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의 부활
요한복음 11장 1-57절
(본문을 생략함)
유명한 철학자 스피노자(6권 7역주)는 말했다.
'만약 누가 나 위해 요한복음 11장에 있어서의 나사로 부활의 기사의 진실을 입증하는 자 있으면, 나는 나의 세운 철학을 파괴하고 크리스천이 될 것이다'라고.
알 것이다.
나사로 부활의 1기절은 그 위에 그리스도를 지탱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이는 실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최대의 기적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다른 기적 같은 것은 모두 다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지(理智)를 중히 여긴다는 근대인은 이것을 믿을 수 없는 까닭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를 설명하려 하여,
과거 백이, 삼십 년 이래, 많은 주석이 시도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교묘한 것은 파울루스(Paulus, H. E. G.)의 해석이다.
그는 다른 기적에 대해서도 경묘한 설명을 내렸는데, 나사로의 부활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나사로는 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너무 일찍 무덤 속에 넣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소란(tumult)한 주위에서 벗어나 정밀(peacefulness)한 바위 안에 가로누워, 냉풍에 얼굴을 받자 그는 서서히 소생했다. 그리고 예수는 사변의 상황에서 그가 죽지 않음을 찰지(inference)하고, 즉 무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런 후 그를 이끌어 내어 외기에 닿게 하니, 곧 호흡을 회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러한 해석은 사람의 영혼의 양식으로서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또 유명하고도 한 때 세상의 찬성을 얻은 것은 르낭(-9권 10역주)의 해석이다.
그는 말하기를
'이때 제자의 예수에 대한 신앙이 차츰 쇠퇴해지고, 세상의 반대는 더욱 더 가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베다니에서 마르다 자매와 함께 제자의 신앙회복에 대하여 의논했다. 그런데 그들의 한 사람은 제의하여 말했다.
'우리 형제 나사로, 병신으로서 거의 사자에 가깝다. 그러니 그를 무덤에 넣어 죽은 것처럼 가장하게 하고, 그리고 주 가셔서 이를 다시 살리게 하심이 어떤가?'고.
'예수는 본래부터 그 수단이 매우 나쁜 것인 줄 알았지만도, 제자에 대한 애심의 나머지 그들의 구제 위해서는 부 특히 이 책을 채용하신 것이다…'라고.
즉 르낭은 나사로의 대기적을 예수의 선의에서 나온 광언으로 본 것이다.
구제의 목적 위해서는 기만적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희유한 실례는 아니다. 오늘날 종교계에 있어서 왕왕 행해지는 바이다.
특히 천주교에 있어서 그 폐는 심한 것이 있었다.
르낭은 자신이 천주교 국에 있으면서 종종 그러한 사례를 목격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이 악사(wrongdoing)임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생애에 응용하여 나사로의 기적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것을 우리들의 명백한 양심에 호소하고,
정의와 공평을 사랑하는 자의 상식에 호소하여,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이같은 일 결단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르낭은 예수의 품성을 파울루스의 설명에서 구하려 하여 도리어 그를 보통의 천주교 승려 되게 해 버린 것이다.
근래에 이르러, 다시 신학계의 거두군,
즉 카임, 홀츠만, 바이제커 등이 시도한 설명이다.
그들은 모두 그 박학에 있어서 우리들의 기급을 불허하는 일류의 학자이다.
그들도 역시 나사로의 부활의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여러 가지 가설을 마련하여 말하기를
'나사로란 실재의 인물이 아니다. 그 이름은 이것을 누가복음 제16장의 빈자 나사로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부활은 이것을 야이로의 딸 또는 나인의 과부인 아들에게 일어났던 사실에서 취한 것이다. 결국 예수전을 엮음에 사자의 부활을 넣지 않고서는 완성되지 않음으로서이다.
예언자 엘리야 등의 생애에까지도 사자를 다시 살린 사실이 있다. 하물며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가르치신 예수의 생애에는 이 교훈을 증명함의 사실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야이로의 딸 또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 사후 곧 행해진 기적인 까닭에 아직 불충분함을 면할 수 없다.
보다 커다란 기적으로서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필요에 강요되어, 이상의 재료를 종합하고 그리하여 만들어 낸 바 된 것이 즉 나사로의 부활의 이야기이다'라고.
만약 소위 학문상의 권위(authority)를 구한다면,
모름지기 달려가 이를 독일 신학의 거두에게 좇을 것이다.
누가 가히 그들의 해석에 대항할 수 있으랴!
하지만 나사로의 가시를 그들처럼 해석해 버리고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무슨 유익을 주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요한복음 11장은, 학자의 연구자료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굶주린 영혼의 양식으로서는 전연 무가치, 불필요한 것으로 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독일 신학의 해독은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서로 하여금 산 영혼과 몰 교섭의 책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학이 미국에 들어가고, 또 미국을 통하여 일본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인에게 향하여 당신은 어떻게 라고 물을 것인가?
