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거듭난 삶 2019. 4. 5.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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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 [ 15:10-13]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1)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2)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15:10]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 번째 인용문은 32:43 모세 노래의 마지막 내용으로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 32:43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종들의 피를 갚으사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특히 본문은 70인역(LXX) 문자적 인용으로 헬라어로는 '유프란데테, 에드네'이며

'즐거워하라, 이방인들이여'라는 의미이다.

 

이방인들의 회심을 예언한 말씀이 이제 성취되고 있다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Dunn).

 

또한 이방인들의 지위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참할 있을 만큼 높아진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E.F. Harrison).

 

그런데 맛소라 사본(MT) 70인역(LXX)과는 약간 다르다.

맛소라 사본에는 "그의 백성(암모) 찬양하라, 너희 열방들아"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히브리어 '암모' 원문 그대로인가는 의문이다.

아무튼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력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헬라어 본문에서는

'주의 백성과 함께'( 라우 아우투)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에 대한

매우 적대적이고 감정적인 히브리어의 의미를 보다 완화시켜

이방인도 수용하는 우주적인 의미로 변화시켜 주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헬라어의 의미를 자기 자신의 신학에 적용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과 약속에 따라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지금은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된다는 그런 신학에 근거하여

이방인들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즐거워하라고 촉구한 것이다(Dunn)

 

 

 

[ 15:11]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번째 찬송시는 117:1 인용 구절로서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것이다(Godet).

 

( 117:1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

 

이로 인해 모든 열방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송하게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열방들아'(판타 에드네) 말은 모든 이방 민족들을 지칭하고

'모든 백성들아'(판테스 호이 라오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은혜를 입은

모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이다.

 

이제는 이방인들이 유대 전통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대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주를 찬송한다는 것이다.

 

예언은 오늘날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예배 드리고 있는 사실에서 넉넉히 입증되고 있다.

 

 

 

[ 15:12]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이새의 뿌리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 구절은 11:10 말씀의 인용이다.

 

( 11:10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새의 뿌리' 왕적 메시야를 가리키는 칭호로서,

 

( 11:1-5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나며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위에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책과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22:16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그리스도를 지칭한다(Dunn).

 

 

성경은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것을 예언하였다.

 

( 11:1 이새의 줄기에서 싹이 나며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10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새' 다윗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의 육적 계보를 형성했다.

 

(삼상 16:11-13 이새에게 이르되 아들들이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 16:12)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7: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것을 알고 있었다.

 

(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12:23 무리가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12: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하고 계획해 놓으신 것이었기 때문이다.

 

( 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책과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유대 고을 가장 작은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지만 그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약간의 차이를 두어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엘라우고임 이드로슈)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망을 두리라' 대신에 '돌아오리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에 있어서 '하나님께 돌아온다' 것은

'그에게 소망을 둔다' 것과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소망' 헬라어 '엘피우신'으로 본절에서는

기쁨과 확신으로 구원을 소망하며 기다린다는 뜻을 가진다.

 

본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번이나 확증하고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서 이스라엘 백성 아니라 이방인까지 다스릴 분이시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고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의 하나님 - 하나님은 믿는 자의 소망의 근원이시고 소망의 유일한 대상이시다.

 

( 73:24-26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밖에 나의 사모할 없나이다

26)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성경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허락하신 미래를 확신한 가운데서 기다리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진다.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이루어지는데,

단지 구약과 신약에서의 차이점은 구약은 앞으로 오실 자를 소망하고,

신약은 오신 자에 대한 소망,

그리고 다시 오실 자에 대한 소망을 가진 것이라 있다.

 

특히 본절에서 '소망의 하나님'( 데오스 테스 엘피도스)

영원한 구원에 대한 기쁘고도 확실한 기대와 간절한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다.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 본절은 바울의 기원과 권고가 포함된 축도 형식으로서 미래에 대한 소원을 나타내는 희구법이 사용되었다.

 

'기쁨과 평강' 헬라어는 '카라스 카이 에이레네스'로서,

 

기쁨(카라) 안에서

 

( 3: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나타나는 신앙의 결과이며

 

( 1: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성령의 열매이고,

 

(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평강'(에이레네)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되어지는데

실제로 생명(조에)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평강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는 그의 구원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내적인 평온 상태를 의미한다(Dunn).

 

한편 '믿음 안에서' '믿음' 교회의 조화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토대가 되며 모든 인간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주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된다(Dunn, Godet).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절은 앞에 나온 구약 인용문들의 요약이다.

 

기쁨과 평강의 근거가 믿음 안에서 시작된다면 소망 역시 믿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과 소망을 충만케 누릴 있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뒤나메이 프뉴마토스 하기우)이다.

 

여기서 '~으로'라는 전치사 엔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라는 위치와 장소를 나타내는

처격임과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라는 도구적 의미를 지닌다(Dunn).

 

그리고 '능력'(뒤나메이) 일반적으로 '~ 있는 , 권능'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성령께서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소망을 일으키는

경이적인 능력'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된다(J. Cal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