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거듭난 삶 2019. 2. 2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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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불순종

 

: [ 10:17-21]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소리가 땅에 퍼졌고 말씀이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아라; so then, KJV)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 '듣는 행위'(act of hearing) '들려 오는 '(that which is heard)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전하는 '(아코에)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16 그러나 저희가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나 앞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was heard)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 의미로 쓰여졌다(Hendriksen).

 

또한 바울은 구원얻는 신앙, 믿음은 듣는 행위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레카토스 크리스투)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할 수도 있다(Harrison).

 

따라서 바울은,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소리가 땅에 퍼졌고 말씀이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없었다고 변명할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우크 에쿠산)

'그들이 듣지 못했는가?' (새번역; Did they not hear?, NIV)라는 의미가 적절하다.

 

여기서 헬라어 '' '우크' 부정을 강조하여

'그들이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라는 말이다(Dunn, Lenski).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이 결코 듣지 못해서,

전도를 받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소리가 땅에 퍼졌고 말씀이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19:4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 주장하고 있다.

 

( 19:4 소리가 땅에 통하고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그러나 말씀을 복음이 전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22-24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막혔더니

23) 이제는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없다 보라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2:41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더라;

 

17:6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1:12-13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6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knowing)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도 앞절에서와 같이 헬라어 부정불변사 '' 사용하여서 부정적인 대답을 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이는 32:21 인용으로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일부인데,

 

(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것이다.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에프 우크 에드네이) '미련한 백성'(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

다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존귀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 10: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바울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에 대해 변명할 없도록 이전의 증거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를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매우 담대하여' 번역된 헬라어는 '아포톨마' '담대한 태도를 취하다' 뜻을 지닌

'아포톨마오'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온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

 

말씀은 65:1 인용으로 분명히 앞절(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 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 10: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 65:1)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65:2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 65: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 라온 아페이둔타 카이 안틸레곤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병행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페이둔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나타내는 것이고,

'안틸레곤타' 이스라엘의 불신앙의 결과로 나타나는 완악한 행동과

나아가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Lenski).

 

이처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말씀' 들을 기회가 없었다거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원래부터,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서부터 완악하고 반역적인

기질이 있었으며 이러한 기질로 인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서 기인한 것이다(Harrison).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을 예수께서도 탄식하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자녀를 모으려 일이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되리라"( 23:37-38)

책망하고 있다.

 

 

종일 손을 벌렸노라 -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베푸셨는가를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헤메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라'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

부성애(父性愛)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을 찾고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참히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책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