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거듭난 삶 2012. 5. 1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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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8:1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이런 마음을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 인상에 별 볼일 없게 보여지는 사람에게 대해서 가령 그 외모가 좀 허접스럽게 보였거나, 너무 수다스럽게 보였거나 또는 무슨 혐의가 있게 보였거나 하면 그 사람에게서 아무리 좋은 일을 본다 하더라도 좀 투털거리듯 퉁명스러운 말을 하게 되는 경험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그 사람을 향해서 좋지 않은 비판의 얘기를 하면서 그 사람을 걸고 넘어지려는 태도를 보이는 경험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태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그 예수라는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까 고민하면서 삽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사람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을 걸고 넘어지려고 고민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가기보다 다른 사람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은 듯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돌아보는 삶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의 삶이 자기의 고민거리입니다.

 

남이 잘 사는 것 때문에 고민 합니다. 남이 저렇게 말하면서 사는 것에 대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남이 복받고 칭찬을 받고 사는 것 때문에 시샘하고 고민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흥분하면서, 어쩌면 간교한 미소를 띠면서 한 여자를 끌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짐짓 점잖은 듯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소. 당신은 모세의 율법 을 너무도 정확하게 알고 계시겠지요? 당연히 이런 여자는 돌에 맞아 죽여야 한다고 우리의 위대한 조상 모세는 율법에 이렇게 말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소? "

그들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 함이러라."

 

여러분, 말이라는 것, 언어라는 것은 우리의 사상과 생각의 집합체입니다. 생각이 그대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의 사용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갈 사람인지 까지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짤막한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어느 날 밤, 여덟 살 먹은 아들 자카리아와 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나 하면서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인대회가 중계되고 있는 채널을 발견했습니다.

 

'야, 여기 미인대회를 하고 있네!'

어린 자카리야 는 나에게 미인 대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뽑는 대회라고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주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해서 나를 완전히 감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왜 저기에 안 나갔어?'"

순진한 어린이의 마음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어린 아들의 말을 통해서 그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지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당신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을 들으면 여러분은 그들의 어떤 생각을 읽으십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정말 몰라서 물었습니까? 정말 알고 싶어서 그랬을까요? 어떤 것이 좋을까 고민이 되어서 예수에게 물어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습니까? 그들의 말속에 무슨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요한은 그들의 말속에서 다음과 같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그들의 말에는 두 가지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고소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을 비방하고 싶은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고소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고소하고 싶다는 거예요. 고발해서 그 사람이 고통당하는 꼴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척 불행한 것입니다. 남을 고소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참으로 고달픈 삶입니다.

 

『지하철을 타면 가끔 이런 광고 문안이 있습니다.

"수상한 사람을 신고합시다. 상금 최고 오천만원, 국가 안전 기획부"

수상한 사람을 보면 신고하고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나라는 불행한 나라입니다. 조금만 이상한 행동을 발견하면 고발을 하라는 것입니다』

 

낮선 사람이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아니 고발할 거리를 찾으려고 하면서 쳐다보며 살아야 하는 삶은 불행한 삶입니다. 의심하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발해야 하니까 의심의 눈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하면서 고발할 생각을 가지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그것은 서로를 갈라놓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의심하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고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서로를 쳐다보고, 대화를 나눈다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눈에는 온통 예수를 고발할 조건만 찾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걸고넘어질까를 생각하면서 고민합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고발당하는 사람보다 고발하는 사람이 더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의 말을 통해 찾을 수 있는 마음속의 생각은 시험하려는 마음이었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떠보려고 했다는 것이지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을 하면 덫을 놓기 위해서 그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to trap him! 말 시켜놓고 그 말에 걸려 넘어지도록 하는 사람 말입니다.

