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겸손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하는 자, 자기의 죄 때문에 슬퍼할 줄 아는 자는 자연히 그 마음이 온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사람의 마음이 온유하기보다는 거칠고 억세고 저돌적이며 강력하여야 승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어머니가 "돼지야"하며 별명이 "돼지"인 자기 아들을 불렀더니 그 아이는 "어머니, 나는 돼지가 아니라 호랑이가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돼지나 강아지가 아니라 호랑이나 사자나 독수리같이 강하기를 원합니다.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을 보아도 어떤 나라는 창을 움켜쥐고 있는 독수리를 국장으로 삼고 있고 어떤 나라는 사자를 국장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정복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현대인의 심리입니다.
호주라는 나라에는 많은 타조와 캥거루가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국장으로 삼고 있습니다. 캥거루는 평화스러운 동물입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면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와서 먹을 것을 먹으며 주머니 속에 새기를 넣은 채 재롱을 떠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타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스러운 동물, 타조와 캥거루를 나라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그 나라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부드럽고 온유합니다. 그래서 그 넓은 땅을 적은 인구가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을 받는다. 유순한 자, 겸허한 자, 신사적인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음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역리적(逆理的)인 복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고,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평화를 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심령이 온유한 성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슬이 온 지면을 덮듯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심령에. 우리의 성품 속에 온유함으로 촉촉이 적셔져서 우리의 삶 전체를 생명력 있게 풍성하도록 인도해 주시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온유의 희랍어의 뜻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겸허하게 예배하는 마음'이요, 내 형제와 이웃에 대하여는 '존경하고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즉 남을 존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극단(extreme)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쪽이든지 극과 극에서는 것은 온유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극과 극에 서다가 보면 부러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유한 것은 부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강한 것은 부러지기 쉬운 것입니다. 동양 철학에서도 '중용'을 강조하는데 이 중용이 바로 온유의 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론에서도 온유를 하나님의 덕이라고 말한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때를 가려서 분노하자는 의미에서 옳은 시간에 노하며 그릇된 시간에 분노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온유한 자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온유하다고 해서 의분도 갖지 않는 무능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의분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모른다고 물러서는 나약함이 온유는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옳은 일에서는 분노를 가질 수 있는, 어떨 때는 가장 나약한 것 같지만 어떨 때는 강자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 온유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두 극단에 서지 않는 것을 희랍어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2.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동물에게 적용해서 말한다면 사람의 말을 잘 듣도록 길들여진 동물을 온유한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것을 인간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본능과 감정을 잘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을 가리켜서 온유한 성품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 감정들을 다스리지 못해서 해서는 안될 말과 행동을 저지르는 실수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일단 실수한 것은 다시 되돌려 놓지 못하는, 즉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양심에 의해서, 진리에 의해서 자신을 다스리고 나아가서 본능까지 다스릴 수 있는 이런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잠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내 마음을 잘 제어할 수 있는, 내 마음을 온유한 성품으로 잘 훈련된 인격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3.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시25:9, 147:6)
온유한 마음을 희랍어로 쓸 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씁니다. 온유와 겸손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무지와 연약함을 깨닫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배움의 자세가 겸손이요 온유의 마음입니다.
자기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서 자신에게 충고를 할 때 그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때로는 자기의 함이 부족할 때 남의 힘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온유한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25편 9절에는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시는 하나님,
시편147편 6절에서는 겸손한 자를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다.
이사야29장 17절에서는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성품이 늘 항상 온유와 겸손함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받고 하나님의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런 삶에 거하여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 37편 1절로 11절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찌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찌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는 인하여 불평하여 말찌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찌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구절들 입니다.
1. 온유한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입니다.(창12:22, 눅5:5)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서 때로는 훈련을 시킵니다. 이것은 순종이라는 것을 통해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식을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은혜를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격이 급한 베드로를 훈련시키셔서 그의 불타는 정욕과 끊없는 정열을 고상한 목적으로 이끌어 올려서 세계를 정복하는 복음 전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 마태는 교활하고 냉철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훈련시켜서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고쳐 놓으시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그 개성대로 훈련시키셨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힘과 정욕을 빼놓은 것이 아니라 타고난 그 기질을 좋은 방향으로 돌이켜 놓는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온유한 자는 마음의 평정을 찾는 자를 의미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찾는 사람은 온유한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마음은 몹시 불안하고 마음의 평정을 제대로 갖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학자의 말을 빌리면 미래의 핵전쟁은 단추 하나만 누르면 전 세계는 45분 안에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단추를 누르는 사람은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혹 실수로 단추를 누르고 보니 세계가 불바다가 될는지도 모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마치 큰 트럭에 쫓겨 도망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혹시 집에 불이 나지나 않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쫓기는 것이 현대인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찾는 사람이요, 균형을 찾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갈등과 압박감과 긴장감과 강박관념을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친 강박관념에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착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지 않을까?' '내가 손해는 보지 않을까?'
