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거듭난 삶 2016. 11. 8.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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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 11:17-44]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 믿나이다

28)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함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사람이 사람은 죽지 않게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말씀을 하시고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이미 나흘이라 -

 

"나흘"이란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 얼마나 권능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여기 지적한 것이다.

 

볼트만(Bultmann), 여기 "나흘"이란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여기 '무덤에 있은 이미 나흘이라' 기록한 의도는,

유대인의 관념에 죽은 자의 영혼이 죽은 사흘 동안까지는 무덤에 가까이 있지만, 나흘이 되면 그렇지 못하니 생명으로 돌아올 소망이 없다고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Das Evangelium des Johannes, p. 305).

 

볼트만의 학설은, 예수님의 이적을 그대로 주장하는 같다.

 

그러나 결국 말은, 요한복음 저자가 유대인의 미신 사상과 타협했다는 것이니 옳지 않다.

 

 

 

[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리쯤 되매 -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는 거리가 가까운 것을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거기에 많이 오게 원인을 설명하려는데 있다.

 

 

 

[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그들은 위문차로 많이 왔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Calvin).

 

 

 

[ 11: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활동적이며 사업적이고,

마리아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사실을 있다.

 

그가 집에 앉아 있었음은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았던 까닭이 아니다.

 

 

 

[ 11:21-22]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구절은, 마르다의 태도가 신앙적인 하면서도 단순히 그렇지도 않은 사실을 보여 준다.

 

그가 단순히 신앙으로만 일관하였더라면,

거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을 이유가 없다.

 

아니라, 그의 신앙은 변동성(變動性) 있었다.

그녀가,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아나이다"라고 말하고도(22),

 

다시 말하기를 나사로가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24).

 

그러면,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주님의 하시는 일에도 유감스러운 일이 있는 듯이 말하고,

그의 신앙 사상에 변동성을 가져왔다.

 

마르다의 태도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신자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어려운 때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다.

 

촬스 다윈(Charles Darwin) 말에 의하면,

대서양(大西洋)에는 200() 깊은 바닥에 뿌리를 박고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는 풀이 있는데, 파도가 일어도 풀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굳센 이유는, 깊은 바다 밑에 고요히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신자도 하나님 안에 고요히, 깊이 믿음을 가지면,

세상 파도 앞에서 동요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신 사실을 때에,

그를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있다.

 

그는,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자들보다 크시다.

 

하나님을 의뢰함이 얼마나 든든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또한 구름 같이 많은 증인들도 증거한다.

고래(古來)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사실을 생각하고 얼마든지 안심할 만하다.

 

어떤 사람이,

어름이 덮인 미시시피(Mississipi)강을 건널 어름이 깨질까 두려워서 기어서 절반을 건넜다.

때에 그는,

자기 뒤로 흑인이 석탄 수레를 끄는 마리 말을 몰고 오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건넜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건너가기가 위태하나,

믿음으로 앞서 건너 성도들을 생각하고 용기와 확신을 가질 있다.

 

 

 

[ 11: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날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고,

방금 행하시려는 이적에 따라서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가리켰다.

 

(43-44 말씀을 하시고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러나 마르다는 말씀을 세상 날에 있을 부활 관계의 것으로 알았다.

 

유대인들은 세상 날에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12:2 근거한 사상일 것이다.

 

(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마르다가 저렇게 유대인들의 믿는 교리는 기억하였다.

그러나 부활이 주인공이신 메시야께서 때에 현림하셨으니 만큼,

현재에도 사람의 부활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그가 교리는 알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충분히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곧바로 "부활"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이란 것이 전연 없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독자적인 부활은 없다.

 

세상 날의 부활도 예수님 때문에 성립될 것이고, 결코 독자적으로 성립될 것이 아니다.

 

 

 

[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 이것은 "나는 "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 구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11:25 말씀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

 

( 12: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

 

(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없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 참조 : (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약속을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계약(神人契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

 

(고전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죽어도" 말의 헬라 원어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

 

(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 말에 있어서

 

"살아서"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B. Weiss) 아니고, 영적 생명 ,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유로서는,

 

(1) 요한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

 

* 참조 (5:19 이하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특별히 11:25-26 말씀이 그러하다는 .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 "살아서" 말과 "믿는 "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거듭하는 뿐이다.

 

25 절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것뿐이다.

 

,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 믿나이다 -

 

마르다의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믿음의 완전한 고백이라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믿는다고 하고서 조금 후에는 약하여져서,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시지 못할 듯이 말한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에 대하여는, 고후 8:9; 2:7 참조하시라.

 

(고후 8:9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대한 합당한 신앙 고백이 있다면 무엇이나 고백하려는 열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실력은 실제에 있어서 아직 그와 같은 내용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 기독 신자들 가운데 종종 있다.

 

(1) 마르다의 신앙이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하게 원인은,

그가 진리를 깊이 배우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본래 체계 정연한 것이다.

