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기독교인과 제사문제

거듭난 삶 2012. 5. 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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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 : 19 ∼ 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은 모든 크리스챤들이 갈등을 겪어보았거나 현재 갈등을 겪고 있는 제사문제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전도할 때 제일 많이 벽에 부딪치는 문제가 제사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좋다고 말하면서도 제사 문제 때문에 선뜻 택하지 못하고 어떤 분들은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게 한다고 그 쪽을 택하기도 합니다. 제사 문제가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천주교와 제사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매우 미묘합니다. 1742년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유교적 조상 숭배의 제사는 성경의 교훈에 어긋나며 천주교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후 1784년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왔습니다. 이승훈이 청나라에 갔다가 세례를 받고 들어와서 다른 사람 (이덕조)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한국 천주교의 시작입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라는 천주교인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사형을 당한 신해교난이래 1866년 대원군의 박해까지 80여년 동안 만여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1936년 5월 로마교황 피우스 12세는 '현대에 와서는 과거의 전통적인 습관이 많이 바꾸어졌기 때문에 유교의 조상 숭배는 하나의 시민 의식일 뿐 종교적인 의식은 아니다' 또한 '조상에 대한 효의 표시로 간주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때부터 왜정시대 때에는 신사참배도 하고, 제사도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그동안 제사 때문에 목숨을 바친 만여명의 순교자들은 헛되게 죽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연옥사상을 만들어서 죽은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체나 사진 앞에 절을 하며 향을 피우고 날을 정해 매년 11월 2일은 모든 죽은 자를 위로하는 위령의 날로 정하고 위령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주교 신앙은 제사 지내는 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 시키고 있습니다. 목숨걸고 순교한 순교자들만 억울하게 죽은 것입니다.

 

어떻게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교리를 바꿀 수 있을까. 천주교내에서 제정한 천주교회법은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교황의 결정 사항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같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교리가 뒤집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아니라고 하면 시대가 변해도 나라가 바뀌어도 그대로입니다.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를 믿고 따르는 것이 개신교회들의 전통입니다. 종교개혁의 구호가 '성경으로 돌아가자' 였던 것만 보아서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다른 문화와 만날 때 충돌이 심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믿는 며느리가 들어오더니 제사를 거부해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킵니다. 또 어떤 이는 음식까지는 만들지만 제사 지낼 때는 피하고 음식도 먹지를 않습니다. 아들이 예수를 믿더니 제사 때 절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사 때 오지도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른들의 눈에는 곱게 보일 리가 만무합니다. 점점 관계가 소원해지고 발걸음이 뜸해집니다. 예수쟁이들은 자기 조상도 모른다고 욕을 먹고 불효막심한 자식이라고 지탄을 받습니다.

 

 

이렇게 난감한 상황이 되어도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는 부모나 형제들에게 마땅히 설명할 내용도 모르고 막연히 ‘우상숭배는 안된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가족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

 

알고보면 기독교는 제사의 종교요 구약전체는 온통 제사 얘기로 가득 찼고 레위기는 전체가 제사법전인데 왜 조상 제사는 지내면 안되는가 분명한 이유를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인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아예 잊어 버려도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형태로 조상을 섬겨야 되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고 이 땅에서 살고 또 이 땅에서 예수 믿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이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며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이 문제를 넘어서면 가정 한 가문을 복음화 하는데 대단히 효과적인 문제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이 문제를 상고할 때에 성령님께서 밝히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 19 ∼ 25)

 

 

오늘 본문 말씀에는 제사문제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14절에 나와 있는데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깨닫게 하시려는 경고성 비유입니다. 돈으로는 천국을 갈 수 없으며, 돈으로 영생을 살 수도 없으며 돈으로 불로장생의 약을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에 집착하지 말고 한 번뿐인 인생을 바른 믿음과 바른 생활, 바른 관계 속에서 보람되고 즐겁게 살아가라고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문제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입니다.

 

19절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자색옷은 왕이 입는 옷이요 귀족이 입는 옷입니다.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했는데 당시 고운 베옷은 같은 무게로 금을 주어야 할 만큼 비싼 옷감입니다. 엄청난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습니다. 지위가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생을 먹고 마시고 사치하고 즐겁게 살았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했습니다.

