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거듭난 삶 2009. 4. 4. 00:10
728x90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 에덴골 2009.04.03 15:25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요한복음 8장 12절-19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3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19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정당하지 않은 애정 행각은 떳떳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숨어서 그 일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곳으로 자꾸 숨어들어 갑니다. 그것이 바로 어두움의 삶입니다. 드러나기 싫어하는 어둠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의 삶은 빠져 들어가면 갈수록 이상하게도 기쁨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갑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자신의 마음이 정돈되지 않습니다. 어지럽습니다. 혼돈이 생기고 혼란스러워집니다. 처음에는 어떤 흥분으로 시작될지 모르지만 갈수록 어두움에 머물러 있게되고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즐겁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그 자체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결코 우리를 만족한 삶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앞 부분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중에 잡힌 불행한 여인의 삶의 모습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삶의 비참한 결과를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을 둘러서서 돌로 쳐 죽이려는 순간까지 몰려갔습니다. 어두움의 삶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두움의 삶은 가능하면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죄는 어둡습니다. 밝은 것이 아닙니다. 침침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바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죄를 범하지 않아야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서 다시 죄를 범치 말라" "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가라"는 주님의 음성에 그녀는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거룩한 감동을 받았을까요? 얼마나 안심이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아니 "이제는 가라"는 이야기로 끝이 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시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더해진 것입니다.

"다시는 죄의 어두운 길을 걷지 말라!" 얼마나 엄청난 떨림으로 이 말씀을 들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냥 죄의 현장을 떠나는 것만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많은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11절에서 끝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에도 11절까지 합니다. 그리고 12절 이후를 합니다. 그러나 10절과 11절의 예수님 말씀은 그것으로 마치지 않고 12절에 연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이야기로 간음한 여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를 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우리가 마음만 새로 먹으면 됩니까? "정말 이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하고 다짐과 결심만 하면 될까요? 정말 그럴 수 있을 까요?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11절에서 끝이 나도 됩니다. 가서 죄를 짓지 않으면 되니까요.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결심, 우리의 의지로는 "다시 죄를 범치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道德性과 倫理意識, 意志的인 決心만 있으면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살 수가 있을까요?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만 있다면 누가 고민하면서 살까요? 누가 염려할까요? 아니 정말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필요합니까?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최대한 발동시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作品중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이라는 걸작소설이 있습니다.

 

 음탕하고 괴이한 반 미치광이인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경솔하고 난폭하고 정욕대로 살아가는 성미가 불같은 첫째아들 미쨔와 두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이반알렉세이가 있었습니다. 막내 알렉세이알료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데 신앙의 열정을 가진 순진하고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책을 좋아하고 수줍어하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나중에는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큰형 미쨔와 막내 알료샤의 대화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알겠니 알료샤? 내가 바로 그 벌레란 말이야. 아니 우리 까라마조프 一家 모두가 그런 인간이지. 그래서 천사같은 너의 내부에도 그런 벌레가 살고 있어서 네 피 속에서 폭풍을 일으키는 거야. 정말이지 신비한 일이야.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고상한 마음과 뛰어난 지혜를 지닌 인간이 아름다운 이상을 품고 출발했다가 결국 소돔처럼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이야. 너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니? 거기서 악마와 신이 싸우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전쟁터가 바로 인간의 마음이지. 아무튼 나는 방탕을 사랑했고, 그 방탕의 부끄러움까지 사랑했어. 잔인한 것도 사랑하구. 그런데도 내가 어떻게 벌레가 아닐 수 있겠어? 어떻게 해로운 벌레가 아닐 수 있겠냐구?"

 

 이 말을 듣고 있던 알료샤가 얼굴을 붉히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얼굴을 붉힌 것은 형님의 이야기 때문도 아니고 형님의 더러운 행실 때문도 아닙니다. 나 자신도 형님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누구나 다 똑같이 계단위에 서 있는 거예요. 다만 내가 어쩌면 아랫 계단에 서 있다고 한다면 형님은 좀 더 몇 계단 위에 서 있을 뿐입니다. 결국 똑같은 것이지요. 맨 아랫단에 발을 딛고 있는 자도 언제인가는 맨 윗 계단까지 올라가게 마련이지요."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비슷비슷합니다. 단지 몇 계단 높이 또는 그 보다 낮은 계단에 있다해도 결국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의지를 최대한 발동시켜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 해로운 벌레일 뿐입니다.

 

 닭과 개에 대한 풍자적 웃으게 이야기를 해보신 적 있으시지요?

닭이 이웃집 개에게 따지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잘 짖어대지도 않으면서 아까운 밥만 축내고 있냐?" 그러자 개가 대뜸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도둑에게 짓는 것이 내 소임인데 우리 주인이 바로 도둑이니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고 말입니다.

