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양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요한복음 10장 1절-6절)
시카고 근교의 사우스 배링턴에 있는 Willow Creek Church를 담임하고 있는 빌 하이벌즈 목사님이 1987년에 쓴 책이 하나 있습니다. 제목이 너무 도전적입니다.
"Who you are when no one's looking"
“아무도 보지 않는 그 때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도 여러분을 보고 있지 않을 때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폐부를 향해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빌 목사님은 그 책을 읽어갈 때 반드시 마음속에 새겨 놓아야하는 것 하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당신의 人格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認定하심을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결코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정하심(God's approval)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그것은 마치 바퀴빠진 자동차 같은 느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좋은 크리스챤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두 다 아름다운 제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저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르게 되고 싶은 거룩한 욕심들이 다 있습니다.
공처가인 사장이 남들도 다 자기처럼 공처가인지 궁금해서 어느 날 사원들에게
"아내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내 쪽으로 모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저 쪽으로 가시오"고 말했습니다.
사원 전원이 사장 편으로 몰려왔는데 신통하게도 한 사람만이 저 쪽으로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장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아내가 무섭지 않소?" 그 사람의 대답입니다.
"오늘 아침 출근할 때 아내가 말하기를 사람이 많이 모인데는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요."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달라야 합니다. 믿어도 다르게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0년을 가도 뭐하나 고칠 수 없는 그런 삶은 살아있어도 믿음으로 살아있는 삶이 아닙니다. 역동적이지 않습니다. 10년 신앙생활의 역사, 아니 20년 30년의 믿음의 긴 역사를 자랑해도 나와 별 다르지 않는 삶이라면 그 삶은 차라리 짧은 것일수록 더 동정이 가는 것 아닙니까?
신앙의 우물을 더 깊이 파십시오. 더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십시오. 깊은 우물에서 솟아나서 갈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식혀주는 그런 주님의 양들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 일을 감당하게 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독특한 종교입니다. 구원에 관한 한 타협이 없는 종교입니다. 여기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의 산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고 말입니다. 마치 산꼭대기에 오르는 등정이 한길만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도덕적인 가르침은 비슷할지 모릅니다. 어떤 종교이든지 믿음의 훈련 과정과 방법은 유사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구원, 영혼을 살려놓는 구원의 길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와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중의 하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만은 기독교는 엄청나게 독선적입니다. 이 말은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닥치는 대로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길밖에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변질시키지 말고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대는 표준과 규칙을 상실해 버린 시대입니다. 원칙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고 저렇게 해도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만 크면 오히려 승리합니다. 그것 때문에 누구나 목청을 높이는 거예요. 아니 힘만 있으면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좇아갑니다. 권력과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그 과정에서는 원칙을 어겨도 상관없고, 표준에서 어긋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구원의 확실한 표준을 제시합니다.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절에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뿐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다른 곳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1절에 나타난 절도(kleptes: seducer, deceiver, crafty and dishonest man)라는 말이 바로 유혹하여 속이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구원의 길을 엉뚱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훨씬 더 설득력있게 말하고, 우리의 이성에 합당하게 말합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자유적 기독교 신앙인 목사의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답니다.
천사의 안내를 받아
이 곳 저 곳 둘러보는데...
어떤 곳에서는
불자들이 염불을 외우며
즐거워하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힌두교인들이...
다른 곳에서는
이슬람교인들이...
제각기 자신의 방식을 따라
신(혹은 궁극자)의 영광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즐거워하고 있더랍니다.
....천국은
어느 특정 종교인만이
독점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세계라면 이미
그 곳은 천국일 수 없으니까요...
구원이라는 것이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창조주는 이미
삶을 허락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거기, 그 곳에서"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주시지 않았을까요?
중요한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구원도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수단화하고,
사람 사이에 갈등을 심고,
인생의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종교라면,
그런 종교는 거부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숭고하고
아무리 훌륭한 종교라도...
그것은 우리의 생명과 삶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주님!
구원, 천국, 영생...
이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
윗글에 대한 댓글 두개 입니다
①“기독교가 살기 편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편안한 수단만으로 생각한다면 선교사님들의 순교는 무엇입니까? 목사님 목사님께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②“ 저는 님의 의견이 詭辯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어느 신학교에서 이러한 다원주의를 가르쳤습니까?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님은 절에서 道를 닦든지, 回敎徒가 되셨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서 힌두교도 구원이 있다. 라고 외쳤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다. 길은 달라도 다 정상으로 통하는 루트들이다. 그런데 자기가 오르는 루트만이 가장 옳다고 고집하게 되면 결국 히말라야에 오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고 그럴 듯하게 말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아 보이지요. 그런 독단적인 요소를 허물지 않고는 정말 보편적인 종교일 수 없다고 설득하려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진리를 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門 외에는 결코 다른 문이 있지 않습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양의 목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도대체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2절을 보실까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 라."
