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약 1:22-27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어느 교회 여전도회 회장님이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은 부동산 투기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에 부동산 투기에 일주일 내내 열심히 아파트와 땅을 보러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주일저녁 여전도회헌신예배의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주일 오후에도 이곳저곳 아파트와 땅을 보러 다니다가 저녁예배시간이 다되어서야 급히 교회에 오게되었고 사회를 보러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묵도를 위한 시편을 낭독하고, 찬송을 부를 시간에 경건한 모습으로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찬송가 109동을 부르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자기가 시무했던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 장로님은 일년 365일 동안 하루도 새벽기도회를 빠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 교회에 도착하는 동안에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인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인사를 안하는 이유가
'하루를 시작하면서 거룩한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기 전에 어떻게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 어느 해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인하여 교회 인근의 상가가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교회에 양수기를 좀 빌려달라고 했을 때, 이 장로님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 집에서 사용하는 거룩한 기물을 어떻게 교회 밖에서 사용하도록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장로님의 반대로 교회의 벽 선풍기를 3년만에 달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면서 그 한 시간을 참지 못하여 부채질을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경건 생활을 하는 분들이 한국교회에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두 분의 경우를 보면서 과연 그것이 참된 경건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고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이런 부류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과연 세상인가를 먼저 진단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속화(俗化)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속화(secularity)란 말은 경건(敬虔)이란 말과 대조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속된 생활과 경건한 생활의 차이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지을 때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 거룩하게 지었습니다. 이때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본래 거룩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대화의 상대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대화란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을 의미합니다. 의사소통으로서의 방법이 바로 언어생활입니다.
<말(言語)>이란 품고 있는 생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은 이 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에덴동산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완전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意思疏通)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아픔도 눈물도 저주도 흑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인간을 유혹할 때 무엇으로 유혹하였습니까?
말로 유혹하였습니다. 말은 말인데 거짓말로 유혹하였습니다. 진리를 거슬리는 거짓말로 인간을 타락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인 경건을 속화(俗化)로 변질시켰습니다. 그 결과, 타락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에게 이제는 경건함 보다 세속적인 것이 더 친근하게 되었고, 말도 타락해서 세속적인 속어적(俗語的) 표현이 더 인간적인 것이라고 하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 생활의 타락은 말의 타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사탄은 믿는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위하여 함부로 말하게 만듭니다. 거짓말을 하도록 유혹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언어생활의 경건성을 회복하여야 하겠습니다.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하는 말을 원문에 가깝도록 이해하려면 이 말을 KJV성경에서는 bridle(고삐)라고 번역했고, 현대어로 번역된 New Living 번역에는 control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타락한 인간이기에 혀에 고삐를 물리지 않으면, 또는 혀를 조절하지 아니하면,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되면 언어의 타락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는 생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말이 순화(純化)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俗化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말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영적(靈的) 산물(産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에는 항상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혀에 재갈을 물리라고 하였습니다.
함부로 내뱉는 말, 또는 거짓말을 좋아하는 것은 경건 생활과는 거리가 먼 생활입니다. 진리의 말일수록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거짓되고 罪된 것일수록 말이 많아지고 길어집니다.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끼리끼리 동류의식을 형성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한패가 되어 서로 짝이 됩니다. 그리고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따돌려 놓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들로 차 있습니다.
예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女中生들의 핸드폰 통화 내용입니다.
A - "나 오늘 NRG 콘서트 갔다가 졸라 열 받았다. 줄 섰다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 웬 량생이가 내 자리에 와 있는 거야. 계속 거기 있었다구 생구리까면서 빡 돌잖아. 맞장떠서 쪽 주려다 괜히 량생이 옆구리 찔러 산타일까봐 야리기만했어"
B - "병신, 후달렸구나? 후까시까다 안되면 째면 되지. 이제와서 숑숑되긴. 야, 근데 걔 봤냐? NRG 빼깔이. 그 머리 디게 짧은애 말이야"
A - "어, 열라 멋있더라. 짱이나 빵들리나 졸라 끝내주더라. 넌 오늘 뭐하고 있냐?"
B - "집에서 죽 때리면서 TV만 봤지. 종일 삐삐가 캔디잖아. 재수 똥튀기는 따순이도 근사한 깔따구랑 대학로로 놀러간다는데."