그것은, 부분 부분에도 전체가 들어 있고 전체에도 부분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극히 정밀한 연구를 하는 자들에게 알려진다.

 

성경 말씀은, 신령한 감동으로 있는 방면도 있고,

또한 배워야만 있는 방면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깊이 배워야 된다.

사람이 진정한 학문을 무시하면 안된다.

 

이유는, 진정한 학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혜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잠언을 보면, 미련한 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정죄되었다.

 

(2) 마르다의 신앙이 사상에 있어서 체계 정연하지 못한 원인은,

신앙 연단이 부족한 까닭이었다.

 

신앙생활에는 연단이 필요하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보석도 갈아야만 귀한 보석이 된다.

암스텔담(Amsterdam) 금강석을 정제(精製)하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금강석 점을 정제하는데 여러 걸린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배로 여기시는고로 여러가지로 연단시키시기를 좋아하신다.

 

(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다른 신이 없었도다)

 

 

[ 11:28-30]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르다가 "가만히 자매 마리아를 불러" - 것은,

 

유대인 군중의 소동이 있을까 두려워한 까닭이다. 무리 가운데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의 연루자(連累者)들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 소식을 듣고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외(敬畏) 증표이다. (Calvin).

 

 

 

[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

 

유대인들이 이렇게 많이 따라 나오게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적을 보지 못할 하였다.

 

 

 

[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

 

말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의 고치시는 권능은 믿었으나, 부활시키시는 권능은 믿지 못했던 것이 드러난다.

 

 

 

[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함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

 

어떤 학자들은, "통분히 여긴다" 말의 헬라 원어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였으니, , "슬퍼한다" 뜻이라고 한다.

 

뜻을 취하면, 그가 슬퍼하신 것은, 우는 자들을 동정하시는 체휼(體恤) 슬픔이었을 것이다. (Calvin).

 

 

 

[ 11:34-38]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사람이 사람은 죽지 않게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애의 정서(情緖) 많이 나타내셨다.

나사로의 죽은 사건을 둘러싸고 그는 슬퍼하셨을까?

그는 이제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것을 내다보시고 계셨는데 슬퍼하셨을까?

 

문제에 대하여 가지 이유를 말할 있다. ,

 

(1) 그에게 대한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

예수님을 존경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같은 이들도 신앙이 부족하였고,

유대인들은 불신앙의 철면피였다.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편견을 고집하고 앉아서 예수님을 냉혹히 논단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슴에 송곳을 꽂는 같은 아픔이었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 앞에서 가장 고통을 느끼신다.

그는 불신앙의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적도 있다.

 

(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2) 예수님은 진리이시니, 진리 그것을 그대로 느끼심.

죽음이 비애라는 것은 천정의 진리이다. 누가 이것을 부인할 있을까?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죽음이 슬픈 것은 사실이다.

 

 

 

[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에 있어서, 거기 모인 사람들더러 그들의 힘으로 있는 일은 하라고 하신다.

 

(44 참조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그것은,

 

(1)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일에도, 인간이 일은 인간이 해야 된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가르치고,

(2)거기 모여 있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적 역사(異蹟役事) 수종들므로,

그들은 이적의 놀라운 사실을 인상 깊이, 또는 밀접하게 체험하게 되어 확신에 이르게 된다.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이것은 마르다의 불신앙을 표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인간의 냄새 맡는 표준으로 측량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마르다의 말은,

 

이적의 위대를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게 했으니,

, 냄새 정도로 부패한 시체를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이, 만대(萬代) 전파될 밖에 없다.

 

 

 

[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

 

예수님께서 여기 관설하신 말씀은, 25-26 말씀이다.

 

(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의미하신 바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조건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마르다가 불신앙하면, 나타날 부활의 이적을 영적 눈으로 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느낄 있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으로만 보며 느낀다. (Grosheide).

 

 

 

[ 11:41-42]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예수님은, 자기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어떤 사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언제나 계속한다고 하여,

 

여기 "항상"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그는, 말씀으로써 자기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통은 끊임없는 것임을 지적하신다. 그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 끊임없는 교통이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둘러 사람들이 듣도록 소리를 내어 사실을 기도로 발표하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기를 원하셔서 어느 기회에라도 가르치셨다.

이유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바로 알아야만 그들이 구원을 받겠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남들의 구원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셨다.

 

 

 

[ 11:43] 말씀을 하시고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

 

그는, 진리이시며 공명정대하시다.

 

그는, 마술사들의 어물어물 하거나 중얼거리는 것과는 반대로 소리로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죽은 자를 처럼 불러내신 것이다.

 

* 참조 ( 4:17 기록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 이것은,

살아 나오는 자가 나사로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그에게 베로 동인 것이 없었다면, 무슨 유령이 아닌가 생각될지도 모를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부활 이적의 역사에 무리들이 수종들므로 그들로 하여금 사실의 진실성을 깊이 체험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친히 이루시고도 일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일을 주신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지만, 기적 때문에 사람들이 태만하여지거나 무책임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존귀한 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