오인은 다만 성서 그대로 해석할 뿐.
나사로의 죽음은 사일째(4일만)에 다시 부활된 것이다.
예수 크신 능력으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신 때,
사자가 무덤 속에서 일어나 나온 것이다.
이는 성서가 명백하게 전하는 바로서,
우리들은 그렇게 믿는 길 외에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가령 카임 또는 르낭 또는 파울루스의 설명은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들이 단순하게 성서의 기사 그대로를 믿는 것을 허락하시는 까닭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확신에는 반드시 깊은 이유를 동반한다.
우리들의 이 신앙에 동반되는 것이 이유는 독일 신학자의 그것에 비하여 보다 유력한 것이다.
먼저 첫째로, 기사 그것이 내용의 허구가 아닌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나 저술의 경험 있는 자는 안다.
실견에 기초한 기사와 단순한 상상에 의한 묘사와의 사이에는 판연한 구별이 있다는 것을, 나사로의 기사 역시 그러하다.
가령 그 20절에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것을 듣고 마중 나왔으나, 마리아는 아직 집에 앉아 있더라'
는 사실 같은 것,
그 31절에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위로해 주던 유대인, 그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울려고 무덤으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여, 뒤로 따라 가더라'는 것 등,
또 그 35절에
'예수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 것 등,
모두 주제에 관계없는 기술로서 만약 이 기사가 무슨 목적 있어서의 날조(fabrication)란 다면, 이러한 사사를 삽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것을 실은 것은 실견한 대로의 기술임에 있다.
요한복음 제11장의 기사 그것이 일(사건)의 진실을 증명하는 좋은 재료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해석하는 때는, 나사로 부활의 대기적은 예수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그 전후의 관계에 적합하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에 이른 원인에 충당되며 예수전(傳)을 완성하는 것이다.
만약 이 기적 없다면 수난의 동기를 충분히 설명 할 수 없고,
예수의 생애에 일대 결함을 낳는 것이다.
예수는 어찌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가?
그 이유에 외측의 것 있고, 또 내측의 것이 있다.
모든 일에 내외양면의 이유가 있다.
날마다의 신문지가 보도하는 바는 거의 외측의 일(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면에 또 내측의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외측의 원인을 기회로 하여 발로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정당의 쟁투는 내각전복의 외측의 원인이다.
하지만 그 내측에 있는 것은 작은 가정문제 등이 잠재해 있는 것으로,
진실한 원인은 도리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도 역시 그러했다.
그 외측의 이유는 공관복음서에 전해지는바 사정이었다.
즉 그가 총독 앞에 서서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 예언자들의 예언한 메시야이다라고 명언한 그것에 있었다.
이 일언에 의해 그는 국가적 죄인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기타에도 공관복음서가 기재치 않은 내측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대하여 보충적 성질을 가지는 복음서이다.
그 싣는 바는 이것을 약하고,
그 빠뜨린 바는 애써 이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의 외측의 이유를 싣고 그 내측의 이유를 기록 않는다.
여기서 요한복음 기자는 그 결함을 채우고자 하여 이것을 기재한 것이다.
요한복음 기자의 견해에 의하면,
제사장,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처분하고자 한 최후의 내면적 이유는
즉 나사로의 부활에 있어서였다.
그들은 그러한 놀라운 위력을 나타낸 자를 방기해 두면
자신의 존재의 근본을 뒤엎어 버리기에 이를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하여 비로소 예수전에 완전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최후에 물어 이르기를,
어떻게 하여 사자를 부활케 할 수 있는가고.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하나 있을 뿐.
즉 우리들 자신의 심증에 행해진 대(大) 기적 이것이다.
이 실험을 가진 자는 나사로의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저 대 기적을 행하신 이는 반드시 또 이 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성서적 신앙은 그러한 자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그 점에 있어서,
크리스천 중 지극히 작은 자라도 대 철학자 스피노자보다도 큰 것이다.
반대자, 혹은 요한복음에 그리스도의 재림 없다고 하여 이에 의거한다.
그러면 나사로의 부활은 어떻게 하랴!
재림 없다는 것으로서 요한복음을 취하는 자는 그 중에 명기된 나사로의 부활을 어떻게 해석 하려는가?
후자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을 허구의 문서라고 하는 자는 그들이 아닌가?
나사로의 부활은 실로 재림의 날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부활의 모형이다.
주 예수 큰 소리로 외쳐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사자 나사로 혼연히 무덤에서 나온 것 같이,
때가 오면 그는 또 소리 높이 우리들 각자의 이름을 부르심으로서
우리들도 또한 모두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신자의 최후의 희망은 여기에 있다.
나사로의 부활을 믿고
또 자기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실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내촌감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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