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거듭난 삶 2017. 1. 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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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 [ 20:19-23] 안식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20:19] 안식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 첫날 - 날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 가리킨다.

 

'주일' 정확하게 안식일 다음 날에 기원을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문헌에 의하면 초대 교회가 '주의 ' 일컬어진 특정한 날에 예배와 친교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주의 '이라 공식적인 칭호가 나오는 1:10 이나 고전 16:2 등을 참조할 ,

 

(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으니,

 

고전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과는 다른 어떤 특정한 날을 지켰음이 확실해진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상 안식일이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 멍에가 아니라는 사상이 보편화되고 있었다.

 

(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그들은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폐기하기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를 주는 '안식 첫날'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로마인들이 태양의 (Sun day) 인정했던 주간의 첫날이 A.D.321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 공휴일화 되면서 날이 '의로운 태양'( 4: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굳어진 듯하다.

 

( 4:2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피신했었다.

 

( 26:56 그러나 이렇게 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제자들은 위험한 선동자의 추종자로 혐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비밀스러운 곳에 은신하고 있었고, 언제 산헤드린의 군사들이 체포 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으므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것이다.

 

문들을 받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 요한이 누가와는 달리

 

( 24:36-38 말을 때에 예수께서 친히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문이 굳게 닫혀진 사실을 기록한 것은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외에 예수께서 어떤 장애에도 방해받지 않고 공간을 통과할 있는 영적인 몸을 입은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예수의 부활체는 20절로 미루어 지상 생애 당시의 몸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있다.

 

(20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는 공생애 기간에도 당신의 뜻에 따라 물리적 제한을 초월하실 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6:16-21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그러나 부활체는 고전15:44 언급된 '신령한 '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자연 상태인 육체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진다.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평강이 있을지어다 - '평강' 해당하는 혤라어 '에이레네' '평화', '화평', '복지' 뜻으로 히브리어의 '샬롬' 상응하는 말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인데,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왕하 5: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헤어질

 

(삼상 1: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16:36 간수가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이웃을 방문할

 

( 10:12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등의 일상의 생활에서 주고받는 인사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이 주님의 입에서 베풀어졌을 , 뜻은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가져다 주는 평안과는 다른 그분의 평안이라는 범주에서 이해된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마 평강은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결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 참조 : ( 13:4-12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6)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박수 엘루마는 (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 20:20]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자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무서움에 빠졌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유령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상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장면이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기 시작했다.

 

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생선을 달래서 먹었던 일도 같이 전해주고 있다.

 

( 24:41-43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께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 것은 그의 부활한 몸이 육신과의 연속성(連續性) 가지고 있으며 죽으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했다거나 기타 가현실적인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혹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님의 현현이

 

'너희에게 오리라' 약속(14:18) 성취된 것이라고 보며,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본절의 '기뻐하더라' 앞에서 빌어준 평강이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목자 없는 양같이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심정이 얼마나 곤혹스러웠을 지를 상상한다면

 

(19 안식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제자들의 기쁨과 위안이 얼마나 컸겠는지는 눙히 짐작할 있는 일이다.

 

한편 십자가 처형에 관한 사복음서의 기록은 한결같이 '십자가에 박은' 사실만 간략히 언급할 구체적인 장면을 생략하고 있다.

 

( 27: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박은 후에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15: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박으니라;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박고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다만 24:39, 40 통해

 

( 24:39-40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알라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우리는, 예수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십자가에 박히신 흔적이 있었음을 있다

 

 

 

[ 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평강이 있을지어다 - 19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19절의 평강 기원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본절의 평강 기원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파할 당할 환난에 대해 담대히 설수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복음서들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나의 하는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38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8: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11:42 항상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7:3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을 깊이 인식하였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심으로 사명올 완성하였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심이, 아들이 제자들을 보내심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제자들은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받게 것이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바쳐 복음 선포의 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아울러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권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 권위의 순결성을 간직해야 한다.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께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순종하였던 것처럼,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온전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였던 것처럼

 

(1:32 요한이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교회가 주님께 철저히 의존되어 있고 복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위의 사도적 사명과 권위는 교회에 의해 승계(承繼)된다.

 

 

 

[ 20:22]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장면 묘사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유사하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37:9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표현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주시는 것이 병행을 이루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주심이 새로운 창조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을 가졌다면,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사도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있다.

 

( 28:16-20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창조는 복음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의 출처를 말해주는 , 사도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게 것이다.

 

(고전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4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한편 '받으라'에는 '영접하라' 뜻으로 성령을 받는다 함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 수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인간 실존 속에 모신다는 뜻이며 또한 사도들을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난다 해도 일의 능력의 원천은 사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사도들 속에 내주하는 성령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오순절(五旬節) , 곳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서 폭발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리고 모든 것은 약속의 성취였다.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20:23] 너희가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 누구의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을 권세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 2:5-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사도들에게는 복음 증거의 사명과 권위가 주어졌다.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할 ,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받는 결과가 생긴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죄가 그대로 남아 끝내는 심판을 받게 된다.

 

( 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제자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도들이 복음 증거의 사명을 소홀히 하여 누군가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잘못된 교훈을 받게 된다면 그리하여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없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도들의 직무 태만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선별하여 복음을 들려줄 있는 권세를 가지지 않으며 다만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도들이 받은 사명은 고귀한 권세이자 엄청난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 주여,

당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인류를 살려주셨습니다.

먼저 믿어 주의 제자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는

많은 세상사람 들을 구원하는 일에

많은 은총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