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하늘에서 내린 떡

거듭난 삶 2012. 11. 19. 11:00
728x90

       

                                         하늘에서 내린  떡

 

 

요 6:30-35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9절을 보면;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하면서 만나와 비교하고 있고,

 

58절에서도;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면서

 

 

만나를 생명의 떡되시는 예수님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생명의 산 떡이라는 사실과 구약의 만나 사건과 더불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16:1-4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 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율법을 준행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 만나 사건은 홍해를 건너 광야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사건입니다. 말하자면 만나는 광야 생활의 시작부터 그들의 양식이 된 셈입니다.

이 만나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신명기 8:1-2절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로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 40년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가장 큰 결론은 저들을 낮추시는 것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의 40년 동안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의 연속이었고,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백성은 반항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으며 발이 부르트지 아니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굶주린 적도 없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고, 아침에는 만나로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골고루 준비해 주셨던 때가 광야생활 4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왜? 그렇게 만나가 중요하냐 하면 만나 사건에서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굶어 죽게 된 지경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들의 원망의 근거였습니다. 우선 먹고살아야 하나님을 섬기지, 굶어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섬기겠느냐는 것입니다.

 

+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을 확보해 주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지의 여부를 보셨습니다. 또한 낮에는 더워서 못 살겠다고 불평을 할 때는 구름 기둥으로 해를 가려 주셨고, 밤에는 추워서 못 살겠다고 불평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면서 그들이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 지를 보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셨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셨건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래 광야 생활은 40여년 간이나 하도록 의도되었던 것이 아니라, 1년 미만의 단기간 동안이었습니다.

 

출애굽해서 시내산에 갔다가 가데스 바네아에 올라와 이스라엘의 열 두 정탐꾼을 보내고 이내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4장을 보면 그들이 돌아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거부합니다.

 

정탐꾼들이 와서 보고를 하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福地)인것은 사실이지만 싸워서 이길 승산에 없다고 원망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벌을 내리십니다.

 

민14:26-30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려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렇게 해서 광야 40년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광야 40년 동안은 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함이 있었고, 만나도 계속 내렸고 메추라기도 계속 잡혔습니다. 이 40년 동안 너희로 하여금 광야를 걷게 한 것은 너희를 시험하여 너희를 낮추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들이 배가 불러도 삼기지 않았고, 따뜻해도 섬기지 않았듯이 이제는 무슨 핑계도 갖다 댈 것이 없었던 시기가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그 만나를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한 영적인 양식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그들에게 하루를 존속시키지만 그 존속된 하루하루가 연결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에너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英國의 컬글튼 경이라는 유명한 그리스도인 富豪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컨글튼 경이 자기 집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게 만약 5파운드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이 말을 들은 컨글튼 경은 下女에게 다가가 "정말 그런가?"하고 물었습니다.

 

"주인님, 정말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컨글튼 경은 下女의 등을 다독거려 주면서

 

"내가 5파운드를 줄테니 이제부터는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렴."하고 말했습니다.

 

이게 웬 횡재입니까? 그런데 컨글튼 경이 정원으로 나가는데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10파운드라고 말하는데 아유 아까워" 또 다시 불평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일화는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는 불평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항상 만족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필요와 그 필요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당신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는 무엇입니까?

 

 

A.가장 근본적인 필요

 

현대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심리학자인 Abraham Maslow는

 

"인간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필요는 육체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것, 즉 생존을 위한 필요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최고의 필요는 자아 실현이다"라고 했습니다. 일리있는 지적입니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육체적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도 生存을 위한 필요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요한 6:에서의 벳세다의 들판에 모인 배고픈 군중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그 자체가 예수께서 배고픔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이웃의 빈곤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이웃의 빈곤문제를 책임져야 할 윤리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본문은 그것이 근본적인 해답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날 그 벳세다의 들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배고픔을 면했던 군중들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까? 좀 심한 말인지 모르지만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불안해하며, 불만스러워하며, 방황하며, 슬퍼하며, 배고파하는 군중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도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필요가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는

 

"근본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인간은 결코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기적을 체험한 후의 이들의 반응입니다. 그 기적 때문에 감격한 흔적은 별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 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30절)

 

그들은 이미 표적을 보았는데도 더 큰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31,32절)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 정도의 기적 가지고는 안됩니다. 아직 당신은 모세보다 못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를 내리게 하여 그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루 분의 양식을 채워 주는 이 정도의 기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적어도 40년간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이런 식입니다.

 

이 엄청난 기적을 맛보고도 주님 앞에 더 커다란 기적을 요구하며 끝없이 불평하는 그 당시 사람들은 만나를 내리시는 그 기적으로 만족한 흔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왜 항상 만나만 주십니까?"라고 투정하던 구약 백성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백성들은 아직도 그들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진정한 필요, 근원적인 필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근원적인 필요 두 가지’를 지적해 주고 계십니다.

 

 

B.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직면하는 근원적인 필요 두 가지

 

 

1)첫번째 필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37절)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앞에 오는 것, 그것이 근본적인 필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너희들의 근본적인 필요는 하나님이다."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42: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인생의 근원적인 필요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없이는 제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시편 기자는 알았습니다.