 

 다 이렇습니다. 한 두 사람이 도둑이어야 개가 구분을 할 텐데 모두가 도둑인 세상이니 어떻게 하여야겠냐는 풍자적 웃으게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대책이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죄의 길, 어둠의 길을 걷지 않을 방법이 무엇입니까? 본문 12절에 그 답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대책이 무엇이라구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주님의 음성이 어디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그냥 가는 것으로는 해결이 안되기 때문에 주님이 직접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어두운 죄의 길을 벗어나는 길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여러분의 어두움을 밝혀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밝히는 분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과 의지력이 아닙니다. 고상한 교양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세상을 비추어 밝히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외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3장 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얼굴이 검은 구스인-이디오피아 사람이 피부를 바꿀 수 없고, 표범의 반점을 없앨 수 없듯이 원래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과 통하는 의미입니다.

 

 간음한 여인의 결과, 그녀의 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성경대로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벗어나는, 생명을 얻는 길이 여기 있다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을 통해 어둠의 길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을 얻는 삶은 거룩합니다. 어두움이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생명의 빛이신 예수를 따라가야 우리는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손양원 목사님 가족의 이야기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따라가면 더 이상 죄의 어두운 길을 다니지 않을 수 있는 삶을 보여준 분입니다.

 

 1948년 10월 27일 여수, 순천반란 사건 때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무참히 죽임을 당한 두 아들 손동인, 동신의 장례 예배 때 손양원 목사님은 이렇게 답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 느낀바 은혜받은 감사조건을 들어 답사를 대신하겠습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2) 허다한 성도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하필 나에게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3)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당함이리요,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이 되어 감사합니다.

7)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것 감사합니다.

8) 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9) 이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가지 진리와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하나이다.

 

 끝으로 오 주여! 나에게 분에 넘치는 큰 복을 주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려 마지않나이다. 옛날 나의 아버지, 내 어머니 새벽마다 부르짖던 이십 오륙년간의 눈물로 된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자매들의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해준 그 열매로 확신하며 여러분께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아들을 무참히 죽여버린 자들을 생각만 해도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분노의 감정을 추수리기 어려웠을 텐데도, 아니, 그들을 죽인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분노의 감정을 어찌 이렇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같은 아픈 역경 속에서도 어두움의 길을 다니지 않을 수 있던 힘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손양원 목사님 그분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힘이라고 생각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과 나에게도 이런 힘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역경과 고난에서도 빛 가운데로 걸어 다니게 되는 능력이 주님께로부터 공급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로 이렇게 소중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생명의 빛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빛, 세상의 어둠을 몰아 낼, 아니 내 마음속에 가득한 어둠을 몰아낼 빛에 대해 말씀하시자 펄쩍뛰면서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네가 무슨 세상의 빛이냐?"고 흥분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너는 생명의 빛일 수 없다고 분노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거가 엉터리라고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생명의 빛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말 나에게도 그런 생명의 빛이 역사하고 있느냐, 정말 어두움의 길을 다니지 않을 빛을 내가 소유하고 있느냐 아니냐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내가 정말 저렇게 되지 않을 수 있는 도덕성이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너나 잘해라!" 그럽니다. 내가 지금 생명의 빛 안에 있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무슨 생명의 빛이냐, 세상을 비추는 빛이냐"고만 따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에도 그런 흔적들이 베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있다가 전혀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는 흥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여러분 化粧을 왜 하십니까? 과거 이집트 여인들은 오늘날 여성들 처럼 아름다움을 위해서 화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中世 여인은 천연두가 성행했기 때문에 얼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 했습니다. 아프리카 뉴기니는 남자들도 화장을 합니다. 그것은 전쟁을 할 때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 한답니다.

그런데 화장의 특징은 모두 감추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장은 오래지 않아 결국 지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워지고 나면 본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태도로, 학벌로, 사회적인 지위로 죄의 속성을 감추려고 하지만 그러나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화장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外樣만을 쫓아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외양만을 가지고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외양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을 사랑해야합니다.

 

 생명의 이야기가 등장하면 생명에 대하여 고민하십시오.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보이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래야 어두움의 길을 걷지 않게 될 것입니다.

氷點이란 소설을 쓴 미우라 아야코가 "빛이 있는 곳에서"라는 소설에서 신앙의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가 이렇게 썼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리고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일생을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 보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생활이 남에게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생활이었어도, 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슬픈 나날이었어도 지금 당신 앞에는 당신의 발자국이 한 번도 찍히지 않은 새 맑은 순백의 베와 같은 길이 펼쳐져있습니다...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당신의 한 발자국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에 이끌리면서 걷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기쁨에 넘쳐흐르는 인생으로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까? 그 일이 아무리 당신에게 어렵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빛이 있는 동안 빛이 있는 곳에서 빛을 걸어갑시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에덴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달려갈 길과 수고   (0) 2009.05.30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0) 2009.04.13
이름을 각각 불러   (0) 2009.04.12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0) 2009.04.04
東西南北을 바라보라  (0) 2009.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