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엔 난파설 … “이젠 정부 관계자에 경의”피치, 한국 신용등급 전망 상향조정
금융위기 발발 이후 해외언론에서 이른바 ‘한국 때리기’가 계속됐다. 올 초 3월만 해도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경제위기를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회복하며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고 있다.국제적 신용평가사 피치가 2일 한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에서 ‘안정적’으로 상향 조정했다. ‘안정적’은 현 신용등급 수준이 적정하고 당분간 유지된다는 의미다. 이번 신용등급 전망에 대한 조정은 피치 실사단이 지난 7월 8일부터 10일까지 방한해 한국과 연례협의를 거친 뒤에 나온 것이다.
이번 피치의 신용등급 전망 상승 조정은 지난 1년간 피치가 한국에 보인 태도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피치는 지난해 11월 한국의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어 3월 12일엔 ‘2010년까지 한국의 18개 은행이 42조원의 손실을 볼 것으로 추정된다’는 스트레스 테스트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2분기 이후 상황 반전
스트레스 테스트란 악화된 상황을 전제로 예상하는 것이지만 이 보고서 한 건에 정부와 은행권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정부와 은행권은 ‘의도가 불순하고 불공정하며 비합리적인 보고서’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은행연합회는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4월만 해도 피치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가국장인 제임스 매코맥은 로이터 통신과 한 e-메일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는 회복이 완전하게 이뤄지기도 전에 성장률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는 “한국과 같은 개방 경제에서는 수출 부진이 시차를 두고 국내 수요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랬던 피치가 1년도 안 돼 등급 전망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이다. 지난해 11월 피치가 6개국의 등급 전망과 4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는데, 이들 가운데 원래 상태를 회복한 국가는 한국뿐이다.
피치는 이번 등급 전망 상향의 주요 이유로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의 노력, 거시경제지표 및 외화유동성 개선을 꼽았다. 또 지난 2분기에 한국 경제가 높은 경제성장률, 수출 부문의 경쟁력 상승 등으로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준 점을 들었다. 피치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한 정부의 금융 및 재정 정책이 신속하게 이뤄졌고 경상수지 흑자, 단기외채 감소 및 외환보유액 확충 등으로 대외 채무 상환불능 우려가 현저하게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국가신용등급 전망의 상향 조정은 한국 금융회사들의 등급 또는 전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대외신인도가 높아져 한국 금융회사 및 기업의 해외자금조달 여건이 크게 개선될 전망이다. 해외 투자자의 투자 심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올 초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피치와 같은 신용평가사뿐만이 아니다. 올 초 3월만 해도 영국 언론을 중심으로 한 ‘한국 때리기’가 이어졌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3월 초 “아시아 지역에서 신용위기의 주요 피해국인 한국이 지난해 4분기에 대외채무 450억 달러를 상환했지만 여전히 순채무국”이라고 보도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7개 신흥시장국의 위기상황 평가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헝가리에 이어 한국을 폴란드와 함께 위기에 취약한 순서에서 3위 국가로 올려놓았다. 더 타임스는 지난해 “한국에 검은 9월이 닥치고 있다”며 ‘대한민국호(號) 난파설’을 제기한 바 있다.
홍콩의 ‘친중국계’ 신문인 문회보(文匯報)는 3월 ‘금융쓰나미 아시아 강타…파키스탄·한국 가장 위험’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우리나라를 파키스탄과 함께 아시아 국가 가운데 국가파산 위험도가 가장 높은 국가로 분류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2~3개월간 해외언론의 한국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서울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경의를(Hats off to officials in Seoul).”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7월 26일자 칼럼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모두가 허덕이는 상황에서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 경제에 존경심을 표한다는 의미에서다.
외신 기사에 적절한 대응을
그는 한국이 2분기에 전분기 대비 2.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라 평가했다. 원화 가치가 뚝뚝 떨어지던 8개월 전만 해도 한국에 대해선 우려의 시선이 많았고 단기외채 문제 탓에 ‘제2의 아이슬란드’가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지만 그는 “지금 한국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먼저 중앙은행 기준 금리를 올릴 곳으로 꼽히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FT는 한국의 수출 기업들이 원화 약세와 차별화된 제품, 가격 경쟁력을 통해 세계 경제 침체를 헤쳐 나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등 한국 기업들이 발표한 영업이익은 호조세로 2분기를 이끌었고, 시장점유율 상승으로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해외 경쟁기업들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는 내용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9월 1일 세계 경기회복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한국은 글로벌 위기로부터의 회복세가 뚜렷하다고 평가했다. 해외의 시각은 언제든 표변할 수 있다. 우리 경제는 해외의 부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 위기 상황을 잘 타개해 왔다.
그러나 해외의 한국 때리기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큰 타격을 줘 실물경제를 주저앉힐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런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해외 주요 기관과 상시 소통 채널을 구축해 가동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때리기 외신보도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크레디스위스는 한국의 국가위험도를 선진국보다 좋게 평가했으며 보스턴컨설팅그룹도 한국에 대해 고무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피치의 신용 전망 상향 역시 정부의 적극적인 소통이 뒷받침한 성과다. 피치가 한국의 신용등급 전망을 조사하자 윤 장관은 허경욱 기획재정부 1차관을 홍콩으로 보냈다. 허 차관은 피치의 매코맥 국장을 만나 한국 경제가 얼마나 활력을 되찾았는지 설명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이 한층 더 의연하고 세련되게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3월 23일자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피치 한국사무소의 금융담당 애널리스트 장혜규 이사는 “예측도 아닌 스트레스 테스트에 정부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했다. 그는 “잠재적 위험에 대해 경고를 울린 것”이라며 “경고를 거부한다면 그 시스템은 건전한 시스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또 2005년부터 3년간 영국 주재 한국대사로 일한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과거에 우리 정부가 외신에 과잉 반응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연하고 세련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며 “해외언론이 주로 인용하는 곳의 자료가 제대로 업데이트 되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부정적인 외신기사에 따른 가장 적절한 대응은 그들이 우려하는 대로 되지 않게 잘 해나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우려가 기우에 그치도록 만들면 된다. 이번 피치의 신용등급 전망 상향이나 해외 언론의 한국 관련 보도가 확인해 준 대응법이다.
임성은·백우진 기자·lsecon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