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골

어린 양을 보십시오

거듭난 삶 2019. 5. 2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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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 29-34)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옴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것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증거하여 가로되 나를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시인의 기도를 읽습니다.

 

"이른 아침

모든 것이 아직 일어나기

성전의 문을 여는 발자욱 되게 하소서

문을 열면

벌써 당신은

홀로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이른 아침

모든 것이 아직 일어나기

성전에서 들리는 말씀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입을 열면

아침 하늘이 열리고

오늘의 양식을 위에 내리십니다".

 

시인 훈목사의 "목자의 기도" 여러분이 성전의 문을 여는 발걸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영화 "수퍼맨" 주인공이었던 크리스토퍼 리브는

승마 도중 낙마해 아직까지 전신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신문과 잡지에서 보도된 "수퍼맨" 투병 인터뷰는 몇가지 생각들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몇가지 질문과 대답입니다.

 

"승마사고 이후 당신에게 가장 괴로웠던 시간은 언제입니까?".

 

"꿈이 깨는 순간입니다. 잠이 들면 나는 꿈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공원을 걷습니다.

승마도 하고 보트도 탑니다. 수퍼맨 속편을 만들면서 나는 하늘을 날기도 합니다.

그러나 꿈이 깨면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전신마비 환자입니다.

꿈을 꾸지 말든지, 꿈에서 차라리 깨지 말든지 했으면 좋겠지만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대로 되는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속에서 영원히 있기만 해도 좋겠지만 그렇게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침마다 벌떡 일어나 가족들과 공원을 거닐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도 저희들 마음대로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새로운 인생의 목표라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있습니다. 그것은 전신마비 척추환자들을 고치기 위한

의학연구기금 마련을 하는 일입니다.

전신마비 환자는 미전역에 20만명이며 매년 1 2천여건의

전신마비 사고가 일어납니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 80억달러가 소모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돌보는 것보다 고칠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본인을 위해 바람직한 일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없는 인생입니다.

해결할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현대 의학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척추신경치료는 현대의학이 해답을 찾지 못하는 분야중의 하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수퍼맨인 크리스토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케네디가 인간을 달나라에 보내겠다고 말했을 사람들은 설마하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달착륙 꿈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달착륙을 목표로 삼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척추신경도 마찬가지다. 목표를 삼는 사람들이 있는 언젠가 성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지요.

척추신경의 아픔도 언제인가는 치료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된 본성은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어떻게 수가 없습니다.

죄의 사슬을 끊어버릴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끊을래야 끊을 없는, 뿌리칠래야 뿌리칠 없는 사슬을

헤쳐나올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수퍼맨의 말대로 매번 돌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의 문제를 시마다 때마다 달래보는 일가지고도 해결할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의 말대로 고쳐 버려야 합니다. 뿌리가 뽑혀져야 합니다.

완전히 치유해서 척추의 힘을 갖고 직접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든 인간에게 필요합니다.

죄의 문제는 완전한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증거하는 침례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증거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신들메조차 감당할 없다고 말한 이틀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쩌면 침례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위대한 말씀에서 세가지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속일 없는 사실은

'세상에는 죄가 있다'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는 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의 우리들도 바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전 YMCA 시민운동본부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성적인 타락을 위하여 쓰이는 비용이 줄잡아 연간 4조원이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국민 총생산의 5% 해당하는 엄청난 돈입니다. 엄청난 죄악의 물결이 아닐 없습니다.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해결할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죄를 지는 , 헤어날 없는 죄로 인해 캄캄한 세상의 죄악의 어둠을 벗겨내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신 사역의 최종목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시고 죄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상 ' 안에 살고 있는 여러분과 저의 죄를 말합니다.

헬라어 본문을 보신다면 "세상 "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과 저의 각각의 ( your sin and my sin) 짊어지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죄를 분이 지셨습니다.

저의 죄를 개인적으로 담당해 주셨습니다. 하나 하나 따로 만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리, 교회라는 곳에 계시기 때문에 죄의 해결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덤으로 받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 사람이 개별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의 정확한 번역은

'죄를 없애준다 take away', 그래서 완전히 가져가버린다는 뜻입니다.

 

이상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아담 부터 내려오는 죄로 인해, 죄의 본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죄의 담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담이 무너지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다가갈 없게 되었습니다.