 

성 ‘어거스틴’도 오래 전에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내 영혼이 당신의 품에 돌아가 쉬기까지는 결코 평안함이 없었나이다".

 

 

 

2)두번째 필요/영생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가 하시니라"(40절)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힙니다. 내가 무언가 성취했다고 해도 그 기쁨은 순간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인생의 또 다른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무엇일까?" 결국 사람이 마지막에 직면해야 할 것은 차디찬 무덤입니다.

 

"나도 죽어야 한다. 그리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사실 앞에서 당신의 성공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인생을 향락한다고 하지만 그 쾌락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자유. 삶의 보람, 그것이 차디찬 한 줌의 흙 앞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中世 로마의 어떤 대학 正門 앞에 이런 큰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로마에 살고 있는 한 젊은이가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서 공부를 하고자 했으나 가난해서 뜻을 이루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자선사업을 하는 유명한 할머니 한 분을 찾아갔습니다.

 

"할머니, 저는 꿈이 있는 젊은이입니다. 학창 시절에만 저를 도와주시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 이 청년의 고백을 들으면서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청년이 하려는 계획이 무엇이요?”

"예, 우선 법과대학에 들어가면 열심히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는 변호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정의 구현에 힘쓰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변호사 사업을 좀더 확장해서 더 많은 사람들의 공익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할머니가 또 묻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늙겠죠. 늙으면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과 편리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머리를 긁적이던 청년이 대답합니다.

"죽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 청년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할머니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는 한푼도 투자할 수 없소!”

 

그 할머니와의 만남이 청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사건 이후에 자기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훗날 자기가 세운 대학 정문에 이 간판을 붙였다는 일화(逸話)가 있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삶의 이 궁극적 문제, 영생의 문제,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문제 앞에 할말이 없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오늘의 성취도, 성공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의 문제,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필요인 것입니다.

 

 

C.가장 근본적인 필요에 대한 대답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맏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

 

요한복음 전체에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일곱 가지가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선언 속에 담겨진 의미를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신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문제에 대한 대답인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나의 섭리자요, 나의 구속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 문제의 해답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만나를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신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32절)

 

하늘에서 내린 떡, 사실 그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이 말씀은

 

"내가 하나님이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영접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그 하나님이 믿는 자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이 해답이십니다.

 

2)예수님 자신이 해답이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날 때 그의 필요는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필요가 많았습니다.

 

우선 그에게는 독립이 필요했습니다. 마음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먼 나라에서 모든 것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던 그날,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그 필요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영접해 주신다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돌아오는 탕자 그리고 그 아들을 끌어안은 그 아버지의 음성을 기억하십니까?

 

"얘들아, 살진 송아지를 잡자. 잔치를 벌이자. 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이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라. 발에는 신을 신겨라. 그리고 새 옷을 입혀라."

 

이제 이 아들의 모든 外的인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그것은 탕자가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자연히 따라오게 된 것들입니다. 문제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얼마나 주실 수 있는 분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궁극적 필요 자체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예수님 자신입니다.

 

3)예수님 안에 참된 영원한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차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인류 역사상 누가 이런 엄청난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까?

 

"내게 오는 자, 나를 믿는 자, 나를 소유한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를 믿으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긴 믿지만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의 약속들을 어디까지가 진실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이 말씀을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크고 작은 수많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직장, 사업, 결혼, 재물, 성공, 성취, 등 수많은 문제들과 싸우고 있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신뢰했을 때 적어도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된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소한 필요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감히

 

"나는 결코 목마르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필요한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필요를 다 알고 계십니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주실 줄 믿습니다. 또 내 필요가 바꾸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면 주께서 내 시선(視線)을 조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나의 것'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에 나도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말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나의 생명의 떡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나의 아버지시라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不安에 싸일 필요가 없습니다.

 

 

[ 맺는 말 ]

 

우리의 짐이 무거워질 때, 더욱 은혜 내리시며,

우리가 힘겨워질 때 더욱 힘을 주시도다.

고통이 더해질 때 긍휼을 입히시고

시험이 더해질 때 평강을 부으시도다.

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을 즈음

우리가 쌓아 둔 그 모든 것이 고갈될 즈음

아버지의 풍요와 공급은 이제 막 시작되었도다.

 

아! 그의 사랑 끝이 없어라.

그의 은혜 측량할 길 없어라.

헤아릴 바 없어라.

이 작은 머리로는 , 무한하신 그 풍요와 그 능하심을 !

 

오, 주 예수여.

당신은 내게 주시네, 주시네,

또 다시 주시네. [애니 플랜트 ]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고통과 갈등을 안겨주는 많은 필요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이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께서 주님 자신을 저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찬송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생애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넘어서서 이 참된 기쁨과 만족을 되찾는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영원한 만족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월을 사랑의 계절로  (0) 2012.12.04
예수님의 양들   (0) 2012.11.27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0) 2012.11.06
위대한 순간  (0) 2012.11.02
순종과 믿음  (0) 2012.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