그래서 너무 이기적인 생각에 집착되어 그것이 도리혀 불안하고 초조하게 합니다. 피해 의식을 가집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와서도 '무슨 피해를 입지나 않을까'하며 염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이 놀랍게 진보되었고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진 무기들이 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세계를 점령할 사람은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 영적으로 건실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대로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 예수님의 균형 잡힌 인격, 예수님의 안정된 마음씨를 배우고, 나 자신을 교정하기 위해서인 줄 압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긴박감과 불안감과 강박관념에서부터 해방되어 정상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의 현대적인 의미는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평형을 찾아 균형 잡힌 인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 받음으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2.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압니다.(엡4:2, 딛3:2)
온유한 성품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아는 관용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4장 2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책망하고 비판하고 무관심하고 용서하지를 않는 것 등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디도서 3장 2절에는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부터 보고 장점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현대 심리학자는 인간의 심리적인 가장 중요한 동기를 어떤 사람은 '사랑' 어떤 사람은 '쾌락' 어떤 사람은 '의미' 어떤 사람은 '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우리 현대인의 마음속에 자신을 존경하고 싶은 마음, 남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부터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모든 사람들은 성공의 원리를 찾고 있습니다.
두뇌가 명석해야 되고 I.Q가 좋아야 되고 또는 상식, 지식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만 참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온유하여 남을 존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맺을 수 있습니다.
관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승진이 잘 되는 사람이라든지 어려운 가운데서도 사업을 잘 해 가는 사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러한 분들은 대부분 인간관계가 원만해서 온유한 성품으로 남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은 남을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성공의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신앙이 조상이요, 복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가나안땅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믿음의 결단력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의 성품이 온유했던 점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네 고향, 친척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나섰습니다.
자기의 종들과 조카 롯의 종들과 다툼이 나서 땅을 나누게 될 때에도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고 하면서
기름진 소돔과 고모라 땅을 롯에게 양보하고 떠났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요구하실 때에 아들까지 하나님 앞에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의 성격은 온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차지했습니다.
눈에 보기에 좋았던 소돔 고모라를 성급히 택한 조카 롯이 그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결국 크게 실패한 것과 아브라함의 성공을 비교해 보면서도 우리는 큰 교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동안 자기 소유라고는 지닌 것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없었습니다. 조그만 오두막 집 한 채라도 지을 땅덩어리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만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하고 형제와 이웃을 위하여 살다 갔습니다. .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궁중에서 닦은 지성과 의지로 자기의 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했을 때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멀리 미디안 광야에 가서 양들을 키우면서 온유함을 보았으며 40년 동안의 목자 생활을 통하여 훈련을 받은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성취시킨 것입니다.
임마누엘 칸트((I. kant)는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질 수는 없다. 인간은 언제까지 목적이 되어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본 받아 남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십시다.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중심으로 온유한 마음을 넓혀서 영적인 기업을 풍족히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온유한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입니다.(약1:4, 마11;11:39)
야고보서 1장 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분낼 만한 일이 있어도 참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참고 나를 중상 모략하는 사람이 있어도 참고 그것에 대해서 반항하거나 원수 갚을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참고 견디는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22장 51절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최고의 교훈으로 푯대를 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나서 내려오셨을 때에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주님을 잡으로 온 군병들을 보고 베드로가 성질이 급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칼을 빼서 주님을 잡으러 온 한 사람을 칼로 내리쳐서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그 귀를 다시 붙혀주시면서 성질 급한 베드로를 향해서 그리고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까지 참으라.".
