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거듭난 삶 2019. 5. 2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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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제자들

 

: [ 1:35-38]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1: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한의 증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절 이하에서는 예수와 제자들 간의 대면이 소개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주로 침례 요한의 증거를 토대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다.

 

저자 사도 요한은 침례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던 사건과 예수께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사건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계속되는 일련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부분에서는 침례 요한의 예비 진술에 관해 다루고(19-34)

둘째 부분에서는 예수와 제자들과의 초기 만남에 관해 다루었으며(35-51)

셋째 부분에서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고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준 이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2:1-11).

 

자기 제자 사람 - 여기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40).

 

그러면 익명의 제자는 누구인가?

19-34절의 생생한 필치로 미루어 ,

그는 당시 침례 요한의 제자로서 침례 요한과 사두개인들과의 논쟁과 침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증언을 목격한 자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서가 사도 요한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기에 인색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익명의 제자는 바로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침례 요한의 주요 메시지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의 () 관심은 예수께 집중되었을 것이다.

 

 

 

[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바로 하루 전의 증언을 반복함으로써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침례 요한은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킨다. 제자들 역시 어제 일어났던 제반 상황과 요한의 증언을 상기했을 것이다.

 

요한이 그의 제자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한 것은 그들을 예수에게로 보내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진 침례 요한의 신앙자세를 나타낸다.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1:37]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 '듣고'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

 

( 4:24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받으리니;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그리스도의 말씀(복음) 듣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이며, 구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러한 '들음' 수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까지 내포하고 있다.

 

(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따라서 요한의 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듣고 말에 순종하여 예수를 따랐다는 뜻이다.

 

예수를 좇거늘 - 말씀을 들음은 순종을 동반했다.

 

'좇거늘'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8:19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19:27-28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좇음' 바로 그리스도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동반한다.

 

따라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 뿐만 아니라

 

(8:12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고난에 까지도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본문에서,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잠정적인 탐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와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결단의 주사위를 던진 것이다.

 

특히 우리는 장면에서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께로 자신의 제자들을 흔쾌히 인도하는 침례 요한의 거인적(巨人的) 면모를 엿볼 있다.

 

 

 

[ 1:38] 예수께서 돌이켜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무엇을 구하느냐 - 여기에서 '구하느냐' '찾아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이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

 

(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일백 마리가 있는데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9:10 인자의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는 요한의 제자가 예수를 따르는 동기를 확고히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본서에서 예수의 말씀으로서는 최초로 나오는 문장은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 좇아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것이라).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보화를 것이다.

 

(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밭을 샀느니라).

 

랍비여 - '랍비' '나의 존경하는 '이란 뜻을 지닌 아람어이다.

 

초기 유대교에서 부터 용어는

 

(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상급자를 지칭하거나

(2) 제자들이 선생을 칭할때 사용되었다.

 

그후 B.C. 2세기경부터 용어는 제자들이 선생을 공손히 부를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용어는 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반해서

 

(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나 유다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 9: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14:45 이에 와서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본문에서 칭호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의 단호한 결단과 아울러 그들의 영적 제한성(制限性) 함께 시사한다.

 

(1) 먼저 칭호는 그들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어디든지 따르겠노라고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참조 : (37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2)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이나 행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이다.

 

바로 앞에서 사람은 침례 요한으로부터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29)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34)이시라는 말을 들었지만,

 

진정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 고백적 차원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승을 일컫는 정중한 어투인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계시오니이까 - 헬라어 '푸 메네이스' 문구는 '랍비'라는 호칭과 함께 사용되었던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번역하면 - '번역하다', '해석하다'라는 뜻의 용어는 그리이스의 신들 중에서 변론(辯論) 전령(傳令) 신인 '헤르메스'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또는 신약성경은 같은 의미인 '메데르메뉴오'라는 표현도 사용하며, 개역 성경에서는 용어를 모두 '번역하면' 또는 '번역한즉'이라고 옮겼다.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에 1( 1:23),

마가복음에 3( 5:41;15:22, 34),

요한복음에 4(본절, 41, 42;9:7),

사도행전에 3( 4:36;9:36;13:8),

히브리서에 1( 7:2)쓰였다.

 

이러한 표현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히브리적 용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특히 저자 사도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 있게 재현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용어들이 헬라인들에게 이해될 있도록 번역을 첨부한 것이다.