첫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문으로 들어가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뒷문이 아니라, 정문으로 들어가서 영혼을 만나 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 진짜입니다.
물질을 회복하는 것은 진짜 구원이 아닙니다. 사업을 잘 되게 해서 영혼을 대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만지셔서 고쳐 주시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그 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문으로만 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제일 중요한 영혼을 만지시는 분입니다. 다른 문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영혼 아닌 물질의 문으로 인간을 만나시지 않습니다.
권력과 명예로 영혼의 문제를 그럴 듯하게 은폐하면서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영혼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을 미혹하려고 합니다. 돈으로 미끼를 삼아 영혼을 팔아 버리게 합니다. 권력을 안겨다 주면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것이 다른 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영혼의 문으로만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어쩌면 주님을 만나는 경험이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일는지 모릅니다. 얼핏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이 아니라 물질이다, 아니면 나의 명예회복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은 이차적인 문제라고 말합니다. 일차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영혼을 만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피하려고 합니다. 지금 나에게 절박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 영혼의 일에 예수님께서는 개입하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속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질이 정문이 아닙니다. 사업의 성공이 정문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영혼의 문으로 주님은 들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은 바로 이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영혼부터 챙겨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믿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표준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아니면 어떠냐? 도덕적으로 올바르면 되지 보이지도 않는 영혼 이야기는 뭐냐? 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질서를 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님의 모습은 3절에 나타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만나 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절대로 단체로 부르지 않습니다.
당신(You), 그리고 나의 이름 하나 하나를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뭉뚱그려 떨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덤으로 붙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결단입니다. 왜요? 주님이 개인적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답하여야 합니다.
"교회 다니세요!"가 아닙니다.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아십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개별적으로 부르십니다.
아무리 내가 이 땅에서 여러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어도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구별되어 나와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듣고 빠져 나와야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묻혀 있어서 예수님이 불러도 못 알아듣는다면 아직까지 나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보지 못한 것입니다. 어떠한 곳에 있어도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빠져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밀하게 아시는 것이지요. 내 성격, 내 기질, 나의 장점과 나의 약한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만약 부르시면 모두 대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양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4절입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예수님은 앞서 가는 분입니다. 앞서 가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과 나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인도자입니다.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따라 오시는 분이 아니라 내 삶의 앞에서 나를 인도하시면서 가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3절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인도(引導)하여 내시는 분입니다. 인도하여 낸다는 말은 lead them out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디에서 빠져 나오도록 해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빠져 나오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면, 두 번째 목표는 어디를 향하여 가도록 인도해 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부르시지만 않습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도록 목표를 향해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표가 또 다시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왜요? 주님이 우리 앞서 가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의 삶 앞에 예수님께서 앞서 가고 계십니까?
우리 삶의 목표는 과연 예수님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음성을 구별해 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부르기만 하면 그 음성을 알고 따라가기 시작합니까? 우리가 아무리 좋은 곳에 머물러 있어도 주님이 부르시기만 하면 그대로 달려나가 목자(牧者)이신 주님을 따라가십니까?
음성을 구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별하실 뿐 만 아니라 듣고 따라 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은 참 인상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양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양의 특징이 하나 지적되어 있습니다. 양은 타인의 음성을 모른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음성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음성만 알아듣는 양, 타인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양이 진짜 양입니다. 주인의 음성을 모르는 것도 문제의 양이지만 타인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따라 가면 좀 이상한 양입니다.
주님의 양인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까?
첫 번째 "타인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성품 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이야기 아닌 것은 좀 무디게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야기 아닌 것에 귀가 번쩍 열리는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주님의 양으로는 조금 모자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지 타인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에 민첩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들에는 좀 둔하게 알아들으십시오.
세상이 가르쳐 주는 것들에는 멍청하기를 바랍니다.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의 음성을 빨리 알아듣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양의 특징을 보십시다. 다시 한번 5절을 읽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타인의 음성을 못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따르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리어 "도망"한다는 것입니다. 훨씬 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뒤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도망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도망가십시오. 예수님 대신 물질만 있어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도망가 버리십시오.
