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마 6장 32절 - 34절)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의 추구 속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아무런 욕구가 없는 삶이라면 그는 온전치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욕구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의식주의 추구일 것입니다.
둘째로 신체적 정신적 안정의 욕구이며,
셋째는 타인에게 사랑 받고자 하는 인정의 욕구와 자아를 성취하고자 하는 지식 욕구, 그리고 끝으로 명예의 욕구 등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런 욕구들이 모두 성취되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들은 육체에 필요한 욕구들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영에 속한 사람의 욕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욕구는 영적인 욕구이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욕구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6장 32절로 34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제목으로 성도의 우선 순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구하여야 더 하십니다.
성도나 이방인이나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의식주의 해결을 위한 필요 조건들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세상 물질이 아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먹고 살아가는 문제나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성도의 주목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최고의 선'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는 단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먼저'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일에 우선권을 두고 제일 먼저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말씀은 아닙니다. 주께서 교훈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백성의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벧전1:10).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1.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마5:3, 10, 눅17:20,21)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의 통치는 구원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영생과(고후5:17), 궁극적인 몸의 구속(롬8:23), 그리고 피조 세계의 구속(롬8:19-21)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출발은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이는 성령에서 출발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능력과 만물이 하나님의 의로운 뜻대로 복종되어지고 사용되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 안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지는 것입니다.
밴 다이크(Van Dike)의 예화입니다.
로마의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 가서 부자는 천사의 안내를 받아 가며 천국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서 매우 아름다운 집 한 채를 발견하였습니다. 아주 근사하고 멋있는 집이었습니다.
부자는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이 집은 누구 집이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집은 당신이 거느리고 있었던 당신 종의 집이오』라고 천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당황한 부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천국에서 이런 집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불평했습니다.
천사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천국에서는 실수가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그가 보낸 재료로 이 집을 지었습니다.』
한참을 더 가다 보니 무척이나 낡고 허술한 집이 한 채 보였습니다. 천국에도 이런 허술한 집이 있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한 부자가
"도대체 이 집은 누구 집이오?" 라고 물었습니다.
『당신 집이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집이 내 집일 수 있습니까?"
『천국에는 오류도, 실수도, 착각도 없습니다. 이 집은 당신이 보낸 재료로 지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천국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내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고전4: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다고 고백한다면 미래의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해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그의 의(義)를 구해야 합니다.(롬14:17,약3:17,시89:14,잠21:3)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신1:17, 32:4, 암5:15,24). 이 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갖는 관계 속에서 의롭게 되는 것, 즉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을 찾고 이루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죄의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롬3:23, 5:12).
모든 인간은 구세주 예수 안에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사람을 입을 때까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를 이룰 자가 없습니다(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입은 자들은 성결과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갈급한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삶은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5:6). 그리고 이 의는 하나님의 무오(無誤)한 말씀에 계시되어 있고 구원함을 받은 자의 양심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을 순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공의로우신 통치자 하나님과 올바르고 아름다운 관계에 있으므로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의로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시편 89편 14절에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의 기본 원리가 바로 그의 '공의'였습니다. 결코 그의 백성이라고 해서 죄를 덜어 주거나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공의로운 통치의 한 방편으로 모압, 미디안, 암몬, 블레셋,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 등 이방 민족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들의 압제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생활은 잠언 21장 3절에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즉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개념은 성경이 말해 주는 교훈입니다(삼상15:22,23).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림으로 그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3.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롬12:10)
성도는 하나님의 도를 듣고 아는 것 위에 행함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거룩한 산 제사이며 또한 영적인 예배입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형제 사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로 구약에서 사용된 '형제'는 '친척'(창31:54), '동족'(출2:11), '동료'(왕상13:30), 또는 '동맹국'(암1:9) 등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한 부모의 자식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형제'는 다분히 육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약, 즉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부터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육적이며 외형적인 범위를 초월하여 영적이요 내면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젠 육체적인 피를 나누지도 않고 동족도 아니며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자이면 누구든지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아버지 대신 하나님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부르고 육적인 피 대신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사이이기 때문에 성도는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또한 '우애'하라고 하였습니다. '우애'란 ' 헬라어로 '(릴로스토르고스)란 말로 '혈육의 사랑을 가진' 또는 '상냥하게 서로 사랑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모두 한 혈육을 받은 관계로 알고 또 그러한 사랑을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같은 형제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형제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느낍니다. 그 이유는 형제가 한 부모에게서 한 피를 받아 가진 관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통해서 믿음의 형제들 역시 그러한 가족적인 사랑을 가지라고 권고하며 또 그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형식이나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사랑이어야 합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존경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앞서 가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풀어 표현한다면
'서로 높다고 싸울 것이 아니라 앞을 다투어 남에게 높은 자리를 물려주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곧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3)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이것은 겸손의 미덕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부족하고 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 겸손이야말로 형제 존경의 첩경이며 나아가서 성숙된 신앙인의 완성을 위한 초석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남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또 존경받고 싶어 하지만 기독교의 진리는 이를 배척합니다. 성경은 늘 자기가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먼저 주라고 교훈합니다(마7:12, 눅6:38).
