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팔자 바꾸기

거듭난 삶 2009. 5. 2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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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바꾸기  _김범순

 

2009년 샘터상 생활수기 부문 당선작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선생님이 되지는 못하고 대신 직업이 선생님인 남편을 만났다. 나는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를 내 학교인 양, 남편의 제자가 내 제자인 양 대리만족을 하면서 살았다. 실력 있고 성실한 남편, 열 살 딸아이와 여덟 살 아들아이, 백일 갓 넘긴 늦둥이 막내아들, 게다가 보너스로 부유한 시어머니의 보살핌까지…. 사람들은 내 팔자가 늘어졌다며 부러워했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인류가 똑같이 풍요롭고 수명도 같아서 모두 80년씩 산다면 지구가 천국으로 변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사람들은 이기적이 되고 나태하고 방탕해져서 천국은커녕 근면과 정의와 배려가 싹트지 못하는 생지옥을 만들어놓고 말 것이다. 그래서 삶은 항상 고요한 호수보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바다를 닮길 원한다.

삶은 교만하고 이완된 나를 더는 용서할 수 없었나 보다. 서른아홉 살 남편이 학교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절명의 순간을 맞았다. 그토록 드높던 하늘과 땅이 내 눈앞에서 따악 맞붙어버렸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인기 교사였던 남편은 언어, 시각, 지체 종합 1급 장애인이 되어 정든 학교를 떠나야 했다. 남편 그늘이 삼만 리라던가. 나는 남편이 땅에 묻히지 않고 내 곁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달랐다.

“아들이 병신 되고 낭께 동네 사람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쳐들고 댕기겄다. 그랑께 쩔룩거리는 애비 데리고 절대 시골집은 오지 말거라!”

들것에 실려 퇴원하던 날, 대문 밖에서 시어머니가 서슬 퍼런 얼굴로 말했다. 속상한 마음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남편이 몹시 불쌍했다. ‘어머니 정말 너무 하시네요. 나는 절대 그 말 전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못 전합니다.’ 그 후로 시어머니의 혹독한 몰아붙임은 나날이 강도를 더해갔고 피폐해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편 대소변 받아내고 하루에 열 번씩 근육이완 운동을 시키며 틈틈이 세 아이의 어미 노릇도 해야 하는 나한테 이럴 수 없는 것이었다.

“네 팔자가 드세고 사나워서 장대 같은 내 아들 병신 맹글어놨으니께, 도로 깨깟이 낫궈놔, 어서!”
끝내 분을 못 이겨 멱살잡이를 하려 덤벼드는 시어머니가 나는 너무나 실망스럽고 섭섭하고 무서웠다. ‘서른넷에 아버님을 땅에 묻은 어머니 팔자는요?’ 목울대를 거슬러 올라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이 말을 꿀꺽꿀꺽 삼키며 결단을 내렸다. 어머니를 약간만 섭섭하게 해서 시골로 가게 해야겠다고. 그리하여 1년 동안 우리 집에 발길을 끊었던 시어머니는 어떤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다시 나를 귀애하기 시작했다.

병간호를 하는 2년 동안 남편과 나는 제2의 신혼을 맞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어떤 직업을 선택할까 궁리해보았다. 공무원? 옷 가게? 공인중개사? 손해사정인? 미용사? 야채 가게? 한의사? 문구점? 슈퍼마켓? 우리는 그중에서 미용을 선택했다.

미용 10년차 될 무렵은 경기가 호황이었다. 그래서 미용실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빌딩을 짓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는 소문이 짜했다.

하지만 나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했어도 딱 먹고 살 만큼 벌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죽지도 않았다. 불황일 때도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의 발병 이후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던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씩씩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니며 재미나고 건강하게 살았다.

그날은 친척 조카가 장가를 드는 날이었다. 한 달에 두 번뿐인 황금 휴일이 좀 아까웠지만 이왕 가는 거 가족 여행 하는 셈 치자고 마음먹고 신 나게 시골로 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일가친척들에게 폐백 절을 할 차례가 되자 문중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들 낳은 사람만 신부 곁들이 자격이 있는 거니께, 달수 처하고 채운이 처 이리 나오니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부 시아버지인 육촌 시숙이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채운이 처는 안 돼!”
나는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뒤로 물러섰다. 새 며느리에게 내 사나운 팔자의 기운이 전해질까 염려하는 시아버지 마음이었던 것이다.

