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南北을 바라보라
창 13:14-18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成熟하지 못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自己中心的인 태도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속이 후련한 사람입니다. 남의 입장은 고
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이해받고 싶어하고,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불만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 것만 소중합니다.
남의 것은 부서져도 버려져도 더럽혀져 있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
심이 없습니다. 자기 것만 잘 챙겨줘야 흐뭇해 합니다.
日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어느 부부가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 근처에 또 다른 雜貨店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 새로 생긴 가게는 길모퉁이에 있었고 버스 정류장 앞이라 자리가 월등하게 좋았기 때문에 가난한 부부에게는 競爭의 對象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에게 물건을 사들이는 것을 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유인즉 그쪽 집은 애들도 많고 하니 그 가게가 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님이 오면 진지한 얼굴로 남편이 말하기를
"미안하지만 그 물건은 저쪽 가게에 있습니다. 거기 가셔서 사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남편의 말에 불평하지도 아니하고 그대로 순종한 아내는 결국 남는 시간에 文學的인 才質을 發揮해서 많은 책을 쓰게 되어 더 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여자가 바로 미우라 아야꼬이며 "이 질그릇에도"라는 여러분이 다 읽어 보셨을 自傳的 小說속에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자신을 넘어서고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자기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幼兒的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의 문제에만 묶여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財産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他地에서 생활을 하는 중에 소와 양의 무리가 많아져서 가나안 사람의 땅과 브리스 사람의 땅에서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아브라함과 同行하여 오랫동안 같이 살아왔는데 아브라함의 종과 롯의 종이 물과 양식으로 인하여 다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좋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아브라함과 롯이 동시에 그 지역에 同居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紛爭을 해결하기 위해 조카인 롯과 헤어지기로 決心하고 롯에게 먼저 選擇權을 주어 길을 떠나게 하였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절). 롯은 아브라함이 먼저 선택하라고 하자 요단들판의 비옥한 땅과 물의 넉넉함을 보고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조카 롯에게 좋은 居住地를 양보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계시로 그를 위로하시기를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롯에게 豊饒한 땅을 양보하고 척박한 광야로 나선 아브라함에게는 不確實한 미래와 쓸쓸함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善을 위해 힘쓰는 자에게는 종종 絶望的인 순간이 찾아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에 대해 재차 약속하시며 용기를 돋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같은 약속은 단순히 物質的이고 現世的인 것뿐 아니라 미래의 영원한 천국까지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서남북을 보라'고 하신 뜻을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명령자는 하나님이심
14절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지역을 선택해서 가지라고 하니 욕심이 많은 롯은 요단 평야의 아름답고 비옥한 소돔성을 전부를 선택하여 차지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허탈과 배신감에 빠져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여호와는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存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계신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의 바로 앞에 설 때 소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려 주기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였습니다(출 3:14). 무시 무종하시며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 言約의 하나님이십니다.
곧 섭리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만물과 만사와 인간을 자기의 기뻐하신 뜻대로 계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아브라함을 언약 안에서 선택하신 분입니다.
3) 創造의 하나님이십니다.
곧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지으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그러한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었습니다.
4) 人格的 하나님이십니다.
곧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라고 하였습니다(창 12:1; 13:14).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1) 아브라함의 존재의 原因이 되셨습니다.
(2) 아브라함의 존재 의미와 目的과 價値와 方向이었습니다.
(3) 아브라함의 전 생애의 中心이요 動力이었습니다.
(4) 아브라함의 現住所였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동쪽이요 서쪽이고, 남쪽이요, 북쪽이었습니다. 바로 그 말씀이 아브라함의 時間이요, 空間이요, 삶의 全部였습니다.
5)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곧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오늘날의 우리들까지 복되게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 자신의 말씀은 과연 믿을 만한 분의 말씀이요 소망해 볼만하신 분의 말씀이요 사랑해 볼만한 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作用하는 것입니다.
2. 祝福의 vision을 들려 주심
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요단 땅 이외에도 너에게는 무한 축복지가 있다'고 하시는 소망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축복의 비전입니까?
1) 宇宙的 축복입니다.
여기 14절에는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창 13:17)에는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동서남북은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손들이 활동할 세계 선교의 영역을 뜻하고 있습니다. 바로 동서남북이 예루살렘이요, 유대요, 사마리아요, 땅끝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 전 우주를 내다보는 비전입니다. 세계 선교의 무대를 바라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 물질적 축복입니다.
15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후에 계속해서 이 땅에 대한 축복을 이미 약속하신 것에 대한 再確認이었습니다(창 12:7). 그리고 그 후에는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땅은 물질의 상징입니다.
그것을 만든 후에 사람을 살도록 창조했습니다. 땅은 생존의 노다지입니다. 온갖 생존 자원의 상징입니다. 바로 그의 후손들에게서 실증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많은 물질의 축복입니다.
3) 자손의 축복입니다.
(1) 티끌 같은 자손입니다.
16절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시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의 티끌 같은 수많은 성도들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입니다.
(2)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자손입니다.
