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
성 경: [요 20:11-18]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 두 제자는 떠나고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 남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요한은 마리아가 언제 무덤에 다시 돌아왔는지 혹은 두 제자가 돌아갈 때 마리아와 다시 만났는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마리아가 통곡하는 장면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울면서'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이런 대성통곡은 예수께 대한 그녀의 제자로서의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의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는 생각 외에 다른 가능성(부활)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요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 흰 옷 입은 두 천사 - 빈 무덤과 관련된 천사의 출현에 대해서는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를 드러낸다.
가령 마태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로 묘사하고 천사의 숫자는 하나인 것처럼 기록했다.
(마 28: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마가는 "횐 옷을 입은 한 청년"으로 묘사하고
(막 16: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누가는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눅 24: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이와 같은 천사에 대한 묘사를 비교해 보면 천사가 횐 색깔의 옷과 관련되어 있고 광채가 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있고,
숫자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천상적 존재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천상적 존재를 인간의 육안(肉眼)으로 관찰하여 묘사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때 별 무리 없이 이해된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동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누가와 요한은 무덤 주위의 사실에 대한 설명에 성실했던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실 설명에 몰두한 나머지 천사의 숫자 같은 부대 사항들을 묘사하는 것은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빈 무덤에서의 천사의 출현은 무덤에서 무언가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요 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 마리아의 슬픔에 찬 울음이 어찌나 처절한 것이었던지 천사들조차 그것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마리아가 이렇게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있는 것은 바로 삼 일 전에 사랑하는 주님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슬픔에 무덤 속의 시신마저 없어진 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례와 장사를 매우 중하게 생각했고 시신에 대한 결례를 끔찍한 일로 증오하였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마리아의 걱정과 불안 그리고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겠는가 는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천사의 물음은 그녀가 어떤 이유로 울고 있는지를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물음은 '여자여 그대는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의 뜻이었을 것이다.
(눅 24:5-6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한편 본서에서는 천사의 역할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시사 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어찌하여 우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말을 하지 않으며 더 이상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해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천사가 주님의 부활 사실을 고지(告知)하고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
(마 28:5-7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막 16:6-7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눅 24:5-6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 여기서 2절에서와 달리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임을 가리킨다.
한편 이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뒤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누군가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 마리아는 무덤 속을 드려다 보고 있었고 천사들은 안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뒤를 돌아다보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제시되어 왔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이래 많은 주석가들이 제시한 것으로 천사들이 질문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뒤에 계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또 다른 문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뒤에 서 계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일까?
그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
이런 몸에 대해서는 바울이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고전 15:51-53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본 것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이 아니라 엠마오 도상(道上)의 두 제자도 그랬고,
(눅 24:13-16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해변에서의 제자들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여기에 덧붙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몰라본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요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 부활하신 주님의 첫 번째 물음은 천사의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침착한 마음으로 생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두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이 통하는 바를 알아챌 수도 있었을 것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마음은 걱정과 조급함 그리고 당황과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자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렸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은 시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물음은,
믿음이 부족한, 성도들이 괜한 걱정과 불안으로
무의미한 눈물을 흘리며 찾지 않아야 할 곳에서
주님을 찾을 때 들려주어야 할 물음인 것이다.
▶ 동산지기 - 막달라 마리아는 얼떨결에 뒤에 서있는 주님을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지기라고 착각했다.
그토록 이른 시간에 동산 주위에 서성이는 사람으로서 동산지기를 떠올림은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가져가리이다 - 여기서 사용된 '주여'(퀴리에)는, 13절과 18절의 '주'(퀴리오스)와는 달리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일반적인 존칭어로 사용되었으므로 '선생님' 또는 '여보세요'가 옳은 번역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염원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고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조급한 나머지 '누구의 시신이 없어졌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채, 만일 옮겨 놓았다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단신(單身)으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주님의 시신을 찾아 자신이 다시 매장하겠다고 나서는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실수를 어느 정도는 덮어주고 있다.