"아 정말 그런가"라고 말하면서 따라가지 말고 과감하게 도망쳐 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도망가지 않으면 조금씩 조금씩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언제인가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도리어 도망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머뭇거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괜찮겠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거부하십시오. 그런 자리에는 있지 않고 도망쳐 버리는 것이 훨씬 멋진 계획입니다. 들어가서 잘 하면, 들어가서 유혹 받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자신을 合理化시키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연약한 우리는 도망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요셉처럼 옷이 벗겨지더라도 놔두고 빨리 도망치십시오. 머뭇거리면서 좋은 기회라고 착각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야한 화장과 옷차림으로 요셉에게 접근했습니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히 단호하게 거절당했습니다. 그 날은 우연히 아무도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더 적극적이 되었습니다. 옷을 잡고 매혹적으로 유혹합니다.
그 때 요셉의 행동을 기억하십니까?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그 때에 요셉의 행동이 어떠했습니까?
그의 행동은 간단했습니다. "그 방을 빠져 나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있지 말아야 하는 자리는 빨리 빠져 나오는 것이 최선입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있으면서 "하나님, 이 유혹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기도만 하는 것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면 과감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십시오.
요셉은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알고 있었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를 빠져 나와야 우리가 진정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여러분의 몸과 정신과 영혼을 두십시오.
시편 1편의 아름다운 말씀을 들려드릴까요?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만하고 거만하고 자신만 자랑하는 자리에도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아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리에 서 계십시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리에 서십시오.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양은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양은 아름다운 꼴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목자가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목자의 음성이 훨씬 매혹적이어도 속지 마십시오. 그들의 음성은 유혹하는 음성이고 속임의 음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장해도 과감하게 포기하십시오. 도망쳐 버리십시오.
구원은 주님에게밖에 없습니다. 영혼을 직접 만지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영혼 하나 하나를 부르시는 우리의 목자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사십시오.
그 분을 우리 앞에 두고 따라가며 사십시오. 그 분을 목표로 삼으십시오. 그 분만이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서 사역하는 또 다른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설교 목사입니다. 이름은 Lee Strobel목사입니다. 그는 13년 동안 Chicago Tribune 신문사의 기자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쓴 책 "God's Outrageous Claims" (하나님의 엄청난 요구)에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충격적인 도전을 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있습니다. 그가 신문사 기자로 있을 때 바로 그 사람의 재판을 취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60-70년대 시카고를 주름잡았던 악명높은 '벨래르'라는 암흑가의 두 번째 두목이였습니다. Ron이라는 이 사람의 전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머리를 향해 쇠망치를 던져 청소년 감호소에 간 것이 바로 여덟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21살이 되던 해, 암흑가의 라이벌이었던 Palmer Street Gaylords파가 Ron의 절친한 친구를 무참하게 공격했고 그 일로 그는 복수를 결심합니다. 그 날 Palmer 일당의 주동자가 Bob 이라는 것을 알게된 Ron 그는 그를 죽일 기회만 찾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술집에서 나오는 Palmer 일당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날 따라 Bob이 없었고 대신 동생인 Gary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오늘 동생을 죽이고 장례식날 그의 형 Bob을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방아쇠를 Gary의 가슴을 향해 쏘았습니다. 그러나 빗나가고 말았고 Gary와 일당들은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추격하면서 쏘아댄 총은 마침내 Gary의 등을 관통하였고 그는 앞으로 꼬구라졌습니다. 다가가서 엎프러져 있는 그를 뒤집어놓은 후 그를 향해 다시 총을 들이댔습니다. Gary가 애원합니다.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말입니다.
Don't shoot me again! Don't kill me. 그러나 애원하는 그를 향해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짤칵! 총알이 다 떨어졌습니다. 멀리서 사이렌이 울리고 경찰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리를 피한 그는 만일 잡히면 살인미수로 최소한 20년형 이상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얼마 뒤 애인과 함께 카나다로 도망쳤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Ron과 애인은 포틀랜드 오레건으로 몰래 숨어 들어와서 조그만 철강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인지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Ron은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자꾸 괴롭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네가 하나님과는 화해를 했지만 아직까지 사회와는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최소한 20년형의 감옥살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을 더 이상 속이면서 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 형사 재판에 Lee Strobel 목사님이 당시 기자로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판사 앞에 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옹호하거나 죄가 없음을 주장하는데 R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I'm guilty. I did it.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모두 나의 책임입니다. 감옥에 가야한다면 당연히 가겠읍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올바른 일은 바로 나의 잘못한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은 명백하게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I'm sorry. I really am" 이라고 말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기자 Lee 목사님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새로워진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은혜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결단이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일 없겠지만 말씀을 자신 안에 담아둠으로 인해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 죄를 가만히 둘 수 없게 되는 삶, 그것이 무언가 다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귀로 듣기만 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바뀌어지는 삶,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삶이 바로 참 제자의 모습, 주님의 양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양들이 주님의 양들입니다.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 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시는 주님의 양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