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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한흠목사 애도물결

거듭난 삶 2010. 9. 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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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큰별 졌다" 옥한흠목사 애도물결

  • 연합뉴스

입력 : 2010.09.02

2일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의 소천 소식을 접한 한국 개신교계는 일제히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일군 큰 별이 졌다”며 애도했다.

현역 최고령 목회자인 방지일(100) 영등포 교회 원로목사는 “옥 목사가 고안한 제자훈련에는 한국 뿐만 아니라 외국의 인재들도 많이 참여했다”며 “독특한 길을 스스로 발견한 한국 교회의 큰 별이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방 목사는 “옥 목사의 아들이 얼마 전 ’한국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사람을 흥분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책을 썼다고 들었을 때 과연 큰 별의 아들은 다르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손아래인 정진경(전 한기총회장.신촌 성결교회), 김준곤(전 한국대학생선교회(CCC)설립자) 목사 등을 앞서 보낸 방 목사는 “옥 목사는 한국 교회에 큰 역사를 남기고 떠났으니 이제 그보다 더 큰 별이 나오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대만 대성회에 참석 중인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는 “한국교회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 옥한흠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옥 목사는 제자 훈련을 통해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숙에 크게 기여하셨다. 그분의 업적과 열매는 영원히 한국교회와 사회에 남을 것”이라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는 “옥 목사님은 누구보다도 민족과 한국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면서 목회자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라며 “옥 목사님은 이 시대 목회자의 사표였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김운태 총무는 “옥 목사님은 제자훈련을 통한 지도자양육 훈련, 성도양육 훈련 등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만드신 분이며, 스스로 청빈하고 깨끗한 삶을 통해 교회 지도자의 모범이 되셨다”고 말했다.

또 “2007년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으로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예배에서 설교를 통해 한국 교회 갱신운동을 역설하셔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던 모습이 떠오른다”라고 기억했다.

올해 2월 총회 때 옥 목사를 명예회장 중 한 명으로 추대한 바 있는 한기총은 이광선 대표회장 등을 중심으로 조문단을 구성해 빈소를 찾을 예정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인 권오성 목사는 “옥한흠 목사는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던

1970-1980년대 이후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갱신을 해야한다는 길을 제시하셨던 분”이라며 전병호 NCCK회장 등과 함께 조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사랑의교회는 홈페이지와 트위터 등을 통해 옥한흠 목사의 소천 소식을 알리고 약력을 소개하고 있으며 교인들은 애도의 메시지를 잇따라 올리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교회의 큰나무..故옥한흠

  • 연합뉴스

입력 : 2010.09.02

“저의 목회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평신도를 깨워서 주님의 제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제자훈련’ 목회철학이지요. 제자훈련 목회철학은 첫째 평신도를 훈련시켜 그 인격을 예수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 평신도를 훈련시켜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는 소명자로 만드는 것입니다.”(옥한흠 목사 공식홈페이지 중에서)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어른으로 존경받은 고(故) 옥한흠 목사가 가장 강조한 것이 제자훈련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작은 그리스도’라는 별명을 들었던 것처럼 평신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하며, 따라서 제자훈련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바뀌어놓는 작업이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옥 목사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교회의 주체는 평신도”라는 신념 아래 나온 것으로, 옥 목사는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인 만인 제사장의 개념과 상통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옥 목사가 1978년 사랑의 교회를 개척한 후 본격적으로 펼친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당시 부흥회나 전도집회에 집중하던 교계에서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제자훈련을 받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화제가 되면서 교파를 초월한 많은 목회자들이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배웠고, 옥 목사가 이끌던 국제제자훈련원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그 결과 사랑의 교회는 목사들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수천명의 평신도가 함께 이끄는 새로운 교회모델이 됐다.

옥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의 어른이면서도 한번도 교단 총회장을 맡지 않았다. 아울러 대외적인 직함을 맡은 활동도 적었던 편이다.

이에 대해 옥 목사는 “목회자는 성도를 향해 어미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교회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고 교회 사이즈를 가지고 떠벌리며 교회 밖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목회자는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양떼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가 1996년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1998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설립을 주도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그는 “한국교회가 건강함을 되찾고 세상과 소통하고 회개해야한다”고 역설해왔다.

2일 별세한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목사.(사진=사랑의교회 제공) /연합뉴스

옥 목사가 65세 때인 2003년, 정년을 5년이나 앞두고 “교회와 목사가 함께 늙으면 안된다”며 후임 오정현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준 것도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일부 교회에서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줘 사회적으로까지 논란을 낳은 것과는 달리 옥 목사는 남가주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를 전격적으로 초빙해 담임목사직을 맡겼다.

원로목사들은 보통 한달에 한 번은 설교를 하지만 옥 목사는 국제제자훈련원 원장직만 계속 수행하면서 1년에 2-3차례 설교를 했을 뿐 철저히 2선으로 물러났다.

옥 목사 시절 지성적이고 차분했던 사랑의교회가 오정현 목사 체제 이후 역동적이고 젊은 교회로 탈바꿈했다는 평가 속에서도 여전히 옥 목사를 그리워하는 교인들이 많았지만, 옥 목사는 자신이 아끼던 목사들이나 장로, 권사들, 평신도들과 개인적인 통화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 목사의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 개척자들이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세습관행에 자연스럽게 제동을 거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사랑의교회가 예배당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서초동 법원청사 인근에 2천여억원을 들인 대형 예배당을 짓기로 지난해 결정하면서 이른바 ’메가처치’ 논쟁의 중심에 서는 것을 목격했다.

2009년 사랑의교회가 예배당 신축을 결정하자 교계 일각에서는 초대형 교회가 무차별적으로 교세를 늘리면서 이웃 개척교회나 중소교회 교인들까지 흡수하고 권력화하는 것에 우려하면서 “사랑의 교회, 너마저!”라는 문구를 내세워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옥 목사는 공식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9월 한 교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은퇴 후 나는 내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하는 우려를 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버렸다는 생각 때문이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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