이와 같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은 더 큰 것으로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가히 인간의 두뇌로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남에게 베푸는 자에게 이런 복을 허락하십니다.
4. 예물보다 형제와 화해를 먼저 해야 합니다.(마5:23,24)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목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화목제가 되셨습니다. 이웃과의 화목은 우리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우리의 이웃과 화목하지 아니하고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화목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본래 죄 가운데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이 필연적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건 결과적으로 지옥 불에 들어가야 마땅합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화목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그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요 긍휼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하여
첫째 지옥 불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을 맛보는 것입니다. 성도는 먼저 이 고통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죄로 인한 내적 혼란에서 벗어납니다. 죄는 또한 우리의 영혼을 혼란케 합니다.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 동안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유 없는 갈등과 내적인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평안과 기쁨을 거두어 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 죄의 장벽을 허무신 하나님께서는 잃었던 우리의 평안과 기쁨을 회복시키십니다.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영혼을 밝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세상을 밝게, 소망스럽게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성도들의 살아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우리 성도들도 형제와 화목하기를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5. 너희 안을 먼저 깨끗이 하라.(마23:26)
신앙생활은 꾸밈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겉이 아름답게 단장되었으면, 또한 안도 아름다운 인격과 온유와 겸손의 신앙의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안과 밖이 같지 않고 다를 때 성도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도, 소금으로서의 직분도 잘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중심에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간직될 때 우리의 의식도 거룩하며, 마음이 탐욕과 방탕에서 정결해질 때 얼굴도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철저하게 인간을 위하여 인간 편에 섰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과 부정의 무덤 깊숙이 칼을 꽂아 해부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내면의 죄성을 드러내 보이는 진실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 버림받은 세리나 창기의 친구였고, 사회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막벌이 어부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이 깨끗하지 못하면 더러운 것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이 깨끗해야 하며 날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빼어 버리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신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 받아들이는 겸허한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선교사 지망생이 몹시 추운 날 새벽 3시에 면접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선교국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시험관은 8시가 되어서야 나타났고 시험 문제도 초등 학생들에게나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제빵 업자라는 단어 철자를 말해 보시오'.
'2의 두 배는 얼마지요?' 등이었습니다.
지망생의 답변이 끝나자 시험관은
'합격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시험관은 선교사 임명식에서 그를 극구 칭찬했는데
첫째가 극기 시험에서의 합격이었으며,
둘째, 시간을 엄수한 데에 있었고,
셋째는 다섯 시간이나 기다렸던 인내 시험의 합격이었고,
넷째는 어린이에게나 하는 질문을 하는데도 겸손하게 답변했던 점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은혜는 성도로 하여금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선한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여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운다는 것을 기억하고 늘 자기 자신을 성결케 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6.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합니다.(막13: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13:10).
성도들이 정치와 종교 세력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압을 받고 그 앞에 서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증거자가 되어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려 함입니다.
성도들이 온갖 압력과 핍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그 신앙의 정조를 지킨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복음 전파의 효과를 지니겠습니까? 죽어 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만큼 탁월한 전도 효과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썩어지지 않을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핍박과 고난, 그리고 순교로 이어지는 기독교 역사는 바로 장엄한 선교의 역사였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목사였던 '알렉산더 더프'는 오랫동안 인도에 가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 고향에 그 뼈를 묻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식장에서 그는 인도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제안했으나 아무도 응하는 사람이 없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한참 후 깨어나자 그는 다시 단상에 세워 달라고 눈물로 간청했습니다.
그리고는 단상에 서서
'빅톨리아 여왕이 지원병을 모집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는데 우리 주님이 선교사를 보내고자 할 때는 한 사람도 없으니 섭섭한 일입니다. 나는 저들의 영혼을 위해 다시 인도로 돌아가 갠지스 강가에 묻히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감동을 받은 젊은이들이 자원하여 나섰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주의 복음을 만국에 전파할 선교 대열에 우리 모두가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랍니다.
7.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살전4:16)
「지금 곧 이곳에서」(Right here right now)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 보면 어느 날 수위 할아버지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한 창녀가 자살하려는 순간에 그녀를 붙들고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왜 귀한 생명을 끊으려 하십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사랑해 주고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을 깨닫도록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실질적으로 그녀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기쁨을 지니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고 기독교도 설자리가 없었을 것이며 우리 모두는 소망 없는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비참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죽은 자와 우리의 산 소망이 되셨습니다(벧전1: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부활함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살전4:14, 요5:28,29, 딤후2:8).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형제의 죽을 보고 우리는 안타까워하며 슬퍼하기 때문에 믿음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부활의 확신을 굳게 가져야 합니다. 물론 수백 년 전에 장사되어 흔적도 없이 썩어 버린 몸을 어떻게 살리며, 불에 타 없어진 육체가 새롭게 생길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을 지으시고 생명을 주시며 천지 만물을 말씀 한 마디로 무에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육체를 가진 상태로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고전15:35-38).