A - "누구 희연이? 걔 구리야. 애들 뒷다마까는거 들으니까 걔 따되고 나서 툭하면 구리래. 담탱이한테도 그러는데 뭐. 생까버려..."(담임선생한테도 그러는데 뭐 모른 체 해버려...)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알겠습니까? 모를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① 졸라(많이). 졸라 열 받았다=많이 열 받았다는 뜻이고,
② 량생이(불량학생)이라는 말. 웬 량생이가 내 자리에 와 있는거야(웬 불량학생이 내 자리에 와 있는거야).
빡돌다(화나다) / 후달리다(겁내다) / 짱(최고) / 야리다(노려보다) / 빼깔이 (빽댄서) / 담탱이(담임선생) / 생까다(모른체하다)
이런 속어들 속으로 우리네 청소년들이 물 들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경건한 말보다 자기들끼리의 한패 되는 타락한 말로 동류의식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죄는 자기와 같은 또 다른 동류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3. 성도들은 이런 환경에서 언제나 혀에 재갈을 물리고 살아야 합니다.
타락한 막말은 경건 생활에 합당치 못하다고 했습니다.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덕을 끼치지 못하면 그것이 경건 생활에 지장을 준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 회복도 회개하는 말로 열려집니다. 성경 말씀에도 여러 곳에 이 말에 대한 교훈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그리스도와 같이 닮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지의 옷을 입으면 거지처럼 말이 나옵니다. 王子의 옷을 입으면 왕자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옷이 우리의 모든 부끄러운 것을 가리워 주듯이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용하는 言語는 이렇게 시대적으로 많이 변합니다. 똑같은 언어라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변하게 되는 것은 어느 언어에서나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 외국에서 다년 간 선교하다가 다시 한국에 왔을 때 겪은 선교사의 경우를 소개합니다.
옛날 靑年部 때 지도했던 한 姉妹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 참 예뻐졌구나!"
그랬더니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근이지요!"
"뭐? 당근? 당근이 뭐야?"
"당근도 모르세요? 말밥이요!"
한 남자 청년은 제가 온 것을 반갑게 맞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반가워요, 언제 한 번 제가 쏠께요?"
뭐? 넌 또 뭘 쏘냐?....
쏜다는 말이 밥을 사겠다는 말로 변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쓰는 언어는 그 처음의 본질과는 사뭇 다르게 쓰이고 있는 것이 많은데, 문제는 그것이 성경 속의 단어에서도 간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그 뜻이 많이 달라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경건"입니다. 여러분은 '경건' 혹은 '경건하다' 라는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체적으로 우리가 '敬虔'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단순히 떠올리는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서두에서 예화로 말씀 드렸듯이 예를 들면 금식기도, 새벽기도, 절제되고 엄숙한 예배생활과 언어생활, 주일성수, 금연, 금주.....등등입니다. 즉 절도 있고 절제된 말과 행동, 그리고 엄숙한 그 생각들.... 다시 말해 ??경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외형적인 틀로써의 이해를 먼저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기독교의 영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경건' 이란 말의 뜻은 외형적인 것과는 정반대의 말입니다. ‘그리스도교 대사전’에 의하면, 이 단어를 이렇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경건이란, 성도가 가져야 할 한 가지 덕목으로 외형적이기보다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內的인 태도를 말한다."