우후후! 내 처지를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나 보다. 반신불수가 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길을 걸으면 우리 가족을 단란하게 보는 이는 드물었다. 박복 운운, 팔자 운운하며 불쌍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혀까지 끌끌 차면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 값싼 동정심이 나와 아이들의 자존감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친인척과 세상인심이 같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날이었다.

며칠 후, 가라앉았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래, 더 열심히 더 행복하게 사는 거다.’ 미용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매력 넘치는 전문직이었다. 나는 기회가 되는 대로 커트, 파마, 염색, 업스타일의 신기술과 이론을 공부하고 아울러 경영과 인성 교육도 받았다.

미용인들은 아침 9시에 개점하고 밤 9시에 폐점한다. 그래서 미용 세미나는 밤 9시에 시작해서 새벽 한두 시나 되어야 끝이 났다.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하고 격려해주고 도와주었다. 내가 좀 더 명석하고 사업 수완이 좋은 큰 그릇의 여자였더라면 대성했을 텐데. 외조에 비해 결과가 너무 초라한 것이 남편에게 늘 미안했다.

“미용 시작한 지 15년이나 되었으니까 이제는 우리도 성공할 수 있겠지?”

“그럼, 그럼!”
보기보다 욕심이 많은 우리 부부는 미용실을 크게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래서 일을 저질렀다. 개업 첫날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던 미용실을 살리기 위해 전문기관과 지인들의 자문을 받아가며 고객 유치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망하려니까 소용없었다. 손님을 유치하면 직원이 부족하고, 직원을 해결하면 손님이 없어 매월 수백만 원씩 적자가 났다. 몇 달 안 되어 아파트 상가를 처분한 데 이어 시어머니가 유산으로 물려준 전답의 일부를 헐값에 팔아넘겼다. 그것도 모자라 10여 년 부어온 적금을 깨고 아이들의 차세대 통장까지 해약했다. 나는 자괴감에 시달렸고 그 자괴감은 자연스럽게 중증의 우울을 불러들였다.

“괜찮아, 여보. 다 정리하고 길바닥에 나앉는다 해도 가족들이 건강하잖아, 그리고 매월 장애연금도 나오는데 뭐가 걱정이야!”

“엄마, 힘내세요. 엄마의 보물인 우리 셋이 있잖아요!”
나는 가족들이 던져준 사랑의 밧줄을 잡고서 한 발 한 발 깊은 우울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크게 실패하고 나니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고 세상 보는 시각도 한층 높아졌다.

나는 가족들과 의견을 모은 뒤 국가고시인 미용장 시험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용장 시험은 만만치가 않았다. 더구나 미용실을 이전한 뒤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몇 년 동안 낙방을 거듭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팔자까지 바꾼 사람 아니던가! 2005년 10월 나는 미용장이 되었고, 1년 뒤에는 2급 직업훈련교사가 되었다. 선생님이 되는 것과는 아주 어긋난 길을 걸으면서도 한 번도 접은 적이 없었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 해에는 학점은행제에 편입해서 피부미용학 학사학위를 취득했고, 대학교에서 강의도 했다. 학기가 끝나던 날 학생들이 “저도 교수님처럼 되는 것이 꿈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순간 수백만 개의 불꽃이 피어올라 하늘 가득 수를 놓는 것 같았다.

2008년 12월 14일 밤 8시 30분은 나를 존중하고 내 기술이 최고라고 믿는 귀빈의 예약 시간이었다. 나는 그분을 마지막으로 22년간 나에게 고마운 일터가 되어주었던 미용실 문을 내렸다.

우리나라의 미용 인구는 대략 70만 정도인데, 열심히 공부하는 미용인이 정말 많다. 그래서 미용장협의회에서는 스승이며 선배였던 사람이, 학교에서나 미용협회에서는 그 반대가 되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도 나보다 어린 스승이 많다. 그중 잊지 못할 스승의 한마디.

“라면 먹을 형편만 되더라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내가 가르치는 이에게 단 한마디라도 좋은 말을 해주기 위해서다.”

내 나이 쉰여덟, 아직은 나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몸. 그래서 작년 가을 대학원에 진학해서 향장미용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박사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박사도 하고 싶은데 내가 박사를 마치고 나면 정년이라 가르칠 사람이 없다고, 그래서 너무나 아쉽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