이 말씀 한마디를 우리가 가슴에 새길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애를 가장 복된 생애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향해서 항거하고 대적해 온다고 하더라도 "이것까지 참아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온유는 내 힘으로 얻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과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상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힘들지만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멍에를 메고 인내하면서 주님을 따라 갈 때에 온유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항상 인내함으로 온유한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이러한 진실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렇게 됩니다.(시37:1-11)
1. 온유는 중생한 결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벧전3:8, 약3:17)
온유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거듭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야고보서 3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온유한 성품은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로 거듭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부터 거저 주시는 온유함의 선물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와 같이 혈기 많았던 사람도 민수기12장 3절 이하에 보면은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지는 온유의 은혜를 얻어지게 되니깐 이 지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날마다 날마다 죽노라, 나는 만삭되지 못한
죄인 중에 괴수라고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하기까지 겸손한 사람으로 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온유한 사람에게 큰 일을 맡깁니다.(민12:1-3, 잠16:32)
민수기 12장 1절로 3절에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영도자로 삼으신 것은 그의 살인까지 한 그의 과격한 성격이 온유한 성품으로 바뀌어 질 때에(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 그를 민족의 대 지도자로 삼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잠언 16장 32절에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3. 땅을 차지하고 풍부함으로 즐기게 하십니다. (시37:11, 벧전3:23)
하나님께 전적으로 지배를 당하는 사람, 하나님께 항복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즉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 고집과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하나님 섭리와 계획에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보다 훨씬 좋은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혹 여러분의 자녀가 뜻했던 대로 진학하지 못해서 실망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또, 하고 싶었던 일들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염려하고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의 뜻보다 더 훌륭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여러분의 계획보다 더 훌륭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뜻과 좋은 계획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믿고 순종할 때에 더 좋은 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지배를 당하는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했습니다.
욥기서를 읽어보면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자식을 많이 거느렸고 재산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식도 재산도 다 잃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온 몸이 가려움 병으로 헐어서 기왓장으로 긁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의 아내가 욥을 향하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고 친구들도
죄값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힐난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고
"벌거숭이로 왔다가 벌거숭이로 돌아갈지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할지니라"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것이 욥의 온유한 성품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욥은 나중에 갑절의 복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여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혹 우리에게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분을 내되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분을 벌컥 내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일 수 없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어긋나는 것을 볼 때에는 의분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분을 품은 적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이 소, 양을 파는 장사 터가 되었을 때 채찍을 들고 다 쫓아내셨습니다. 의분이요, 공의입니다. 의분 까닭에 온유를 평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 순종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은 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닌 치아는 단단해서 우리가 굳은 음식을 먹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이 치아는 오래가지 못하고 부스러지고 빠집니다. 그러나 혀는 물렁물렁한 것이지만 일생 동안 우리의 식생활을 도와줍니다.
성품도 이와 같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장수하는 것도 보면 성을 많이 내고 급급해 하는 사람이 장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유순한 사람이 장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솝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바람과 해가 지나가는 사람의 외투를 벗기는 시합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리 센 바람을 불게 했어도 그 사람의 외투를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이 세어지면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욱 외투를 여몄습니다. 나중에 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해는 구름을 벗기고 따듯한 햇볕을 내리쬐었습니다. 외투를 입고 가던 사람은 " 왠 날씨가 이리 변덕이야"하며 외투를 벗고 말았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점령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정복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의 기업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들에 많은 새들이 노는 것을 봅니다. 이 땅에 맹수는 없습니다. 있다면 동물원의 우리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참새, 오리 같은 것은 마음대로 다닙니다. 유순한 짐승들이 땅을 차지하고 맹수들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늘 온유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얻을 사람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우생학적(優生學的) 역사와 구속사적(球贖史的) 역사입니다.
우생학적 역사는 '양육강식(弱肉强食)', 힘있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역사입니다.
히틀러(A.Hitler)가 그러했습니다. 나폴레온(Napoleon I), 뭇솔리니(B.Mussolini)가 그러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우생학적 역사가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유약해 보이는 구속사적 역사, 예수님의 온유와 사랑만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차지해야 되겠습니다.
마하트마 간디(M.Gandhi)는 무명옷에 5척밖에 되지 않는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그의 유명한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를 통하여 인도를 독립하게 했습니다.
1930년 3월 12일, 그의 온유한 무리들은 '소금의 행진'이라고 하는 행진을 했습니다. 소금을 만드는 곳을 향하여 '소금 전매법'을 반대하며, 인도의 독립을 외치며 나아갔습니다. 그는 수차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총이나 칼 한 번 들어보지 않고, 돌 하나 던지지 않고, 300년동안 지배하고 있던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온유한 자의 마음에 평화가 깃듭니다. 새로운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을 본 받아 온유한 삶을 사심으로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복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0) | 2012.09.18 |
---|---|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0) | 2012.08.18 |
하나님이 찾는 사람 (0) | 2012.06.30 |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0) | 2012.06.24 |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지 말라 (0) | 2012.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