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초대교회의 실례(實例)

거듭난 삶 2019. 4. 2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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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실례(實例)

 

로마서 16 1-16: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2) 너희가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저희는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5)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 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어머니는 어머니니라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지혜롭고 악한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1)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 편지를 대서하는 더디오도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 나와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 (없음)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하신 비밀의 계시를 좇아 것이니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일본어로서 교회라고 역된 에클레시아가 무엇인지는,

신학적 정의에 의해서는 알지 못한다. (한글의 경우도-역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골로새서 1:18),

만물로서 만물에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한 곳이라(에베소서 1:23) 들어도,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교회가 무엇인지는 어떠한 것이었나를 아는데 따라서 알게 된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공구하여 있다.

다만 이것을 신학적으로 논구하여, 일정한 결론에 달할 수는 없다.

 

갈라디아서 3 26 이하에 이르기를

 

너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이 자라…… 중에 유대인 또는 그리스인 있을 없다. 중에 노예 또는 주인 있을 없다. 중에 남자 또는 여자 있을 없다. 그것은 너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라고.

 

이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자의 단체,

 

그러므로 가운데 인종차별 있을 없다,

주종의 차별 있을 없다,

옳다, 남녀의 차별 있을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의 일치에 의해

육의 차별을 제거 받은 자의 일단이다.

 

인종과 계급과 성별을 초월한 단체이다.

바울의 말을 다시 개인적으로 실증한 것이 로마서 16 1절에서 16절까지이다.

 

여기에 사도시대의 교회조직과 정신이 유감없이 명시되어 있다.

 

초대교회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려고 하는 이는,

성서의 이러한 곳에 주목해야 것이다.

 

단지 고유명사의 연속이라고 해서 이것을 가볍게 넘겨버려서는 된다.

고유명사는 사실의 증거이다.

바울은 몽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이상의 교회를 꿈꾸어 실현을 시도하지 않는 같은 이는 아니었다.

 

나는 너희에게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추천한다. 그녀는 겐그레에 있는 교회의 ()집사이다. 나는 너희에게 권한다, 너희가 성도로서의 합당한 ()로써 주안에서 그녀를 영접하고, 그녀가 너희에게 구하는 바를 따라, 무슨 일이거나 그녀를 도와주기를. 그것은 그녀 자신도 오늘까지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자신도 또한 그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해 달라. 그들은 어떤 때는 목숨 위해 그들의 목을( 아래) 내어 놓았다. 그것으로 인하여, 혼자 나쁜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가 그리스도에 드린 열매이다.

너희를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혈연으로서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와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명성 있는 이다. 그들은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이다.

 

안에서 나의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함께 일한(동역한) 우르바노에게 문안하라.

사랑하는 스다구에게도 그렇게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연단된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블로의 가족에게 문안하라.

혈연인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에게 문안하라.

주안에서 많이 수고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그녀는 안에서 많이 수고하였다.

 

안에서 택함 받은 루포와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어머니는 어머니이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그들과 함께 잇는 형제들에게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 너희에게 문안하라.

 

 

여기 27 고유명사가 있다.

27인의 신자가 이름 따라 불리고 있다.

그들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 신자였다.

 

9인이 여자이고 18인이 남자이다.

남자 없고, 여자 없다이다.

 

오늘의 일본에서와 같이 남존여비의 옛적의 로마에 있어서,

여자가 남자와 아울러 불린 것은 이미 이례이다.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인 뵈뵈, 아굴라의 아내인 브리스가(11 145역주참조),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있어, 경우에 있어서만 여자의 이름이

남자의 앞에 기록되어 있다.

 

성도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

안에서 신앙의 싸움을 계속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 루포의 어머니로서,

바울이 그의 어머니는 어머니라고 노부인,

빌로롤고의 아내인 율리아, 네레오의 여동생……

로마 교회에 많은 존경할 만한 부인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유화한 영혼에 그리스도의 영을 거하시게 하고,

접대, 위자의 노고를 취하고, 그리하여 안을 따뜻하게 하고 밖을 화평케 했다.

 

만약 인종에서 말하면,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유대인이었다(사도행전 18:1이하참조).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헤로디온은 바울의 혈연이라고 있으며,

그들도 어쩌면 바울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리라.

 

그러나 혈연이라는 말은 과연 자의대로 해석해야 것인지 아닌지는 의문이다.

바울의 친척 중에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한 사실이다.

 

만약 명칭의 어원 따라 그들의 인종을 구별한다면,

유대인은 마리아 사람이다.

안드로니고는 라틴인(로마사람)이고, 아내 유니아는 그리스(헬라)인이다.

암블리아, 우르바노, 루포는 라틴인이고,

스다구, 아벨레, 헤로디온, 드루베니와 드루보사, 기타 14인은 그리스인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처럼 혼합인종의 나라에 있어서는,

사람이 속하는 인종은 그의 이름에 의해서는 알지 못한다.

 

현재 우리들은 아굴라가 유대인이었음을 알고 있지만, 그의 이름은 라틴어이다.

