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 요한의 증언
성 경: [요 1:19-28]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자라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요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사도 요한은 다른 복음서들(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던 당시의 성도들에게 다시 반복해서 성육신 기사를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부터 복음서의 본문을 기술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침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다(19-36절).
이는 침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立證)하기 위한 것이다.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당시 침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침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침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다.
(눅 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행 13:25 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탐지할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 요한의 증거 - '증거'란 바로 요한의 사명이며,
(7절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그의 사역은 말씀이며 구원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역할이었다.
[요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 원어상으로 볼 때 저자는 본절에서 헬라어 접속사 '카이'를 무려 3회에 걸쳐 병렬적으로 기록하므로 진솔하고도 꾸준한 증거자인 침례 요한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표현은 침례 요한이 자신의 하고자 하는 답변의 심각성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던 의도를 보여준다.
특히 '드러내어 말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고백하다', '확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내용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고백적 증언임을 보여준다.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 산헤드린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의 입에서는 메시야에 관한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으나, 침례 요한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특히 침례 요한은 '나'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 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본장에서만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9-31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3-34절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여기에서 침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예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융합되어, 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졌다.
따라서 침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천명했던 것은
(1) 옛 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자각하였음과
(2)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謀叛者)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요 1: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 네가 엘리야냐 - 이것은 당시 침례요한이
(1) 약대 털옷을 입고,
(2) 금욕적인 식사를 하고,
(3) 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 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다.
▶ 나는 아니라 - 예수께서 침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한 말씀(마 11:14;17:12)과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일 것이다.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또한 침례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한'(20절)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날 것이다.
또한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23절과도 어긋나게 보인다.
(23절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주로 이용한 자구적(字句的)성경 해석을 따랐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침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크 에이미'이다.
이는 20절의 '나는 아니다'(우크 에이미 에고)와는 그 표현 강도가 다르다.
즉 여기에서 침례 요한의 대답은 20절의 강조형(에고)를 취하지 않는다.
이는 침례 요한이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며,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님'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편 침례 요한을 엘리야로 비유한 예수의 말씀(마 11:14;17:12)도 정당한 것이다.
즉 침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
(말 4:5-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네가 그 선지자냐 - 요한의 두번째 대답과 사두개인들의 질문 사이에는 원문상으로 접속사가 없는데 이는 사두개인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로 발생하는 긴장 관계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문장 구성 양식이다.
본문에서 '그 선지자'란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를 가리킨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는 '그 선지자'란 개념이 곧 메시야와 직결됨을 시사한다.
(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성령 강림(降臨)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다.
(행 3: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7:37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 아니라 - 이것의 헬라어 '우'는 본절의 맨 뒤에 위치해 있다. 이는 침례 요한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아주 단정적으로 부정했음을 보여준다.
[요 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 또 말하되 누구냐 -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짐작했던 요한의 정체는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질문에 대한 침례 요한의 세 차례의 부정은 그들의 조사 활동을 더욱 난감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라고 번역된 헬라어 '운'이 논쟁적 어감을 띠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심정은 더욱 조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 사두개인들의 난감함과 조급함의 원인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 그들은 진리를 찾는 자들이 아니라 기존 권위의 하수인(下手人)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요한에게 질문하지 않고 침례 요한의 자기 진술을 요청하게 된다.
따라서 이어지는 질문인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은 어떠한 암시도 전혀 개입되지 않은 질문 형태로서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감 상 잘 부합된다.
[요 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 가로되 - 본절에서는 '증언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페미'의 부정과거 3인칭 단수형인 '에페'가 문자의 맨 앞에 놓임으로써 요한의 증언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 선지자 말라기가 예언했던 엘리야의 도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불식(拂拭)시키고, 자신의 사역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하여 침례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한다.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그리고 이러한 침례 요한의 생생한 자기 증언은 공관복음에서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반영되어 있다.
(마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막 1:2-4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침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눅 3:3-6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밝히는 본 구절은 이사야의 예언을 단축한 형태로서,
이러한 어투는 대화체에 적합하며 이것이 직접 침례 요한의 입을 통해 나온 말임을 뒷받침한다.
이에 반해서 공관복음은 이사야의 예언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침례 요한의 자기 증언을 예언 성취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막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눅 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결국 본문은 저자가 당시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대고 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표현은 '이사야의 말'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했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침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도 침례 요한의 소리와 서로 일치한다.