죄의 벽이 허물어져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아담과 하와는 결코 한국인이 아니랍니다.

우리 한민족의 조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아담이 한국인의 조상이라면 뱀이 와서 선악과로 유혹했었어도 그것을 절대로 따먹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뱀을 먼저 잡아먹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저트로 어쩌면 선악과를 먹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벽은 이미 깨달으신 바대로 아무도 깨뜨릴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일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애당초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마음에는 질투와 시기 미움, 탐욕, 음욕,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도덕적으로 훈련을 받는다 해도

우리는 일만은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원숭이는 아무리 사람처럼 흉내를 내어도, 어쩌면 사람보다

나은 행동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원숭이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선행을 한다해도 우리의 죄된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 보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것을 부인할 없을 것입니다.

깨뜨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는 어느새 다시 죄를 생각해내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고 눈뜨자마자 사람을 보면서 미움과 질투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타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누구입니까?

막힌 담을 허물고 죄로 물든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결고리가 되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상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이라고 침례 요한이 말합니다.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분을 믿으십니까?

분을 영접하셨습니까?

다른 모든 것은 우리가 있을 모르지만,

달나라 아니 화성에도, 언제인가는 금성에도 있을 모르지만,

그리고 불치의 병인 척추장애도, 암도 에이즈도 해결할 있을 모르지만

우리의 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없는 너무도 거대한 장벽입니다.

 

장벽을 넘으려고 하신다면

분을 만나보셔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내가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아직까지도 내가 깨끗하지 못해서 하나님께로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세상 , 나의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 만나십시오.

 

그래야 해결할 있습니다. 거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번째 가르침입니다.

침례요한의 외침중에 가지 주의해서 보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분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막힌 담을 허물어주시려고 오시는 그분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지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오신다구요?

그렇습니다. 세상 죄를 지시는 분은

'어린 '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어린 양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사용 제물이었습니다.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대속의 제물입니다.

피가 흘러야 죄의 용서가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인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해결될 없는 죄의 심각함,

이것이 어린 양의 죽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출애굽 때에도 문설주에 바르는 피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피가 있어야 죽음의 재앙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역시 피흘림이 있어야만 해결될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만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은 누가 준비하는 것입니까?

누가 마련한 어린 양이어야 합니까?

여러분이 준비할 있습니까?

있지요.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들이 준비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준비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없는 그런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침례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읽어보실까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누구의 양입니까?

"하나님의 어린 "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양으로는 평생 구원을 얻을 없습니다.

가지의 죄악이 해결되는 양을 바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는 구원받을 없는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양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제사를 드리자마자 다시

죄를 범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평의 복음을 말해도 돌아서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련하는 것으로는 구원을 결코 얻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의 대답을 보십시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어린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준비된 양이 있어야

"단번에 영원한 제사"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피를 흘리시고,

죽임을 대신 당하고 우리의 죄를 없애주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분만이 죽임 당함으로 되는 ,

이것을 우리는 구원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 2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 율법 아래서는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졌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을 없기 때문입니다.".

 

피를 흘려야만 죄는 용서받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원칙을 만족시키려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피흘림을 당하는 어린 ,

하나님에게서 준비된 제사제물로 오시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나셔야 죄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인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하나님과 화목하게" (에베소서 2 12이하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바로 사역을 알리기 위해서

침례요한은 이제껏 목청을 높여 외친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죄를 회개하게 하는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분께서 직접 피를 흘리심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사실은

"세상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 관한 설명에 있지 않습니다.

얘기는 우리가 너무도 자주 들은 것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진정으로 우리가 살아날 있느냐 하는

물음을 떨쳐버릴 없는 것입니다.

 

분이 죽음으로 내가 살아나는 기적이 우리에게 있을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비한 비밀을 어찌 설명으로 설득할 있겠습니까?

 

일본작가 '엔도 슈사쿠' "신부 이야기"라는

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폴란드 출신인 젊은 신부는 일본에서 고아를 위한 사역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하게 신부는 자신의 삶에

새로운 운명의 사건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그가 고국을 찾은 때에 바로 독일의 나찌 군대가

폴란드를 밀물처럼 점령해 버린 것입니다.

강제 노동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을이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젊은 신부도 예외가 수는 없었습니다.

