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는 무덤
성 경: [요 20:1-10]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 안식후 첫날 - 이는 일주일의 각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올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올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안식 후 첫날'은, 하루의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른다면 토요일 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첫날'(*,미아)은 '하나'를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프로토스)를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이것이 셈어(Sem 語)적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히브리어나 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근거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 아직 어두을 때 - 마태의 '미명'과 마가의 '해 돋을 때'라는 표현에 비해 다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떠날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 본다(Lenski). 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를 탄압한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않는 열정올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 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각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주일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이 완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올 받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비사하였던 여제자격의 인물인데,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눅 8: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수종 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혹 독자들 중예는 이 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혼동할 수도 있으나 양자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11장).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의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무덤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명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였다.
(마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눅 23: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이런 차이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모른데서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물들이 무덤을 방문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마 요한은 첫 방문자들 가운데 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올 맞추어 서술하였을 것이다.
▶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향유를 바르는 것은 곧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유대인들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는 고인(故人)의 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후 사흘 동안 시신을 돌보았던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왔을 때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을 합해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 홈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몇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돌 문올 여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올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막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요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 요한은 공관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천사에 대한 언급을
(12-13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비교적 간략히 다룬다.
(마 28:2-7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막 16:5-7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눅 24:4-7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본서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는지 아니면 무덤 문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시신의 도난을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확신했고 그것올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달려갔다.
요한은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만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빈무덤의 사실을 전해들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과 관련시켜 볼 때 모든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들었을 것이 확실하다.
아마 요한은 직접 무덤을 확인한 두 중심적인 제자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해 나갔을 것이다.
*참조 : (눅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제자들 중 대표격으로 언급된다.
18:27 이후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제로부터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18: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바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는 요한의 특징적인 표현으로
(13:2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1:20과 24절을 연관시켜 블 때 이 인물은 본서의 저자인 사도요한 자신임을 알 수 있다.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한이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표현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은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사람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 본문의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을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1절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에게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져갔다'에 혜당하는 혤라어 '에란'(*)은 비인칭 동사로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으리라고 의심되는 대상을 분명하게 가리키지는 않는 표현이다.
아마 무덤 도굴꾼이거나 예수의 적대자들이 마리아에게는 혐의(嫌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 내용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바 그녀가 무덤을 찾아간 것이, 예수께서 생전에 부활을 예고한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요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 즉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무덤을 향해 달려갔다.
아마 이들도 막달라 마리아의 생각대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해 보고자 했을 것이다.
(9절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제자들이 이렇게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이 제자들에게는 전혀 금시초문의 뜻밖의 사건이었음을 시사한다.
만약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가 놓고 예수께서 부활했다고 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면
(마 27:63-64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베드로나 요한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고 그들이 이렇게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눅24:12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
(눅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런데 본문은 요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하고있다. 본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가운데 남자 제자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한 사람은 요한 혼자이기 때문에
(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의 무덤을 알고 있던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덤으로 함께 갔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4절에서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당도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요 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 달음질하더니 - 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있고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추측에 동의했건 예수의 부활을 떠올렸건 간에(물론 전자일 가능성이 많지만, (9절 참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심리상태로 침착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어색할 것이다.
▶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 베드로보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요한이 베드로보다 젊었기 때문이라고 본다.(Lenski, Tenney).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3절). 요한이 무덤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무덤에 도착한 것이 곧 요한의 사도적 우월성을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
[요 20: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 구푸려 - 이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베드로처럼 적극적이지 않고 세심한 요한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을 할 뿐 선뜻 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혹자는 요한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수의가 무덤 안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시신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서 이 시신을 존귀하게 여겼거나 시체틀 만지는 부정(不淨)을 저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8절).
▶ 세마포 - 이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감쌀 때 사용한 삼베를 가리킨다.
(마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성경상으로 살펴보면 삼베는 시체를 싸는 것 외에도
성막의 앙장(仰帳),
(출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귀족의 복장,
(창 41: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돛,
(겔 27:7 애굽의 수 놓은 가는 베로 돛을 만들어 깃발을 삼았음이여 엘리사 섬의 청색 자색 베로 차일을 만들었도다)
이불,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잠 7:16 내 침상에는 요와 애굽의 무늬 있는 이불을 폈고)
[요 20: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 베드로의 행동은 그의 성격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양태로 나타난다.
앞절과 본절에서는 무덤 안에 세마포가 있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은 확인은 세마포의 존재가 시체 도적설을 반증(反證)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거듭 언급되고 있는 듯하다.(7절)
[요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
그런데 이것이 머리에 말려있던 대로의 모양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용하기 전의 처음 상태로 말려있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전자라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손과 발이 세마포로 묶여 있고 머리에는 수건이 감겨 있던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온몸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으로부터 몸만 빠져나오는 신비한 방식으로 부활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만약 세마포와 수건이 처음 싸여있던 그대로 제자리에 남아있고 예수께서 몸만 빠져나간 것이라면 그것을 요한이나 다른 복음서 제자들이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는 표현에서 '딴'이 '따로 떨어진'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자일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에는 수건과 세마포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목 길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나란히 뉘여져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한이 세마포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 도적설을 반박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면,
(마 27: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세마포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을 벗겨내어 잘 정돈해 놓았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요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들어가 보고 믿더라 - 베드로가 담대히 무덤 안에 들어가 살펴보고 나자 요한도 힘을 얻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기서 '믿더라'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것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이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다는 해석이다(Barrett, Godet, Hosknys).
특히 고데(Godet)는 '보고'와 '믿더라'의 두 동사가 모두 단수형임에 주목한다.
2-7절에서는 두 제자가 함께 언급되고 9절과 10절에서도 함께 언급되지만 유독 본절에서만 단수형인 동사를 사용하여 그 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한 것은 저자 요한이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며, 따라서 사도 요한이 여러 제자들 중 최초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 해석은 일면 타당성이 있지만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어찌하여 베드로나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설령 요한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부활의 의의를 총체적로 이해한 것도 아니며(9절), 보지 않고 믿는 것에 비해(29절) 충분하지 못한 믿음이었다 하겠다.
둘째는, 본문의 '믿더라'는 말의 뜻을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입장이다(Broomfield).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전자에 가깝다.
[요 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 본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요한이(혹은 베드로도) 무덤 안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님의 부활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의인의 부활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한 정도였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구원사적(救援史的) 의미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다고 말하는 성경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시 16:10을 가리킨다고 본다. (Robertson, Sanders, Tenney).
(시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이 구절은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 중에도 언급되고 있다.
(행 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13: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리고 눅 24:44-47 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예표되어 있음을 말씀하셨다.
(눅 24:44-47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요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 집으로 돌아가니라 - 요한과 베드로는 각각 자기의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공동의 숙소로 다시 돌아간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한편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 요한의 경우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8절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베드로는 다소 기이한 생각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하면서 돌아갔을 것이다.
(눅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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