경건은 본래 외형적인 것이 아닌데, 우리는 이 경건을 오히려 외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우리의 유교적 바탕 때문일 것입니다만,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그 의미의 폭이 좁아져서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생활을 나타내는 종교적 단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참된 경건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경건의 참 뜻을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읍니다. 성경 66권 중에 경건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바로 구약의 스가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하는지 스가랴서 전체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인지 그 경건을 말해주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위해 먼저 경건치 못한 것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거짓된 경건을 말할 때'금식' 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슥7:5-6)
이스라엘 백성이 70년동안 해마다 5월과 7월에 금식을 해 왔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의 모습은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금식 자체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경건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엄숙하고 절제된 예배를 70년 동안 드렸다 해도, 또 금식과 금욕으로 절제된 생활을 70년 동안 했다 할지라도, 또 평생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교회밖에 모르는 생활을 해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이 그 안에 없다면 다 무효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경건의 뜻을 바로 9-1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슥7:9-10)
즉 재판관들은 진실한 재판을 하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 즉, 약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제일 먼저 가져야 할 경건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더욱 이 스가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덕목은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8:16-17)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인간관계에 있어서 진실을 말하며 너희 가정과 직장에서 진실하고 거짓을 행치 말 것이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하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라. 너희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비방하거나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스가랴의 말씀은 신약에 와서 야고보가 다음과 같이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6-27)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은 무엇입니까? 주초의 문제입니까? 절제되고 엄숙한 예배의 문제입니까? 거룩한 표정과 세련된 고급스러운 말과 위엄 있는 걸음걸이입니까? 일년 내내 아침 금식을 하면 되겠습니까?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입니다. 그리고 경건은 사람들을 향한 진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한국기독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경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으니 하나님의 원하시는 경건을 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경건을 너무나도 좇아 왔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익숙하고, 밤을 지새워 기도하는 데는 선수들입니다.
연초가 되면 소위 영성집회를 하는 기도원들은 만원이고, 교회들마다 일년 열두 달 새벽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세계 교회를 놀라게 해 왔으며, 구름 떼 같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많은 교인들의 모습을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전통이고 자랑스런 모습입니다.
한국인이 사는 곳에는 세계 어디에나 교회가 생기게 됩니다. 중국사람 가는 곳에 중국음식점이 생겨나듯이, 세계 어딜 가나 한국사람 가는 곳에는 한인교회가 세워지지만 그래서 세계 어디에서나 한국 사람이 사는 곳에 한국 사람들이 존경을 받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호주 시드니에는 한인교회가 2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가 세워지는데 한국사람들의 위상은 날로 낮아지고만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인은 많아지는데 우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길가에 버려져 밟히는 지경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장로라, 안수집사라 하며 같이 사업하자고 여러분에게 다가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무조건 믿겠습니까?
교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진실이 사라졌습니다. 온갖 거짓이 난무합니다. 비방과 욕설과 시기와 질투가 사회 곳곳에서 신앙인들이라고 자처하는 기독인들의 입과 손과 마음을 통해 전달이 되며, 교회 내에서도 똑같은 행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말 바울의 한탄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진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적어도 교인이라면, 말이 진실해야 합니다. 행동이 진실해야 합니다. 친구들 간에도 신뢰가 되고 진실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 앞에서, 자녀들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일터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보증수표처럼 진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가랴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호와께 기억된 자》입니다.
즉 스가랴 선지자의 말대로 경건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가랴서의 주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사람들 앞에서 거짓되지 않을 때, 그리고 항상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꼭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바른 경건으로 스가랴 선지자 처럼 하나님의 인정받는 경건한 삶의 신앙인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자라 일컬음을 받은 안토니오는 자기의 가산을 다 나눠 가난한 사람을 주고 굴속에 들어가 은둔생활로 고행(苦行)의 삶은 산 사람입니다.
하루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리기를
<안토니오야, 네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자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헌 구두를 고치는 노인만은 못하다>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곧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구두 고치는 노인을 방문했읍니다. 노인은 성자(聖者)가 오므로 반가이 환영해 맞아 드렸읍니다. 안토니오는 노인에게 묻기를
"노인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십니까?" 노인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생활이 극난하므로 매일 구두를 고치는 것으로 생활비를 삼고 저녁에는 가정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에게 하나님 공경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과정을 삼습니다." 하였읍니다.
때때로,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이 물로 뒤덮이게 되면 정작 마실 물을 찾기가 가뭄에 물 얻기 만큼이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오늘날은 모든 것이 홍수시대입니다. 지식과 문화의 홍수, 정보와 첨단기술의 홍수, 주의 나 사상의 홍수,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어서 손만 뻗으면 무엇이든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현대인들은 목말라 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그 어느 것으로도 풀 수 없는 이 갈증은 참 진리 되시는 예수님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니라" (요한복음 4 : 14)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 흔들리는 이 시대에 무엇으로도 해갈되지 않는 당신 영혼의 목마름을 예수그리스도께 와서 해결하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기도〉하나님, 우리에게 잃었던 경건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신앙인이라 하면서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경건을 행치 못했던 저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생활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 앞에서 거짓을 행치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참된 경건을 소유하여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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