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하나님이 찾는 사람

거듭난 삶 2012. 6. 3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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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찾는 사람

 

마 10 : 34 ∼ 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요즈음 사회적으로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전쟁을 방불케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법시험에 2차까지 합격했으나 3차 면접에서 탈락한 조모씨는 판검사의 꿈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넣어 보았으나 나이 때문에 되지 않자, 이번에는 나이가 많아도 되는 아파트 경비원에 이력서를 냈는데 대졸자는 받지 않아서 학력을 속이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경비원으로 앉아서 보는 책의 수준이 높은 것을 수상히 여긴 상사에게 학력이 탄로나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직장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사람은 많은데 쓸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신문에 구인란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사원모집, 인재를 구합니다.

그리고는 학력, 경력, 외국어, 자격증, 박사학위, 외국여행에 결격사유가 없는자 등등 자격이 나오고 설명조로 회사가 요구하는 사람의 성향을 설명하고 있는데

· 책임과 의욕을 가진 젊은이를 찾습니다.

· 교육관이 투철하고 사명감이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 도전적이고 패기 넘치는 인재를 채용합니다.

· 학력보다는 능력, 도전과 패기 넘치는 젊은이를 찾습니다.

· 성실하고 진취적인 직원을 모집합니다.

· 미래 지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실한 인재를 모집합니다.

· 맡은 바 업무를 스스로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도전적이고 끼가 있는 참신한 인재를 찾습니다.

· 능력과 조화를 중시하는 자

· 진취적이고 적극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문구를 보면서 시대가 격변하고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무한 경쟁시대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찾는 사람은 도전적이고 패기 있고 적극적인 사람을 찾고 있구나 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업이 요구하는 사람,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사야 6 : 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유대 땅에 보낼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유대 땅에 사람이 없어서 찾고 계신 것이 아니라 ‘쓸만한 일꾼’이 없어서 찾고 계신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응답하고 사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37절에서 2번, 38절에서 1번

내게 합당치 않고’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합당하다’는 말의 뜻은 어떤 평가 기준에 알맞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합당하다는 말은 쓸모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평가 기준에 이르른 사람이 합당한 사람이요 쓸모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예수님이 쓸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 ( 34 ∼ 36절)

기독교를 역설적(逆說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적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의 말씀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가정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고 형제 자매도 모르는 패륜적 집단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람들은 로마나라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와 수탈과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자기백성을 어두움에서 건져낼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실 때에는 정치적 해방과 함께 물질적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기대에 대해 예수님은 그것이 아님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마치 불화나 반목을 조장하기 위해 오신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희구하는 화평과 예수님의 화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화평의 개념은 외적이고 현상적인 것입니다. 전쟁이 없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화평이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화평은 내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그리고 구원을 화평이라 하는 것입니다.

검을 주러 왔다’는 말은 '분쟁케 하러 왔다'는 말로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화평이 무조건 양보나 타협이 아닌 진리를 위한 투쟁을 통해 얻어질 것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땅 위에 건설하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과의 타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위에 모든 죄악의 척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큰 장애는 이방인이나 권력자들의 박해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처음 예수 믿을 때 가족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심하면 집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국은 승리요 가정의 구원이요 화평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타협하는 사람은 결국 주저 앉고 화평도 구원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타협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화)솔로몬왕이 죽은 후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솔로몬 때에 수많은 건축과 군사를 일으킨 일로 백성들이 부담을 많이 느끼고 고생했던 터라 새왕이 등극하자 세금을 가볍게 하고 백성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기를 원로대신들이 청원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젊은 신하들의 말만 듣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났고 이 기회에 여로보암이라는 장수가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는데 열두지파 중에 10지파가 여로보암편에 섰고 드디어 ‘이스라엘’이라는 새 왕국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남왕국 유다, 북왕국 이스라엘로 오늘 날 우리 한국 처럼, 분열왕국 시대가 된 것입니다. 열지파가 따르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이루었지만 여로보암에게 는 한 가지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남왕국 유다 땅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일년중 세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성전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갈 터인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설까봐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제단을 만들어 모셔놓고 레위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아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여로보암왕이 벧엘 제단에 나가 단 곁에서 분향을 합니다. 그때 한 예언자가 느닷없이 외치기를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요시야라는 아이가 다윗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기서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들을 네위에 제물로 바칠 것이며 그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태울 것이다' 그리고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로 지금 이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던 재가 쏟아질것이다.

이 말을 들은 여로보암왕이 격노하여 그를 가르키며 저놈을 잡아라하고 외치자 즉시 왕의 팔이 마비가 되어 굳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예언대로 갑자기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러자 여러보암왕이 놀라 ‘제발 내 팔을 다시 성케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 예언자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왕의 팔이 다시 정상대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왕이 이 선지자를 회유합니다. 나와 함께 왕궁으로 가시지요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이 무명의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3 : 7 ∼ 10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이 이름없는 선지자의 신앙 자세를 본받아야 합니다.

