군산 비행장의 미군 차량들을 독점 수리해 오고 있다. 2004년부터는 삼성 그룹의 VIP 버스도 관리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마이클 잭슨 등 삼성을 찾은 국내외 VIP 인사들이 이용했던 차량이다.
'데이비드 에어범퍼'에 들어오는 차량의 70%는 정비 공장에서 고치지 못한 것들이다. 4명의 직원과 함께 주로 엔진을 전문으로 수리한다. 한 달이면 보통 50여건 수리 차량이 들어온다. 일본과 미국에서 들어오는 올드카도 많다.
올 3월에는 아프리카 가나의 한 주민이 68년식 캐딜락을 택배로 보내오기도 했다. 미국에도 부품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현지 우리나라 영사관을 통해 박광종의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유명세를 탄 것은 엉뚱하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용 캐딜락 때문이었다. 2007년 2월 평소처럼 논산 폐차장을 둘러보며 쓸만한 부품이 없나 찾아보던 그의 눈에 범상치 않은 차량이 들어왔다.
68년식 방탄 캐딜락이었다. 폐차장 주인은 베트남 수출상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박씨는 "순간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고철치고는 상당히 비싼 100만원을 그 자리에서 주고 사왔다"고 했다.
캐딜락이 육군 병기학교에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폐차장까지 흘러들어왔다는 언론 보도 후 육군 장성들이 찾아와 자기들 실수라며 캐딜락에 참배를 했다. 농활 온 대학생들은 유리창을 깨고 '독재자''망할 놈'이라며 스프레이로 차량을 훼손하기도 했다. 박씨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동문회가 박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을 맞아 세울 기념관에 차량을 기증할 계획이다.
―에어 범퍼는 이제 끝난 겁니까?
"무슨 소립니까? 이제 개발 완료 단계예요. 20년 동안 안전성 데이터를 축적했습니다. 보통 차량 1대를 개발할 때 10대 미만의 충돌 실험을 거쳐요. 저는 공식적으로만 170대를 때려 부쉈습니다."
―그동안 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습니까?
"대량 생산은 시간 문제라고 봐요. 예전에 겪은 시련도 있고 우선은 최고의 품질로 샘플을 만들고 이제 됐다 싶을 때 대량 공급할 생각입니다."
―무슨 차를 탑니까?
"크라이슬러의 84년식 픽업 트럭하고 87년식 캐딜락을 타고 다닙니다."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의 7개 특허 존속기간도 함께 스러졌다. 51개국에 있었던 특허가 현재 한국, 미국, 일본, 중국을 비롯해 7개 나라로 줄어들었다. 그는 "에어 범퍼를 제대로 한번 달아보지도 못했는데 박광종의 청춘도 끝났다"며 "마음 아프게 그런 건 왜 묻느냐"고 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에어 범퍼를 단 차들을 볼 수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문제없습니다. 제조하겠다는 업체가 없으면 수작업으로라도 만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