[요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 마리아야 -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내고 마리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과 억양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을 부르면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10:3, 27말씀을 연상시킨다.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 본문의 '돌이켜'는 아마 요한이 극적인 장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즉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받았을 충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러한 수사법을 사용했으리라 판단된다.(Lenski).
한편 '랍오니'(Rabboni)는 '나의 선생님'을 뜻하는 헬라어 '디다스칼레'에 상응하는 아랍어이다.
이 칭호가 본문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1) 단순한 선생님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Barrett, Lenski)
(2) 문자적 의미 그대로 즉 '선생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Bultmann).
그러니까 전자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인식하였다고 보아 '나의 친애하는 주'의 뜻으로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마리아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분에 대해 부활하신 주님으로가 아니라 생전의 예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아 단지 '선생님'으로 보는 것이다.
두 견해가 다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는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튼 마리아는 순간적으로 기쁨에 넘쳐 주님을 향해 달려들었다(17절)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 나를 만지지 말라 - 본문은 금지를 나타내는 '메'와 함께 쓰인 현재 명령법으로 되어있는데,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Lenski, Rebertson, Tenney).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것을 허락한 마태의 기록(마 28:9)을 고려해서이다.
(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 앞 절에 이어 여기서 생기는 물음은 어찌하여,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지 않은 것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께서 아직 승천하지 아니하였고 또 즉시 승천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만나보고 올라가려 하므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본다. (Tenney).
(2) 먼저 아버지에게 간 후에야 제자들과의 접촉을 허락한다는 의미로 본다. 여기에는 마 24:9와 조화될 수 없는 난점이 있다.
(눅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3)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한 것은 그녀가 주님을 보았을 때 생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생전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마리아는 생전의 랍비로서가 아니라 죽고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예수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위의 세 견해 중 세 번째 것이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
▶ 내 형제들에게 - 이 문구의 의미가 예수의 직계 혈육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이것은 여기서 갑자기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예수께서는 생전에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한 바 있고(막 3:35),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히 2:11)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본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예수와 제자들 간의 관계가 친구 사이에서
(15:14-15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나아가 영원한 혈육의 관계로 발전된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뒤에 이어지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와 한 가족, 한 몸이 되었다.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 여기서 주님과 제자들을 따로 분리하여 진술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일체(一體) 상태에 있는 특별한 관계이지만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는 양자로 선택된 관계라는 것이다.(Barrett, Tenney, Lenski).
어거스틴(Augustine)은 이것을 '본성으로는 나의 하나님이며 은혜로는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문구로 표현한다.
다른 하나는 본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同等性)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룻 1:16을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Moule, Brown).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런데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상 전자의 견해가 우세하다고 본다.
▶ 올라간다 하라 - 혹자는 본절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신 것은
'나를 만지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기 전에 이 사실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Toray).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첫째, 수난으로 시작되는 구원사의 결정을 완성하는 의미가 있다.
(6:52-6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둘째 올라감은 또한 다시 옴을 뜻한다.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23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것은 곧 성령의 도래를 뜻한다.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한 후 성령께서 내려오면 예전보다 더 친밀한 영적 연합의 관계가 맺어지게 될 것이다.
[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 '이르니라'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거의 한호에 가까운 감정으로 외치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그려주고 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외침은 어디서 소문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목격한 사실임을 말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을 확정적으로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이어서 미리아는 주께서 분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였다.
요한은 여기서 이야기를 맺고 장면을 바꾸고 있으며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한편 이에 대하여 마태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제자들이 분부대로 갈릴리의 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주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마 28:16-20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마가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인들이 빈 무덤과 천사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는 두려움에 싸여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고 두번째 예수께서 친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현헌하셨을 때는 그녀가 가서 전하였으나 제자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막 16:8-11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략한 채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주의 부활을 고했으나 제자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 24:8-11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이런 사실들로 볼 때 제자들이 처음에는 여인들의 부활 보도를 선뜻 믿으려 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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