 

20∼21절입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광경입니다. 그 호화로운 잔치상 아래에서는 거지 나사로가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있는데 온몸에는 부스럼이 나고 짓물러 터지고 해서 개가 곁에 와서 헌데를 핥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이 2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거지가 죽었습니다. 장사지낼 사람도 없고 울어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거적대기에 둘둘 말아 기드론 골짜기 힌놈의 계곡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거지만 죽는 줄 알았더니 부자도 죽었습니다. 돈도 많은데 약도 많이 썼는데 용한 의사를 다 불렀는데도 그 많은 돈 다 써보지도 못하고 짊어지고 가지도 못하고 그만 아쉽게도 죽었습니다. 거창하게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 9 : 27절은 우리가 새겨들어야할 귀한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거지만 죽는 것이 아니고, 부자도, 당신도, 나도 죽습니다.

 

 

둘째 : 스스로 오고 가지 못합니다. ( 26 ∼ 31)

 

이제 여기에서부터 제사와 관련된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너무 목마르고 고통이 심하여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주십시오. 너무너무 목이 탑니다.

 

그 대답이 이렇습니다.

26절

 

천국과 지옥은 서로 왕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에 간 부자가 너무 후회스러워서 아브라함에게 간구를 합니다.

 

27 ∼ 28절

 

‘내 형제 다섯이 아직 세상에 있는데 나는 저들에게 갈 수 없으니 나사로를 저들에게 보내어 예수 믿게 해주시고 제발 지옥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29절

 

세상에는 선지자들이 있고, 교회가 있고, 복음 전도자가 있고 말씀이 선포되고 있으니 그들이 들을 것이다. 그랬더니 지옥에 간 부자가

 

‘아닙니다. 만일 죽은 자가 저희에게 가서 이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면 저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부자도 죽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문제입니다. 23절에.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거지는 천국에 갔습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안됩니다. 부자는 반드시 지옥 가고 거지는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한 대로 가는 것이요 그 행함이라 함은 예수 믿는 행함을 포함한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은 돈으로 갈 수 없는 곳임을 깨우쳐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24절.

 

지옥은 고통하는 곳입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타지 않는 불이 늘 타오르는 무서운 영벌의 장소입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 세계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믿는 자는 천국으로 축복 받고 불신자는 지옥의 저주아래 놓이게 된다는 두려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물질의 부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데 이왕이면 예수를 잘 믿어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복을 받으십시다. 예수 믿고 천국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0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후손에게 돌아와서 제발 지옥에 오지 않도록 바른 믿음 갖고 살라고 당부하고 돌아간 사람 아니 그런 귀신은 인간이 생긴 이래로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 봅니다. 조상 제사의 기원은 조상 숭배 사상에서 출발했습니다. 조상 숭배의 핵심은 일반적으로 사자(死者)에 대한 신앙입니다.

 

 

