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말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거듭난 삶 2017. 7. 29.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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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침례요한을 변호하시다

 

마태복음 11 7-15 :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보라 내가 사자를 앞에 보내노니 그가 길을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중에 침례 요한보다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엘리야가 사람이니라

15)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참조 : (누가복음 7 24-28)

 

 

예수가 요한의 사자(使者) 맞이한 것도,

질문에 대답하신 것도,

그가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

 

정확하게 말하면 사자가 귀도(歸途) 오르자마자,

아직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지도 않은 동안에,

그는 요한의 변호를 시작하셨다.

예수의 말씀의 간단 심각함은,

그가 요한을 업신여겨서가 아니다.

반대가 사실이었다.

 

요한은 예수를 의심했으나,

예수는 요한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드러나게 그를 하면서 안으로는 그를 변호하시었다.

참된 친구는 모두 그러하다.

사람이 친구를 변호한 말로서 예수의 요한 변호보다 나은 것은 없다.

 

7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들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요한의 세력이 때는 매우 위대했던 까닭에,

그의 설교를 듣는 것이 일종의 유행으로 되어,

누구나 그를 보려고 황야로 갔다.

그러나 그들의 거의는 요한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요한은 요단강가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자는 아니었다.

그는 세론에 움직여져 설교사는 아니었다.

요한복음 1 6절에

 

여기 하나님이 보내신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있는 대로,

 

그는 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사람의 요구 따라 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지에 의해 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세상의 인망가 같이 보는 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8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

그러면 권자에 아부하는 나부(coward)였던가?

아니라고 예수는 대답하셨다.

 

부드러운(아름다움 아니다) 옷을 입은 자는 왕궁에 있다 그는 말씀하셨다.

 

원어대로 역하면,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는 권자의 집에 있다 된다.

 

그리고 침례 요한은 확실히 연약하여 남에게 아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권력의 비보(patronage)아래 움직이는 설교사는 아니었다.

그는 위해서는 왕을 면책하여 마지않는 강직, 바위 같은 사람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

권세에 아부하는 약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예언자인가?

옳다, 예언자 이상이다.

그는 여인이 낳은 ,

아브라함의 후예 중에서 가장 자였다.

최후에 나타난 예언자로서, 구약에 끝을 고하고 신약을 소개한 자이다.

그리스도 앞에 나타날 이른바 엘리야이다.

그에 의한 천국은 이스라엘에 소개되고,

그에게 배워, 많은 사람은 힘써 천국에 들어가려 했으며,

들어갈 있었던 것이다.

 

실로 위대인물, 하나님의 사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를 어떻게 취급했던가?

 

왕은 자기의 불의를 가리기 위해 그를 옥에 던졌다.

백성의 다수는 호기심 반으로 그의 가르침을 듣고,

잠시는 그를 찬양하고, 그를 잊어버리고, 그를 버렸다.

 

있어서 들을 자는 들을 것이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위대인물,

광명을 어떻게 취급했던가?

 

깊이 자성하여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해야 것이라고.

예수는 같이 침례 요한을 변호하시고, 그의 국인(國人) 힐책하시었다.

 

실로 예수를 안자는 요한,

요한을 이는 예수이다.

 

요한으로서 만약 자기에 관한 예수의 변호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는 감사의 눈물에 목매어 일찍이 1회나마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의심한

경솔 천려(淺慮) 견딜 없을 만큼 부끄럽게 여겼으리라.

 

관대하신 예수여,

그는 그렇게 하시어 우리들 각자를

하나님과 사람과의 앞에서 변호하신다.

 

그는 우리들의 악에 의해 우리들을 심판하시지 않고,

선에 의해 우리들을 중보 하신다.

 

그는 오늘의 선교사 교회신자처럼,

우리들의 흠점을 잡아 우리들의 가치를 정하시지 않는다.

 

면전에 있어서는 강하게 우리들에게 대하신다 해도,

그늘에 있어서는 강하게 우리들을 변호하신다.

 

그는 친구의 모범이다.

같이 하여 세상의 이른 친구를 많이 가지지 한다 해도,

진정한 친구는 같이 하여 가질 수가 있다.

 

우리들은 예수가 우리 각자를 취급하신 같이, 서로를 취급하지 않으면 된다.

 

이스라엘인으로서의 요한에게 흠점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언자 이상의 예언자, 엘리야의 재생이라고도 칭할 자였다.

하지만 천국의 가장 작은 자는 보다도 크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가장 작은 자는 가장 자보다도 크다 하신다.

이것은 요한을 작게 하시기 위해 말하신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에 참여한 자의 광영이 얼마나 것인지,

그것을 고하기 위해, 또한 상찬의 말씀 중에 예수가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을 그르치지 않은 것이다.

실로 천국의 최소한 자는 요한보다도 것이다.

 

그것은 요한은 여인이 자인데 대하여,

천국의 자녀는 영에 의해 자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3 참조).

 

질이 전연 다른 것이다.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때는,

새로 지음 받은 자이다(고린도후서5:17)라고 바울이 말한 대로이다.

 

마치, 비천한 사람이라 해도, 가장 고가의 또는 개보다도 귀함이 있음과 같다.

요한 자신도, 아마도 순교의 죽음을 마치기 전에 광영에 참여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것은 그라고 해도 스스로 힘써 달할 있는 경우는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들어갈 있는 은혜(축복)이다.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이는 신앙에 의해서이다. 자기로 말미암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사이다(에베소서 2:8)라고, 바울이 말한 대로이다.

 

가령 요한이라 해도,

은혜로 말미암는 신앙에 의하지 않고서는,

천국의 백성으로는 없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최대의 사람보다도 크다고 하시어, 예수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내촌감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