불의한 자와는 왕국의 절반을 준다해도 함께 앉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노라.

우리는 요즈음 불의와 타협정도가 아니라 불의를 자청하고 나선 사람들이 들끓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인, 국회의원, 고급권력자, 은행원장, 시장, 도지사, 공사사장, 종교인들,등등의 많은 인물들이 불의와 타협하고 줄줄이 구속되고 지방 공무원 집에서 수억원의 돈 다발이 발견되고 본인은 해외로 도망하고 일일이 거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권세를 부리다가, 요새 한창 유행하는 단어로 꼼수를 펴다가 결국 발각이되어 줄줄이 잡혀가면서 ‘나는 아니다’라고 잡아 떼다가, 결국 감방으로 구속 되어가는 등등의 사건들을 끊임없이 뉴스로 거의 매일마다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왕상 18 : 21)

여러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깨끗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오늘도 찾으십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인물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 (37절)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나 받기를 원하시는가 하면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출 34 : 14에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뜨겁게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태리의 성자 프랜시스는 부유한 집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베르나르드는 포목상인 이었는데 아들인 프랜시스가 자기 대를 이어 세계적인 부호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프랜시스는 오직 교회를 사랑하고 기도에 열중합니다. 수도사가 될 꿈을 얘기 합니다. 아버지는 자기 계획과 꿈이 깨어지자 실망하고 분노하면서 아들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도 끝까지 고집을 꺽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최후 통고를 합니다.

네가 유산을 받아 아버지를 이어 거상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한 푼의 유산도 줄 수 없으니 집을 나가 거지가 되든지, 그렇게 되면 부자지간의 연도 끊겠다고 선언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랜시스는 주님을 더 사랑하여 ‘아버지에게 받은 이 옷도 돌려드립니다’하고는 겉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드리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린채 이제 저는 예수의 제자입니다 선언하면서 수도사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제일주의자로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주님께 나온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버지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은 바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사람과 방불한 100세에 아들을 얻고 나니 하늘을 나르고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40에 아들을 봐도 천금을 얻은 것처럼 싱글벙글하고 50에 아들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 같이 자랑하는데 100세에 아들을 얻었으니 그 아들외에는 눈에 뵈는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보이지 않았는가 봅니다.

하나님께서 보자보자 하니 너무하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셨습니다.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이 대답은 했지만 날밤을 새우고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들을 제단에 바치러 갑니다. 그때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창 22 : 7 ∼ 8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들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칼을 들어 아들에게 내리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놀라셨습니다.

내가 너의 믿음을 보았노라. 칼을 멈추어라.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을 내가 보았노라. 그러시고는 수풀에 걸린 산양(山羊)을 한 마리 제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위해 천금을 내어던진 프랜시스는 성자가 되었고 아들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사랑을 드리는 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째 : 십자가를 지는 사람 (38 ∼ 39)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십자가는 사형도구 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죽을 사형도구를 스스로 지고 형장까지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시는 동안 너무 무겁고 힘들어 넘어지며 쓰러지기를 14번이나 하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넘어질 때마다 로마군병의 채찍은 사정없이 등짝을 내리쳤고 살갗은 벗겨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형극의 십자가를 목걸이를 하고, 장식품으로 집에 걸어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피묻은 십자가요 고난과 희생이 담겨 있는 십자가 입니다.

38 ∼ 39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내가 진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라야 합당한 제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자로 된 중국 성서의 성구(聖句)중에 나오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吾 生 敎 死

吾 死 敎 生

‘내가 살면 교회가 죽고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불명예, 치욕, 수치, 죽음을 의미합니다. 명예와 영광과 부와 칭찬을 바라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어제 교회 청소를 책임구역원 당번 팀들이 나오지를 못해서 두 분 집사님들이 대신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다가 아파트 경비원에게 쫓겨나고 문전박대를 받는 것, 그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집안에서 할 말 못하고 참고 죽어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요. 십자가에 달리는 자는 세상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고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정과 욕심을 다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같이 길을 가다가 앞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데 모세 할아버지가 나오더니 십자가를 하나씩 골라지고 가라 하십니다.

그런데 십자가 크기가 서로 다릅니다. 작은 것, 보통 것, 큰 것이 있습니다. 그래 서로 눈치를 보면서 어떤 이는 작은 것, 어떤 이는 큰 것을 메고 갑니다.

큰 것을 고른 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뒤쳐져서 갑니다. 작은 것을 고른 이는 휘파람을 불며 앞장서서 갑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앞장서 갔던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던 사람이 헐레벌떡 돌아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계곡이 있는데 뛰어 넘기는 강폭이 너무 넓고 다리를 놓자니 십자가가 작아서 못 건너가고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큰 십자가를 진 사람이 그곳에 도착해서 십자가를 내려놓으니 꼭 계곡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는 재밋는 예화가 있습니다.

마 16 : 24 ∼ 2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십자가를 지는 사람,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도, 하나님 제일주의 성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님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주님의 부름받고 쓰임 받는 일꾼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