특히 '외치는 소리'는 일종의 감탄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적인 일을 선포하는 전령자(傳令者)라는 의미를 지닌 '보온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사야나 침례 요한의 '소리'(the voice)가 바로 이들을 파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사야와 침례 요한의 이와 같은 대비를 있는 용어 '카도스'('...같이')가 사용됨으로써 사도 요한의 문학적 재능이 한결 돋보인다.
이는 본서가 주로 말씀과 강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나타난 점에서 볼 때,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요한의 능수 능란 함을 엿보게 한다.
[요 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자라 - 산헤드린 공의회의 양대 세력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중에서 산헤드린의 조사단이 전자에 의해 보내진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산헤드린(Sanhedrin)의 의장이 사두개파의 영수인 대제사장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 19절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이 산헤드린 공의회가 아니거나,
(2) 본절에서 '저희'가 '제사장들과 레위인'으로 (19절)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 아닌 것으로 보여 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가 맞다면 '저희'란 바리새인들이 파견한 다른 진상 조사단을 지칭한다.
그러나 19-28절까지의 본문의 흐름상 여기에서 '저희'란 바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의 진상 조사단이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왜 본절에서는 사두개파의 영수(領袖)인 대제사장이 의장으로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바리새인을 일치시키고 있는가?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을지라도, 산헤드린의 주도권은 바리새인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본의와는 다를지라도 바리새인들이
'만일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아니하면 일반 민중이 가만히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협박에 속수무책이었다(Josephus).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본절에서 '저희'는 바로 산헤드린 공의회가 파견한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28절까지 이어지는 침례 요한의 증언을 일관성있게 이어주고 있다.
[요 1: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그들이 침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가에 따라 대략 다음 두 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겠다.
(1)이방인들이 개종과 관련시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유대 사회에서 침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다고 한다. (Jeremias).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침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침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 사실에 대해 질타(叱咤)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메시야의 사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보는 견해.
겔 36:25;37:23;슥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침례 의식이 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진다.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요 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 침례에 관한 물음에 대해 요한은 본 구절로써 대답하고 있다.
'물로' 침례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막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다시 말해서, 침례 요한의 물침례는 예수의 성령 침례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요한의 침례가 백성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해 그들의 심령을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회개의 침례'였기는 하나
(눅 3: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본질적으로는 우리를 새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성령 침례를 상징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요.
(6-8절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인
침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즉
(1) 요한의 '하나님 나라 도래와 회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회개의 선포로'를 예비한 것이며,
(2) 요한의 침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침례를 예비(豫備)한 것이다.
또한 침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리스도에게 보내는 자였다.
이러한 요한의 사역은 자신보다도 그리스도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더 높이는 겸손에서 극치를 이룬다.
(27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 너희가 알지 못하는 - 산헤드린 조사단이 요한을 메시야로 착각한 것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본 구절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며,
이 말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이 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따라서 침례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7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요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신들메'란 당시 유대인들이 도보 여행시 착용하였던 신발(가죽 샌들)의 끈을 가리킨다.
유대 풍습에 의하면 주인은 초대한 손님이 방문하면 자기 집에서 가장 천한 종을 시켜 손님의 신발 끈을 풀고 발을 씻기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침례 요한의 고백은 자신을 그리스도에 비할 때 가장 비천한 종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이 표현은 사복음서에서 공히 요한의 자기 진술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막 1: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진상 조사단의 물음에 대해 침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증거하는 형식으로 답한 것은, 자신의 사역을 메시야의 사역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 예수를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요한 자신의 위치를 밝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천한 존재였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직분은 그 누구에게도 비길 수 없는 영광스럽고 기쁜 것임을 요한은 자부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31절에서 설명되듯이, 침례요한 자신도 처음에는 예수가 진정 메시야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아마 침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에 관해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것은 예수께 침례를 베풀 당시 성부와 성령의 충만한 계시를 받게 됨으로부터였다.
(눅 3:21-22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요1:28]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 저자 요한은 산헤드린 조사단이 침례 요한을 조사한 사실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침례 요한의 자기 증언'의 장소를 언급한 것은 단순한 부가적 설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 요한은 당시 상황이 너무도 인상적이며 중요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그 생생한 기억을 여기 옮기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란 예루살렘 남동쪽으로 약 3km 지점에 있는 마을이 아니라,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장소로서 침례요한이 침례를 베푼 장소였다.
본서에서 '베다니'라는 두 개의 지명을 구분하여 사용된 것은 본서가 영지주의자인 어느 헬라인의 저작이 아니라, 당시 유대의 상황과 지리에 익숙했던 사도 요한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일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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