유대인이었던 다소의 사울이 로마인으로서 스스로 바울이라 부른 같이,

당시의 많은 유대인은 그리스어이든지 또는 라틴어의 이름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명칭에 의해 확연하게 그의 일종을 정할 수는 없대도,

로마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신자로서 바울이 여기에 지명한 중에,

히브리어의 이름을 있고, 그리스어의 이름을 있고,

라틴어의 이름을 있음을 보고, 이인종의 신자가 있었음과 동시에,

또는 그들 사이에 인종의 구별이 없었음을 있다.

 

로마에 있어서 바울의 교우의 명부에 의한 대도,

 

중에 유대인 또는 그리스인 있을 없다는 바울의 이상이,

사실로서 나타나 있음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참되신 하나님은 세계 만민의 하나님으로서,

안에서 인종도 구별을 잃고, 국가도 차별을 버리기에 이르리라는 것은,

바울이 종종 주창한 바이다.

 

그는 같은 로마서에 있어 말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신가?

이방인의 하나님 아니신가? 옳다, 이방인의 하나님이시다(3:29)라고.

 

우리들은 로마교회의 조직에 의해, 1900 전의 옛날에 있어서,

이인종의 서로 시기하고 반목하는 폐단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 전연 제거되었음을 보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계급적 차별이 없었음은 신자의 명부에 의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빌레몬서에 의해 있다.

거기에 노예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과 신앙적으로는 형제에 있었음이 명시되어 있다.

 

어쩌면 로마서 16장이 기재하는 신자 중에

부자도 있었으리라, 빈자도 있었으리라,

우리들은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중산 이상의 천막제조업자였음을 안다.

 

사용위해 그리스의 겐그레아에서 멀리 로마에 뵈뵈는 가난한 부인이었을 리는 없다.

이에 반하여,

아리스도블로의 가족(집의 사람)이라 있고, 나깃수의 가족이라고 있음을 보아,

그들이 부가(富家) 종속이 아니면 오네시모 같은 노예였음을 헤아리기에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에 부자 있고, 빈자 있고, 노예 있고, 주인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불러

사랑하는 또는 주께 택함 받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빈부상하의 차별은 없을 것이다.

이에 있어서만, 사람은 그리스도의 까닭이다.

 

원래의 귀부인 뵈뵈를,

로마의 신자 일동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에 영접한 때에,

거기에 에클레시아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주의해야 것은 교회의 소재이다.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 있다.

 

오늘 교회라고 하면 반드시 교회당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회당 없이 교회 있다는 것은 지금의 신장에게는 이해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수부로서 인구 400 있었다는 로마 시에 있어서,

그리스도 교회는 사람의 천막제조자의 집에 있었던 것이다.

 

보통 집이다. 고단 있었던 아니다, 목사관 있었던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바울의 친우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안식일 마다 형제자매를 초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연단된 아벨레도 거기에 오고,

루포도 늙은 어머니의 손을 이끌어 이르고,

빌로로고는 아내 율리아와 함께, 네레오는 여동생과 함께,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의 비복과 나깃수의 노예는 아무 주저하는 없이

명가의 사녀와 함께 일실에 모인 때에,

그리스도는 그들 중에 계셔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은 지상의 천국으로 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집에 교회 있었던 예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사도행전 12 12절에 의하면,

 

그가(베드로) 요한 이름을 마가라 하는(마가라 이름 하는 요한) 사람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집에 이르니, 많은 사람이 여기 모여 기도하더라 있어서,

 

예루살렘에 있어서의 최초의 교회가 마가복음의 저자의 어머니의 집에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골로새서 4 15절에 의하면,

 

너희는, 라오디게아의 형제들과 눔바,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 있어서,

 

여기에도 교회가 신자의 집에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빌레몬서의 2절에도

 

아킵보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 있어,

여기에도 신도의 가정이 교회를 이루고 있었음이 명시되어 있다.

 

기타, 성서에 기재되지 않은 많은 이런 종류의 교회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말할 것도 없이 교회는 교회당은 아니다.

이인 삼인,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거기에 에클레시아는 있는 것이다.

 

의미에 모이는 곳에, 거기에 에클레시아는 있는 것이다.

의미에 있어서 초대 교회는 순호한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오늘 노국이나 영국에서 보는 같은,

궁전과도 같은 교회당은 초대의 그리스도 신자가 몽상조차 않았던 바이다.

교회당이 없었다. 교직이 없었다.

겐그레아의 교회에 여집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오늘 성공회(6 65역주)에서 말하는 같은 데아코 직은 아니었다.

 

데아코는 본래는 단지 돌보는 사람이었다.

이것을 오늘 집사라고 역하여, 오해하기 쉽다.

 

뵈뵈는 겐그레아에 있어서의 교회를 돌보는 사람이라고 역하여 아무 차질도 없는 것이다.

 

특히 바울이 여기에 지명한 26인의 로마의 그리스도 신자 중에

사람의 교직 없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가는 마다 그들의 집을 교회의 사용에 제공했다(고린도전서 16:19참조).

그리고 그들은 아무 교직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신자였다. 순연한 평신도였다.

천막제조로서 생업으로 하며, 바울을 집에 영접하여,

그가 동업자인 연고로 그와 함께 일을 했다(사도행전 18:3) 있다.