 

포로들은 기회만 있으면 탈출하려고 했었고, 그래서 탈출자로 인해

소란스러운 포로 수용소의 기강을 위해서 독일군들은 새로운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만일 막사 내에서 탈출자가 발견되면 탈출한 사람 대신

다른 사람을 공개적으로 총살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막사 안은 서로가 의심하며 따가운 감시의 눈총을 떼지 않는

살벌한 장소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폴란드 신부가 새벽녘에 눈을 떠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옆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오후쯤에 수용소에는 비상이 걸렸고

사람들은 운동장으로 모두 모였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있을 독일군 장교가 사람을 끌고 왔습니다.

바로 탈출에 성공한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공개 처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탈출은 아예 꿈꾸지 말라는

경고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탈출자는 조준하는 군인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함께한 포로들은 두려움과 수심에 잠겼습니다.

 

순간 사람이 뚜벅뚜벅 앞으로 나가 장교 앞에 섰습니다. 바로 신부였습니다.

 

"장교님, 사람은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만일 그가 지금 죽는다면 나머지 사람도 함께 죽는 것이 됩니다.

다행히 저는 신부이기에 딸린 가족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을 대신해서 내가 죽을 없겠습니까?"

 

놀라움으로 의아해 하면서 장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너의 생명이 아깝지도 않은가?

신부가 대답합니다.

"아깝습니다. 그래도 나는 혼자이며 사람은 자신까지 합하면 다섯입니다.

장교님의 아내와 자녀를 생각해서라도 저를 대신 보내주십시오.".

 

" 그렇다면 내가 오늘만은 자비를 베풀도록 하지".

장교는 차갑게 비웃듯이 말하면서 탈출자 대신 신부를 처형하도록 합니다.

총소리가 정적을 깨뜨렸습니다.

 

그날 , 밤이 깊어 막사로 돌아온 동료들은 아무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고

침묵만 흘렀습니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탈출했던 사람이었고, 그의 신부의 자리는 비어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실제의 사건을 소설화한 것입니다.

사람이 대신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날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가 죽었는데 어떻게 내가 살아납니까?

죄는 우리가 짓고, 대신 사람이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 그런 이해할 없는 사건이 어떻게 있을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 젊은 신부의 이야기는 그것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조금은 깨달을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침례요한도 그의 이성으로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31절과 3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도 그분이 정말 세상 죄를 지실 하나님의 어린 양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없습니다.

사실 침례요한은 예수님과 친척관계입니다.

사촌관계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모를 없습니다.

그러나 혈육의 관계는 있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성령이 아니면 침례요한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리스도를 주시라" (고전 12:3) 없습니다.

 

그래서 침례요한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 알라 하셨" 하시는 말씀을 받고서야 침례요한도 주님을 담대하게 예비할 있었고, 그의 사역의 신비를 말할 있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 누구도 오묘한 진리를 깨달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면, 진리의 , 지혜의 성령이 임하시면,

침례요한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백할 있을 것입니다.

 

말씀처럼 우리도

"그를 알지 못하였"지만 성령으로 인해 일을 깨닫고 분을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운행하시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확실하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말씀을 기억해보실까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3).

 

구원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하셔야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성령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 하나님께서 보내신 어린 양으로 인하여 새롭게 있습니다.

죄가 없어지고 하나님과 직접 만날 있게 됩니다.

어린 양의 죽음, 그리스도를 만나시면 이상 우리에게는

죄의 문제로 괴롭힘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 1-2).

 

이상 우리는 죄에 빠져 있지 않을 있습니다.

이상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 하나님 앞에 나올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있을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십시오.

어린 양에게, 피를 흘리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눈을 고정시키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 누구든지

새롭게 살리실 것입니다.

 

새롭게 지음을 받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다르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르게 수가 있습니다.

 

기자가 다시 수퍼맨 크리스토퍼에게 묻습니다.

 

"전신마비 환자가 이후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세상은 정말 아름답다는 사실입니다.

날아 다니는 , 뛰어 다니는 , 아름다운 , 들판의 농부의 모습,

바다와 석양등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줄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환자가 이후에 평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있는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바라보시고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새로운 존재로 살아 것입니다.

새로운 눈을 가진 사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아름답게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 눈을 고정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피조물로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