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의 교훈
성 경: [요 3:1-8]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 니고데모 -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난다.
(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고 하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혹시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Moutefiore, Loewe).
요한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백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다.
(2)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信奉)하는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격이 아브라함을 통해 계승되는 자연적, 육적 출생에 있음을 강조한데 반해, 예수는 영적 중생을 강조하셨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다.
관원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회적 고위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친히 예수를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율법 학자가 된 사람은 종교법과 의식(儀式)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또한 랍비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다. (Jeremias).
[요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밤에 예수께 와서 -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를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 시간을 피해 예수님과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 혹은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서 등의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19:39에서 다시한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사실을 언급한다.
요한의 사상(思想)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reality)로서 상징되고 있다.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그리고 13:30에서 유다는 '밤'에 예수를 떠났으나, 니고데모는 빛이신 예수에게로 나아온 셈이다.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랍비여 - 니고데모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서품(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이 '랍비'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Jeremias).
한편 니고데모가 사용한 이 '랍비'라는 말이 예수에 의해서 부정되거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가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 우리 - 본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뒤따르고 있는 말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 곧 2:23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봄이 무난하다.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 니고데모는 이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첨가함으로써, 예수를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침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예수의 산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까지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수가 과연 대망의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니고데모의 방문의 주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니고데모가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이다.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이 '표적'이라는 헬라어 '세메이온'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보여주는 이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적은 그것을 목격한 자의 주의(注意)를 그 행위 자체 보다는 그 일을 행하신 이에게로 이끄는 것이 그 특징이다.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구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증하셨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은
(1)'처음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2) '다시', '두 번째'의 뜻 그리고
(3)'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침례로써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역사로서,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보다'는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또는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것을 뜻한다.
(눅 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 이러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일견 매우 아둔해 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반대 주장을 제기하거나 반항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다만 그는 예수의 말씀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니고데모가 둔감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질문 속에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본질의 재창조라고 하는 고차적 이적 또한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하는 강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을 법하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중생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깊은 의문에 휩싸였던 것이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물과 성령으로 -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성령'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반 어려움이 없으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엇갈린다.
즉 혹자는 이를 '침례 요한의 침례' 혹은 '기독교의 침례' 와 관련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 출생'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본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무방할 것이다.
눅 3:16에서는 물과 성령이 침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눅 3: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엣세네파(Essenes)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경우 침례를 행하던 관습이 있었다.
또한 침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롤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침례를 주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침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
(행 10:47-48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추측해 불 수 있다.
참조 : (행 8:26-39).
물을 자연적 출생으로 볼 경우에는, 사람은 육적 출생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출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된다는 의미이다.
끝으로 이를 기독교의 침례와 연관시킨다면, 본문은 중생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침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곧 침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이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사도 바울은 '육'에 해당하는 '사르크스' 라는 헬라어를 타락한 인생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했다.
(롬 8:3-9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그러나 여기서는 이 땅에 속한 존재 곧 연약하고 사라져 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 육(flesh)과 영(spirit)은 인간 본성의 보다 높은 차원(영적)과 보다 낮은 차원(신체적)을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지'로 번역된 헬라어 '다우마조'는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의미 한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예수는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이 중생의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혹(疑惑)에 잠겼을 것으로 보인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호'와 이에 대한 헬라어 '프뉴마'는 둘 다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만 370회 정도 사용된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의 뜻으로 사용되고 '바람'이라는 의미로는 구약성경(시 104:4)의 인용 구절인 히 1:7에서 한 번 사용되었다.
(히 1: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이 '프뉴마'가 본문에서는 '바람'의 뜻으로 '성령의 역사'를 적절하게 비유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1)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다.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운명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 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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