 

기타, 마리아는 부인의 몸으로서 로마에 있어서의 신자위해 많이 수고했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과 가지로 복음 위해 일한 우르바노도 평신도였다.

신앙 견고로서 소문난 아벨레도 특별히 목사 또는 전도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안에서 많이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의 양인도 역시 오늘 이른 여전도사 또는 성서부인은 아니었다.

 

안에서 택함받은 루포라해도 신자로 택함 받은데 그치고,

감독 또는 선교사로서 택함 받은 것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 신자의 단체에 향하여 서간을 보냄에 있어서,

가운데 사람의 교직 같은 이를 지명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이가 중에 사람도 없었음을 증명하기에 족하다고 하여 차질 없다.

 

후일에 이르러서는 어쩔지 몰라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던 때에, 로마 교회에 감독도 장로도 없었고,

그것이 순연한 평신도의 교회였음은,

로마서의 기사에 의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회당 없고, 교직 없고, 따라서 교조 없고, 교계 없다.

그러나 사랑은 넘치도록 있었다.

 

너희는 거룩한 입맞춤으로서 서로 문안하라.

 

이는 사랑에 가족의 상태이다.

바울은 신자 각자에게 문안 인사를 씀에 있어서 무언가 마디,

친애의 인사 말을 더하지 않을수 없었다.

 

사랑하는 에배네도 하고,

 

그는 아시아가 그리스도에게 드린 열매이다라고 한다.

 

수언으로서 에밴네도의 성격과 명예를 나타내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저 아벨레라고 하지 않고서,

 

안에서 연단된 아벨레 한다.

 

신앙 견고로서 명성 있는 , 노련한 신앙적 전사의 뜻이다.

 

루포는 주안에서 택함 받은 ,

특히 그의 어머니는 어머니라 한다.

 

바울은 일찍이 번도 자기 낳은 어머니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루포의 어머니를 불러 어머니라고 한다.

 

어머니 형제는 누구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이는 형제, 자매, 어머니라(마가복음 3:33이하)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기타 비롤로고를 아내 율리아와 함께 부르고,

네레오를 동생과 함께 말하고,

드루배나의 이름을 드루보사의 이름과 연기하여,

부부, 형제, 봉우의 사랑의 긴밀을 전하는 ,

실로 용의주도라 일걷는 밖에 없다.

 

특히 남자를 부르는 ,

 

사랑하는 누구라고 한데 대해,

 

부인인 버시를 부르는데 있어서는

 

사랑받는 버시라고 ,

 

위인 바울의 말로서, 거암 사이에 석죽화의 한포기를 보는 듯이 느껴진다.

실로 사랑은 섬미하다. 사랑을 해득한 자는 깊은 주의로서 이것을 말한다.

개인의 구원, 인류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복음의 오의에 철저한 사도 바울은,

같은 서간 중에서 부인의 감정을 상치 않게 하려 애썼다.

 

바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그는 대사에 있어서 컸고 소사에 있어서 컸다.

그의 전도 성공의 비결은 여기에 있었다.

그는 신앙과 사면에 있어서 컸던 같이 사랑에 있어서 컸다.

 

그에게 있어서 부인의 감정을 중히 여기는 참된 신사의 주의가 있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발하고,

가는 곳마다 굳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다.

 

그러한 사랑에 접촉하여 초대교회는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깊은 사랑을 기초로 하여 생겨난 이들 교회는,

교직, 의식의 제도 없이 번영했던 것이다.

 

오인은 로마서의 말장에 초대교회의 실례가 보여,

오늘에 우리나라에 있어서 재흥을 보고자 함의 뜨거운 희망을 일으키지 않을 없는 것이다.

 

초대교회라고 하면,

일반으로 사도행전 2 이하에 있어서 기원과 행동이 기술되어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켜 말하는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교회만이 사도시대의 교회는 아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상의 교회는 아니었다.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신자가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 중에 행해진(있었던) 사랑은 거짓 없는 사랑은 아니었다.

 

중에 일종의 압제가 있었다.

신앙적 허영이라고도 칭해야 것이 있었다.

 

아나니아 부처는 마음에도 없는 자선을 하고자 하여 사도들의 힐책하는 바로 되고,

마침내 생명을 잃기에 이르렀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배워야 것은 신자의 열심이다.

인내, 평화, 형제의 사랑은 아니다.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이를 믿은 , 5천인이라(사도행전 4:4) 있고,

 

사도들, 능력으로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였다(사도행전 4:33) 있고,

 

신자는 모두 곳에 모여,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산업과 소유를 팔아, 각자의 소용 딸라 이것을 나누어 주었다. 날마다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 있었고, 집에서 떡을 떼고, 기쁨과 성심(진심)으로서 음식을 함께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 구원 받을 자를 날마다 교회에 더하셨다(사도행전 2:44이하)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펜테코스테(오순절) 날에 있어서의 불꽃 혀로써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만사가 격렬하다. 열렬하다. 비상식이다.

 

오인은 귀함은 알지만도, 커다란 흠점을 인정하지 않을 없다.

 

*내촌감삼의 로마서 주석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