제사의식을 통하여 부모에게 효를 할 수 있고 존재의 근원을 회복하고, 뿌리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후대에 오면서 조상신이 자손에게 복을 준다는 기복(祈福)사상과 사자에 대한 공포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의 근본은 효의 사상입니다. 효는 모든 덕의 시작이며 근본입니다. 공자는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했습니다. 맹자는 '부모의 환심을 얻지 못하고 순종치 못하는 사람은 자식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조선시대는 제사를 통해서 효를 강조하고 장려하고 보급했습니다. 또 하나 제사의 장점은 뿌리의식이요 그리고 집안의 결속을 다짐하는 행사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효를 가르치고 뿌리의식을 심어주고 가족간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제사 의식에도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① 첫 째 : 조상신이 자손에게 복을 준다는 기복사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고, 잘못 모시면 재앙을 받는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강박관념이 죽은 조상을 가정의 보호자로 모시는 종교적 심리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② 둘 째 : 사자(死者)에 대한 공포의식을 낳았습니다. 죽음은 산 자와의 단절이 아니라 죽은 혼은 어떤 변화된 형태로든 남아 있다가 옛집을 찾아가 제사 음식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후손은 그 주린 혼을 달래고 또 먹이고 섬기는 행위인 제사를 통하여 죽은 혼이 안위를 받는다고 믿습니다.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그 조상귀신은 아귀가 되어 '아귀란 굶은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그 후손에게 재앙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스럽게 죽은 사람은 귀신이 되어 온갖 재앙과 재액을 가지고 자손을 괴롭힌다고 믿었기에 자손들은 귀신을 달래기 위해 살풀이와 씻김굿을 했습니다. 씻김굿은 죽은 자의 사령(死靈)에 살풀이를 해서 한을 풀어주고 깨끗하게 만들어 망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은 죽은 후에 부모가 아니라 귀신이 되어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③ 셋 째는 제사를 드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조상신을 위로할 제사를 받들 수 없기에 아들 낳지 못하는 것이 최고의 불효라 여겼고 남아 선호 사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양자를 해서라도 대를 잇게 해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④ 넷째 : 허례허식을 낳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때 우리 나라에 제사가 유교의 보급과 함께 들어온 후, 고려시대 계급에 따라 대부는 3대 제사, 6품은 2대, 7품 이하 서민은 부모만을 제사토록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조선조에 들어와 사대 봉사를 허락했고 영조시대 이재가 지은 ‘사례편람’이 제사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한 해에 드려야 하는 제사는 크고 작은 제사를 합해 47회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가정의례 준칙에 의해 2대 제사를 드리도록 하고 고인이 사망한 날의 기제, 8월 추석날 아침 절사, 설날 아침의 연시제 그러니까 여섯 번 제사를 정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일년 내내 제사를 지내려다 재산을 탕진하고 빚을 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의 폐단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상이 돌아오셔서 잡수시기만 한다면 차려야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사람은 영으로도 스스로 오고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귀의 객’이 되어서 다시 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 낙원으로 간 영혼과 땅에서 잠자던 육신이 만나 다시 부활체를 입을 때까지는 인간은 스스로 이 땅에 오고 가지를 못합니다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조상이 귀신이 되어 온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째 : 살아계실 때 효도합시다 ( 31)

 

 

정청의 송강가사 중에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에야 애달프다 어이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제사를 아무리 잘 지내도 효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효는 살아 계신 부모님께 대한 효를 가르칩니다.

 

성경의 정신의 중심인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뒷부분은 제 5계명부터 제 10계명인데 인륜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중 첫째인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기독교는 부모 공경을 가장 중시하는 종교입니다. 구약에는 불효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 했습니다. (출 21 : 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지금도 교회 다닌다는 핑계로 부모님 섬기는 일을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제사 지낼 수 없다고 형제 우애를 그르치고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면 안됩니다. 제사 음식을 먹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부정 탈것도 없고, 귀신 붙을 것도 없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최선의 방법은 돈을 드리고 고기를 사드리는 것보다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형제가 우애해서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일입니다. 부모님께 최상의 공경, 최고의 선물은 믿음을 드리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서 영생 복락 하시도록 예수를 전해 드리는 일이 최고의 효도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모님이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으시도록 부모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에는 귀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을 뿐이지 더 좋은 제사가 있음을 알려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추모식입니다. 보통 추도식이라고 해왔는데 도(悼)자가 슬퍼할 도 자이므로 성경적으로 맞지 않아 추모식이라 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이를 생각하고 사모하고 그리움을 마음에 새긴다는 뜻으로 추모식이라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나의 삶입니다. 과연 후손들이 추모할 만한 아름답고 보람있는 생을 살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죄를 밥 먹듯 짓고 가족들에게 큰 고생만 시키고, 자녀들이 생각할 때 아무런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한 삶을 살고 갔을 때 후손들이 무엇을 추모하고 기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루하루를 경건하게 살고 자녀들에게 교훈을 주고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사랑하고 성실한 시민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엡 6 : 1 ∼ 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효도는 약속 있는 첫 계명 입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효도하는 것이 산제사입니다. 살아 계신 부모님, 장인장모, 시부모님께 효도하므로 산제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