신앙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러므로 절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소망이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성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8.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습니다.(요일4:19)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입니다. 또 사랑을 해도 먼저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극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우리들에게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론하시면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사랑의 출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했던 쪽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고, 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이 세상을 선물로 받은 인간 쪽이었습니다(창1:26-30).
그러나 첫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속이고 대적했습니다(창3:6,12). 생명과 행복한 삶의 공간을 거저 받은 피조물로서 조물주에게 사랑 대신 미움, 감사 대신 불평, 복종 대신 불복종으로 되갚은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심판과 죽음의 지경에 놓인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증오 대신 사랑을, 심판 대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눅15:11-32).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 생명 길을 마련하시고 모든 인간들을 초대하셨습니다(요8:37,38).
먼저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값으로 독생자의 피를 지불하신 것입니다(히9:22, 벧전1:18,19). 사람들은 소중한 선물로 이웃 사랑의 정도를 나타냅니다(창22:12, 마13:44-46).
그와 같이 하나님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롬5:8).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되 입술만의 고백이 아닌, 자기 생명보다 귀한 아들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누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참사랑의 증거입니다. 성경은 약하고 어려움 가운데 처한 형제가 곧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마25:40). 따라서 우리가 우리보다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2)고 훈계합니다.
우리는 곧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는 바 형제를 미워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것은 이율배반적인 행위로서 그러한 자의 예배를 하나님은 가납치 않으십니다(마5:23,24). 주님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 형제를 사랑할 때 당신에 대한 가장 큰 은혜의 보답으로 인정하십니다(요15:12-14).
9. 먼저 내 눈의 들보를 빼라.(마7:3-5)
마태복음 7장 3절을 보면 예수께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자신의 들보를 먼저 깨달으십시오. 상대방의 눈에는 티가 들어 있지만 나의 눈에는 들보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십시오. 자아 성찰을 하는 사람은 결코 남을 비판하는 자리에 서지 않게 됩니다. 남을 비판하려는 그 유혹이 내 속에 왕성하게 일어 날 때마다,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헬라인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 가운데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사람은 두 개의 자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하나는 앞에 달고 다니고, 하나는 뒤에다 매달고 다니는데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집어넣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계속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뒤에 메고 다니는 자루에는 자기 자신의 허물을 집어넣고 다닙니다.
뒤에 있는 자루가 우리의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허물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자루는 남의 허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정말 채워져 있어야 하는 자루는 자기의 자루인 뒷자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과 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실수하는 유명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실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실수가 우리에게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촌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촌에 들어갈 수 없다는 냉대와 괄시와 박대를 받았습니다. "구세주 예수께서 들어가시는데 우리 일행을 무시하다니"하고 불평하던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서 선생님을 박대하고 우리를 냉대하며 괄시하는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모두 다 태워 버리고 맙시다."
이때 예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습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냉대했다는 것, 그것은 그들의 '티'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들을 태워 버리기를 원했던 제자들의 심정은 그들의 눈 속에 있는 더 커다란 '들보'였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복수와 분노의 감정은 다른 사람을 괄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들보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0. 이 모든 것을 주십니다.(마6:19-31)
삶의 여정에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환경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이상적인 환경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무거운 근심을 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는 인내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조건이었던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도 타락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따르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주에 관계된 욕구들 또는 육적인 온갖 욕구에 대한 염려로 인해 시달림을 받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한 추구로 일관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의 물질적 부요도 누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에 합한 지혜를 구한 솔로몬이 지혜 외에도 부와 명예와 권세의 복까지 받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임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왕상3:3-15).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더 하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 때 덤으로 받아 누리는 물질적 부요의 복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결국 성공적인 삶의 전체 조건이며 유일한 길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11. 더 하여 주십니다.(유2, 벧전1:2 벧후1:2)
유다서 2절에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아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지식이나 건강 따위와는 달리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자칫 타락하기 쉽고, 지식이 많으면 교만하기 쉽지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께 죄지을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평안과 자비가 공급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과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함에 따라 신실한 신앙조차도 마치 과학과 산업의 힘으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입니다. 하지만 삶의 이면을 보면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발전할수록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돌보심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예기치 않는 사태가 일어나서 사람의 생명과 건강과 재산을 앗아가는 것이 현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살 때 얼마나 행복했었습니까?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평화와 자유,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마음은 두려움과 공포로 전율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범죄를 지은 아담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동산 나무숲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음성으로 듣던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하나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사람을 어두움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보배로운 신앙을 갖게 되면 광명을 찾습니다.
온갖 방탕과 허탄한 신화를 좇다가 마음의 평안을 발견하지 못했던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죄로 고통 당하던 '루터'는 고통스런 죄악에서 벗어나고자 하루에도 수차례 고해 성사를 하고 금욕 생활을 하며, 계단을 혀로 핥으며 오르내리는 몸의 학대를 자행하면서도 평안을 얻지 못했지만, 신학교 강의를 위해 로마서를 연구하던 중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으로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배로운 믿음으로 말미암아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2)고 말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주님께 늘 기도와 간구로 더욱 더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바라며 이러한 은총 가운데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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