 

말이 순수하지 못합니다. 말에 다른 목적이 있어요. 순수한 대화가 아니라 걸고넘어지려고 말로 유도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이상한 질문을 하고는 저 사람이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덫을 놓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전혀 아닌 것처럼 하면서, 전혀 덫이 아닌 것처럼 겉을 잘 포장해 두는 것입니다. 지나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처럼 속여서 위장합니다. 그러나 그 위를 지나가면 푹 빠져버리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과의 대화는 끔찍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다. 간음이 현장에서 잡힐 성질의 것입니까? 숨어서 하는 일이 어찌 현장에서 잡힐 수 있습니까? 현장에서 잡히는 간음은 미리 정보를 입수해서 그 간음의 자리에 준비하고 기다리지 않고는 절대로 현장에서 잡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리 짜놓은 계획일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고 치밀하게 준비한 듯한, 냄새가 짙게 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덫을 놓기 위해 몇 번씩 준비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은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내가 이렇게 말하고 또 저렇게 말하면 되겠지? 하면서 때로는 계획적인 대화를 이끌어 갈 때가 있습니다. 사악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금 예수를 이렇게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돌로 치지 말라"고 말하면

 

유대인의 법,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돌로 치라"고 말한다면 로마법에 어긋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시에는 처형하는 문제만은 유대인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꼼짝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물어 본 질문이었습니다. 야비한 질문입니다. 질문 속에 아주 엉뚱하고 사악한 목적이 담긴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덫의 질문을 받으신 주님의 반응을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매우 지혜롭지 않습니까? 침묵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악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까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다시 말하면 계속해서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빨리 대답하라고 질문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일어나서 대답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말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말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하시는 말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사고(思考)해야 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예수님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말이 얼마나 다른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소할 조건을 찾는 말이나 시험하려고 하는 말과 얼마나 다른지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말씀 2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7절 후반부를 보실까요?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 해석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9절입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이것이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을 고발하려고 하면서 삽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중에 그 여인을 돌로 칠 만 한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나는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런 대로 쓸 만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저 여인과 같지 않다(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 이야기를 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발견됩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끌려왔지요. 여러분, 간음은 혼자 하는 것입니까? 둘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어디에 갔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그 사람도 바로 간음의 현장에 있었는데 교묘하게 빠져버린 것입니다. 돈이 있어서 그랬을는지 모릅니다. 권력이 있어서 빠져 나갔을지 모릅니다. 친구관계가 좋아서 묘면 했는지 모릅니다.

 

한국이나 미국, 어느 나라든지 권력층은 보호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묘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물망을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나는 거기 그 현장에 없었다고 발뺌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그 간음의 현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우리도 거기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내가 못을 박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 바로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다시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우리는 남을 돌아보고 허물을 지적하면서 산다고 했습니다.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남을 쳐다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를 돌아보라, 네 속을 쳐다보라, 그리고 깨달으라,"

 

그런 다음에 남을 향한 돌을 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남이 아닌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네 안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라"는 것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내가 제일 먼저 돌을 들고 치면 돌이 가장 먼저 나에게 돌이 날아올 것입니다.

자신의 속을 너무 정확하게 찌르는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에게 또 다시 정곡을 찌르듯 도전해옵니다. 예수님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씩 하나씩 어른이든지 젊은 사람이든지, 도덕적으로 나무랄 데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되돌아가 버립니다.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 아닐까요?

우리는 찔림의 이야기를 들어도, 내 영혼에 직접 도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은 사람처럼 모른 척 또는 무반응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팽개쳐 버리지 않습니까?

 

드디어 예수님과 여인밖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연민의 마음으로 부드럽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사실 들고 있던 돌을 하나씩 내려놓고 되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입니다. 11절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는 중요한 교훈 두 가지가 한꺼번에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용서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은혜의 메시지이지요. 주님께로 부터만 받을 수 있는 엄청난 선물입니다. 간음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하나 더 있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돌로 쳐 죽임을 면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더 이상 죄의 사슬을 고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죄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고민거리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용서받은 그들에게 여전히 죄의 사슬과 그물이 내려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죄의 삶을 이제부터는 떠나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에게는 구원받은 백성다운 삶이 요청됩니다. 절대로 구원의 제 일 단계로써 중단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두 번째 교훈입니다.

 

이제는 가서 죄의 삶을 떠나 새롭게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간음의 현장에서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되는 미래가 있습니다.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미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또 다른 은혜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돌멩이의 날아듦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피난처인 주님께로 나아가면 새롭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도 더 새롭게 출발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말씀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죄(定罪)의 돌멩이를 들라고 말하는 대신에 용서와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는 말을 하면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고발하려는 말보다, 덫을 놓아서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말보다는 우리들을 통해 위로의 말이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나의 말을 통해 정죄보다는 격려와 미래가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나로 하여금 바로 이런 주님의 말씀들이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