(창 22:17)에 "네 씨가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섬들과 바닷가와 바다 아래와 바닷가에도 선연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3) 하늘의 별 같은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창 22:7) 전능의 자손, 빛의 자손 고상한 축복의 자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역들은 우주 선교의 영역까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우주 공간 속에서도 찾아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육지에도 바다에도 우주 공간 어느 세계에서도 살고 있습니다(창 1:28)에 인간들의 활동 영역이 땅과 바다와 공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
(히 11:8)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떠났다고 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유난히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울러 타향살이의 서글픈 사연 등이 담긴 詩와 노래 등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가와 친척 그리고 부모가 계시는 고향을 등지는 것이 실로 견디기 힘든 서러움과 외로움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反證일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러한 마음의 안정과 생활의 안락함이 있는 고향을 떠난 나그네 생활을 시작하는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 곧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하여 믿음으로 나그네 길을 뒤늦게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 믿음이 변치 아니하고 요단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동안 아브라함의 그늘에서 지내던 조카 롯과의 別離의 시점에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기름진 곳을 선택해 버리고 나니 일면 배신감도 들고 또한 허탈감도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때에 들리는 음성이 "일어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시는 여호와의 음성이니 이것은 곧 '이제라도 실망하지 말고 과거의 어려운 결단을 내렸던 고향을 떠났던 그 믿음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새로운 소망과 축복이 있다'고 하시는 약속이 있는 명령이었습니다.
(민 21:8-9)에 보면 "불뱀에 물린 자들이 장대 위에 매달은 구리 뱀을 쳐다 보는 자는 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不平은 해가 지날수록 그 도를 더하여 급기야는 그들의 진행하는 길이 약간 험하다고 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애굽을 그리워하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셨으나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서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고 하는 구원의 방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곧 죽어가면서도 不信의 마음으로 어떤 자들은 쳐다보지를 아니했고 개중에는 믿음으로 구리 뱀을 쳐다 본 자들은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도 좌절하지 말고 "동서남북을 쳐다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섭리만 바라는 자에 대한 위로의 말씀
자신의 조카 롯에게 사랑과 관대함을 베풀어 선택의 권리를 양보하여 비옥한 땅을 빼앗긴 아브라함에게 축복과 위로의 음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소외받고 혼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축복의 선물을 주시려고 사랑의 말씀으로 명령하고 계십니다. 스스로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를 유혹하고 핍박하는 세상에, 관대함을 베푸는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어떠한 피해도 기꺼이 참는 그분의 백성들을 잊지 않으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위로가 우리들로부터 떠나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들을 선별하시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위로의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5. 讓步의 美德을 보이라는 뜻
세상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대하고 또한 나 자신을 감추고 양보한다고 해서 잃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서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진 선택의 권리를 양보하였으나 롯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 선택으로 인하여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렀지만 아브라함은 그 양보로 인하여 하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입니까?
經濟的으로 어려운 이 時期에는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보다도 사람의 인격의 가치가 더욱 크게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유하고 있는 富를 금방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돈이나 또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계약서나 차용증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富는 하나님께서 직접 서명하신 하늘나라의 계약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소유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얻기 위하여 애쓰는 자보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손해보는 것만 같은 온유한 자를 더 사랑하시며 오히려 그 온유한 자에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약속이나 도움은 대부분이 자신들의 이익이나 특정한 목적을 눈앞에 두고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도움을 청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도 없이 우리가 청한 도움보다도 더 많은 것으로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신앙의 유익함을 위하여 하나님과의 약속 안에서 우리에게 고독한 체험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의 이상과 소망을 땅에 두는 것이 아니라 결코 破棄되거나 변하지 않을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온유함과 양보를 잃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6. 영의 눈으로 보라고 하십니다.
기름진 땅, 물이 솟는 땅, 푸른 들판, 이 모든 것을 양보한 아브라함은 動搖하거나 傷心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풍성한 소유보다는 平和 追求에 全力했고 利己的인 삶보다는 利他的인 삶을 살았기에, 즉 영의 눈으로 하늘의 소망을 보았기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더 높은 곳, 더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당장 보기에 아름답고 좋은 것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겉보기에 소돔은 하나님의 동산 같고 기름진 땅 같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신의 눈으로 선악과를 보았을 때도 그것은 보암직했습니다(창 3:6).
그러나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그것을 먹음으로 그들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最大의 悲劇을 겪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실을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영의 눈을 통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름지기 이 교훈에 항상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됩니다.
조카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후 외롭게 서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행 3:4)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본 거지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38년간 걸어보지도 못한 자가 뛰어 다니는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들의 말을 듣고 쳐다본 자도 이같이 축복을 받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아브라함 같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바라보라)
아브라함은 롯과 別居한 후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신 위로와 방문에 감사하는 표시로써 거기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뿐 혼자였지만 그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헤브론에서도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은 경배의 수단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들이나 그들의 우상 숭배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는 간증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동할 때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어떠한 것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旅毒도, 나이 듦도, 敵의 存在 등도 그를 妨害할 수 없었으며 소유물의 增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것도 그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부단히 계속했고 어디를 가든지 公的 및 私的 예배를 준비해서 아브라함 스스로가 믿음의 조상임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의 백성된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배 없는 삶이란 인생의 본질을 놓지는 삶이며 스스로 인간됨을 포기하는 삶입니다.
정기적으로 혹은 상황에 따라 예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고 확인할 수 있도록 보여 주는 생활을 합시다.
결론
(롬 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당돌하고 이기적인 태도에 실망도 컸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니 롯이 선택한 재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축복 중에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과 태도를 교훈 받아 축복받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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